문화

如一同行 백 서른 한번째 - 보령

세종해피뉴스 2023. 9. 20. 21:26

 보령을 방문한다. 보령에 문화재 탐방을 위해서는 성주사지를 둘러 보아야 한다. 이 곳에는 국보와 보물이 많은 절터이다. 성주사는 백제시대 오합사라는 절로 시작하는데, 이 곳은  전사한 영령들을 위로하기 위한 호국사찰 이었다고 한다. 백제 멸망 후 폐허로 있다가, 통일 신라시대에 당나라에 유학한 무염대사가 머무르면서 선종을 크게 일어난 사찰이다. 선종은 어려운 불경을  모르더라도 수양을 잘하기만 하면 마음속에 있는 불성을 깨달을 수 있다는 불교 종파라고 한다. 전국 9산선문중 하나인 성주산문의 중심사찰이었는데, 임진왜란을 겪으며 쇠퇴하다가 17세기말 이후 폐사되었다고 한다. 잘 정비된 사지에 들어설때 마다 탑만이 존재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이곳도 잘 발굴 조사 되어 잘 닦아 놓은 터를 지키는 탑들을 보게 된다.  들어서면 입구에 석등이 먼저 맞아준다.

 

[성주사지 석등]

7층 석탑 앞에 자리한 통일 신라시대의 석등으로 지붕돌에 비해 등불을 두는 화사석과 받침기둥이 가늘게 보인다. 팔각형 지붕돌 위의 상륜부는 파손되고, 높이는 220cm라고 한다. 재료는 화강암으로 파괴된 것을 근래 수습 하였다고 한다.

 

[보물 제 19호 보령성주사지 오층석탑]

 사지를 들어서면 먼저 맞이하는 화강암인 이탑은 성주사의 불탑으로 여겨진다. 2증 기단에 5층의 석탑으로 전체높이는 634cm이다. 기단부와,옥개석, 탑신석의 체감율이 완만하게 균형을 이루며,  1층 몸돌에 사리공이 있고, 기단부와 1층 몸돌 사이에 괴임돌이 있는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통일 신라시대는 2중 기단에 3층 석탑이 석탑 양식인데, 5층인 것은 이 곳이 백제의 영역이어서 백제 신라의 양식이 혼합된 것으로 보거나, 당시의 다양한 탑 양식 가운데 하나로 보기도 한다. 상륜부는 없어진 상태이다. 

이 탑을 지나 금당의 자리로 오르는 곳에 사자상이 조각된 계단이 자리한다.

 

[성주사지 석계단]

 통리 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성주사의 금당에 오르는 계단으로 양쪽에 사자상이 조각되어 있다. 이 사자상이 1986년에 도난 당하여, 현재는 사진을 기초로 새로이 복원하였다고 한다.

왼쪽의 사진이 원래의 사자상이며 오른쪽이 새로 복원한 것으로, 방치되어 있던 때의 모습을 보니 아직도 찾지 못 함이 안타깝다. 

 

[성주사의 금당터와 3층 석탑]

금당터안에는 석불좌대가 세월의 흐름 속에 없어진 성주사 금당터를 알려 주는 듯 하다.

 

[보령 성주사지 3층 석탑 3기: 서, 중앙. 동 삼층 석탑]

금당터 뒤에 자리한 3개의 삼층 석탑은, 한국의 1가람 1탑과는 다른 모습으로 동서도 아닌 중앙탑 까지도 가지고 있어 특이하여, 아마도 다른 곳의 것을 모아 놓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보물 제 47호 보령 성주사지 서 삼층석탑]

보물 제 47호 보령 성주사지 서 삼층석탑(保寧 聖住寺址 西 三層石塔)은 성주사지 금당터 뒤의 3기의 석탑 중 서쪽에 자리한 석탑으로, 2중 기단위에 3층 석탑이다. 면석과 탑신석에는 우주와 탱주가 있고, 지붕돌에는 4단의 층급 받침이 세겨져 있는 통일신라 말기의 전형적인 형태이다. 화강암으로, 높이는 443cm 이라 하며 상륜부는 없다.  이 탑은 지붕돌에 불교행사시 금동판과 장식품을 달아 탑을 화려 하게 하는 데 사용되는 작은 구멍이 있다. 이 탑은 승탑으로 추정 되었으나, 성주사 사적기에 적힌바에 의해, 정광, 가섭, 약사여래 사리탑 중의 하나이며, 발굴 조사결과 다른 곳에서 옮겨 온 것으로 밝혀 졌다고 한다.

