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백 스물 일곱번째 광주

세종해피뉴스 2023. 8. 27. 22:13

- 남한산성

오늘은 광주의 남한산성을 찾아 본다. 남문 주차장에서 이 곳을 많이 오르 내린 친구를 만나 함께 하는 길이다. 늘 산 길로 0.6 km 이상이면 무리라고 생각하는데, 비가 간간이 뿌리는 길을 회포의 막걸리 한잔의 힘을 빌려서, 보물을 찾아 남한산성을 오른다. 성벽을 도는 산행이 아닌 이곳에 새로이 보물로 지정된 곳을 둘러 보려 한다. 먼저 친구의 안내로 지름길로 수어장대로 향하는 길로 오른다. 나름 지름길이라서 인지 목에서는 신음 소리가 나기 시작한다. 지름길이 좀 더 험하지 않는가 의심하며 뒤를 따르는데 많은 분들이 옆을 지나쳐 앞서 간다.  산속 갈림길에서 숭렬전이라는 글귀를 보아 반기며  이내 길을 벗어나 숭렬전으로 향한다.

 

[보물 광주 숭렬전]

숲속에 자리한 숭렬전은 안내판을 통해 공부해 본다. 이 곳은  백제 시조 온조왕과 산성축성 당시 책임자인 이서 장군의 영혼을 모신 사당이라고 한다. 왕과 신하를 함게 모신 특이 함에는  병자호란 당시 인조의 꿈에 온조가 나타나 청나라 병사의 침공을 알려 주어, 이를 기리기 위해 사당을 세우자 온조가 혼자는 외로우니 충직한 신하 하나 보내 달라고 하였다고 하는데 다음날 이서 장군이 병사하여 인조는 이를 온조왕이 이서 장군을 데려간 것으로 보고 함께 사당에 모시게 된 것이라 한다.  

 

[예전의 모습]

안매판에서 였모습의 사진을 얻는다. 복원되어 선명한 색상의 모습보다 정이 간다. 남한산성 숭렬전은 백제시조인 온조왕(溫祚王)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사당으로, 1638년 인조 16년 세워졌고, 원래는 온조 왕사라 하였는데 1795년 정조왕이 '숭렬' 이라 명기한 현판을 내린다.  숭렬전은 17세기에 이건한 뒤에 지은 건물이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창건 사실이 역사문헌을 통해 증빙되며,  원 위치를 지키고 현재까지 제향이 계승되고 있어 역사적, 문화사적 가치가 높다고 하여 보물로 지정된다.

 

이 곳을 돌아 나와 이번에는 수어장대로 향한다.  짙은 비안개에 모습을 들어낸 수어장대의 모습은 스산하면서 기괴한 모습이었다. 마치 역사 속의 슬펐던 상황을 내게 들려주는 듯 하다.

 

[보물 광주 수어장대]

수어장대는 남한산성 서쪽의 청량산 정상에 성의 내외를 굽어 볼 수 있는곳에 자리한  군사적 요충이다.  1751년(영조 27) 중층의 장대를 건축하고, 안에는 무망루, 밖에는 서장대라 편액 하였고,  현재의 건물은 1836년(헌종 1) 개건된 것으로 이 때 지금의 ‘수어장대’란 현판을 써서 달았다.

 

[수어장대 측면]

수어장대는 남한산성 내에서 중요한 장소에 자리한 규모가 큰  장대로서 19세기 중건 이래 원형을 잘 유지해 오고 있다. 이 장소는 병자호란 당시 인조는 물론이고, 이후 숙종, 영조, 정조, 철종, 고종 등 역대의 국왕이 남한산성을 찾을 때는 찾아서 옛 일을 잊지 않고 기억하였던 곳으로도 의미가 크다고 한다.