  

[보물 제 20호 보령 성주사지 중앙 삼층석탑]

성주사지 중앙 삼층석탑은 금당지 뒤편의 3기 석탑 중 가운데 석탑으로, 2층 기단에 3층 석탑으로 재료는 반려암이라 한다. 통일신라의 양식이며, 높이는 410cm 이라 하고, 상륜부가 없다. 이 탑도 서 삼층석탑과 같은 정광, 가섭, 약사 여래 사리탑 중의 하나 이며, 발굴 조사 결과 다른 곳에서 옯겨 온 것이라 한다.

 

[보물 제 2021호 보령 성주사지 동 삼층석탑]

성주사지 동 삼층석탑은 3개의 석탑 중에 동쪽에 자리한 석탑으로,  서 삼층석탑과 중앙탑과 같이 정광, 가섭, 약사여래 사리탑 중의 하나이다. 이 탑은 2층 기단에 세워진 3층 석탑으로, 면석과 몸돌에는 기둥이 새겨져 있으며, 지붕돌은 4단의 층과 받침이 새겨져 있고, 1층 몸돌에는 문그림을 새기고, 그 안에 자물쇠와 고리를 도드라지게 새겨 놓았다. 이는 몸돌안의 사리공에 부처님의 유골이 모셔졌음을 나타낸다고 한다. 상륜부는 없지만 체감률이 우수한 조형미를 가지고 있다.  다른 탑에 비해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다가 2019년 보물로 지정 되었다고 한다. 

 

[문화재 자료 성주 사지 석불 입상]

 이 석불입상은 고려 말과 조선 초 사이에 세워진 민불(民佛)이라 한다. 본래는 절 주변에 있었는데 어느 시기인가 옮겨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불상의 얼굴이 타원형으로 코와 오른쪽 귀는 풍화되어 원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오른손은 내리고 왼손은 배에 대고 있는 듯한 형상이다. 손은 형상이 없고, 입고 있는 법의는 양어깨를 모두 덮고 발까지 내려와 있는 형상이다. 성주사지 터에 자리한 다소 뜬금 없는 모습으로 느껴진다.

 

[사지 뒤편서 본 탑의 배치모습]
[국보 제 8 호 보령 성주사지 대낭 혜화상 백월보광탑비]

성주사지 대낭 혜화상 백월보광탑비는 얼굴의 일부분이 깨져 있는 거북은 머리 위쪽에 둥근 뿔이 나 있고,  뒤로 째진 눈에는 눈썹이 휘말려 있으며, 입은 불을 내뿜으려는 기세이다. 등에는 선명한 이중의 육각무늬를 새기고, 중앙에는 제법 굵직한 구름무늬가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구름무늬 위로는 비몸을 꽂아두는 네모난 홈을 높게 마련하여 각 면을 장식하였다. 

비를 세운 시기는 적혀 있지 않으나, 낭혜화상이 입적한 지 2년 후인 진성여왕 4년(890)에 그의 사리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어 이 때 비도 함께 세웠을 것으로 보고 있다.

 

[국보 제 8  호 성주사지 대낭혜화상 탑비]

통일신라시대 성주사에 머물며 선문 9산 중 성주 산문을 일으키신 무염대사를 기리기 위하여 최치원이 왕명에 의해 지은 비석으로, 이 비석에는 5,120여자의 긴 비문이 새겨져 있고, 최치원의 문장을 최인연이 해서체로 썼다고 한다. 내용은 무염대사의 성장과 출가, 중국의 유학과정과 성주사를 일으키어 불법을 전하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신라의 선종사와 당시의 신분제도 연구에 활용 된다고 한다. 남포오석으로 만들어져 1000여년의 세월에도 잘 유지 되어 오고, 최치원의 명문장과 우수한 보전상태, 뛰어난 조각술 그리고 웅장한 크기로 인해 통일신라 말기의 고승 탑비 중 최고로 인정 된다고 한다. 

길다란 비몸은 앞면에만 비문을 새기고, 위쪽 양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 놓았다. 맨 위에 올려진 머릿돌은 밑면에 연꽃을 두르고, 그 위로 구름과 용이 서로 뒤엉킨 장면을 입체적으로 조각하였는데, 용이 머리를 내밀고 있다. 

 

 

새로이 천년역사관이 지어져 이곳 성주사지의 역사적인 배경과 유물을 전시하며 많은 것을 알려주고 있어 사지방문 전에 먼저 들려 많은 정보를 가지고 사지를 둘러 보기를 권한다.  특히 오래 전의 사진을 전시하여 복원 전의 성주사지의 모습을 잘 알게 된다.

 

[일제 강점기 기록으로  남은 자료]

이곳의 사진을 보며 나의 여행을 통한 사진 들도 언젠가는 요긴하게 사료로 될 수도 있다는 기대감을 갖게 한다. 

성주사지의 방문을 마치며 귀가 길 오래 된 다리를 찾아 본다. 여행을 통하여 여러 곳의 돌다리를 둘러 보았지만, 이번에 처음 보게 되는 한내 돌다리에 기대감을 갖고 찾아본다.

 

[한내 돌다리]

조선 중기 이전에 만들어진 다리로, 대천천 하류에 놓여 있는 다리로 조선시대 남포현과 보령현의 남북을 연결하는 교통로의 역활을 하였다고 한다. 동국 여지 여지도서 등의 기록으로 보아 17세기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1910년 근래식 교량이 들어서며 다리의 기능을 상실한다. 1978년 허물어진 시렁돌 일부를 수습하고 1991년 매몰된 일부의 교각이 들어나 이곳으로 옮겨 복원하였다고 한다.

 

[한내 돌다리]

다른 기록 들을 알아보면, 다리의 규모는 폭 2.38m, 길이 50여m로 12경간으로 돼 있었다고 전해진다. . 바닥이 3개의 시렁돌로 이뤄져 우마차 통행에 적당하게 설계 된 단순하고 실용적인 다리이다. 석재는 거의 화강석으로 돼 있는데 석질로 보아 왕대산에서 채취해 큰 사리 때 뗏목으로 운반해 왔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설치시기는 동국여지지, 여지도서, 신안읍지 등에 언급돼 있는 것으로 봐 17세기 이전으로 보이며, 양식은 고려 원종 15년(1274)에 만들어진 함평 고막천 석교와 비슷하다고 한다. 1970년대 초까지 약 20m정도가 남아 있다가 붕괴 돼 일부는 하천제방 석축으로 사용되고 일부는 1976년 7월 읍사무소로 옮겨 보존하다가 1992년 12월 이곳에 복원했다고 한다. 함평의 고막천 석교가 궁금해 진다.

 

 

다리의 구조는 1.5~2.0m정도의 자연석 지대석을 묻고, 그 위에 다듬은 받침돌 3단을 횡으로 쌓아 다리 기둥과 멍에를 대신 한 다음, 그 위에 길이 3.0~4.5m, 폭 70~90cm, 두께 30~40cm 정도의 다듬은 시렁돌 3개를 얹어 다리 바닥을 구성했다고 한다. 

 

이제는 나름 보전이 잘된 사지와 다리를 둘러 보며 가벼운 마음을 갖는다. 온전한 옛 모습 그대로 관리 보전 되지는 않지만, 현재에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복원해 나가는 것에 찬사를 보낸다. 새로이 복원된 성주사지의 돌사자를 생각하며, 개인의 욕심으로 본래의 자리를 지키지 못하는 많은 것 들이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든다. 해는 지고, 머물러 보내는 시간이 허락하지 않으니, 이곳을  둘러 보는 것으로 여행의 목적을 마치며 집으로 향한다. 

 

如一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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