 

[수어장대 정면]

하층은 정면 5칸, 측면 4칸, 상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인 중층 건물로서, 한편, 세부 의장에 있어서는 초익공과 이익공의 구분 사용, 화반의 초각, 운공의 사용, 팔각의 장초석, 지붕마루의 양성과 용두, 모로 단청, 큰 글씨로 써진 편액 등에서 권위 건축에 어울리는 격식과 위엄을 잘 보여준다. 하층 실내 공간의 기둥 내부는 장마루를 깔고, 판벽과 평난간으로 구획한 공간으로 꾸미고, 그 둘레의 퇴칸부는 방전을 깐 바닥공간으로 하여 두 영역을 나누었으며, 상층의 실내 공간은 전체를 장마루를 깔고 사방으로 널판문을 달았다.

수어장대를 나서며 남문으로 길을 잡는다. 

 

[수어장대 향나무와 소나무]

 수어장대의 오르는 곳에는 청량당이라는 신당이 자리한다. 축성과 관련 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청량당 앞마당 벽 옆에는 향나무가 자리한다. 이 나무의 한가지가 벽을 뚫고 나가 마치 벽 뒤에 다른 나무 처럼 자리한 모습이 눈길을 끈다. 

 

남문으로 향하며 복원한 성곽과 암문을 볼 수 있다. 성곽은 백제의 시조 온조의 왕성 성곽이란 기록이 있고, 신라 문무왕때에 한산주에 쌓은 주장성이라는 기록도 있는데, 조선조 광해군때 본격적으로 축성하기 시작 하였다고 한다. 인조가 40여일간 청에 항쟁하나  항복한 역사적 아픔이 있는 곳으로 성벽의 길이는 12km 정도라 한다. 이곳을 잘 아는 친구의 설명을 들으며  비안개로 보이지 않는 성 아래의 성남을 잠시 구름이 걷히며 보게 된다. 성벽을 따라 가다보니 남문이 자리한다.

  

[암문, 성벽과 남문의 모습]
[ 남문, 至和門]

성남, 위례에서 오르며 바라본 남문의 전경으로 뷰 포인트를 알려주는 친구를 따라 남문을 통과하여 찾아본다. 병자호란시 인조가 이 문을 통해 산성으로 들어온 곳이며,  소현세자와 함께 서문을 통해 청나라 진영으로 가서 화의를 맺고 항복을 하였다고 한다. 

함께 보고자 했던 마지막 남은 보물 연무관은  남문 주차장에서 멀지 않아 주차장을 지나 연무관을 찾아간다. 

  

[보물 광주 연무관]

1625년(인조 3)에 창건된 것으로, 1626년에 창설된 중앙 군영인 수어청의 중심 건물이다. 1795년 수어청의 경청이 폐지된 이후 수어청의 본영이자 광주유수의 집무처로 사용되며, 창건 이래 세 번에 걸친 중수의 기록을 상량묵서와 상량문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으며, 편액에 있는 연기는 1762년(영조 2)의 것이라 한다. 기둥을 보호하면서 건물의 위용을 나타내는 주련은 기둥보다 더 큰 나무를 사용하여 기둥 외부를 완전하게 감싸도록 하였다.

 

[연무관의 측면]

한옥으로 지어진 학교 건물 옆에 자리한 연무관은 크기나 위용에서 주변을 압도하는 분위기로 자리한다.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정면과 배면에 퇴칸을 두고 있으며 좌・우측에도 퇴보를 설치하여 구성하고 있다. 군사시설 그리고 연병장 같은  공간에서 국왕이 백성을 직접 대면 할 수 있었던 장소로서의 성격이 있고, 연무관 뒤편에는 지방행정을 담당하는 판관의 근무처와 주위에 향청, 작청 등의 관아시설들이 배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연무관의 내부모습]

 특이한 점은 연무관이 군사시설의 관영건축으로 중앙부에서 기둥을 후면으로 이주하여 벽을 세우고, 국왕이나 수어사가 자리할 수 있는 공간을 형성한 것이다. 연무관은 군사시설 기능뿐 아니라 정조의 남한산성 행차시 국왕이 백성들과 대면한 정조의 애민정신이 깃든 장소라고 한다.

 

남한산성이 문화유산으로 등재 된 후 많은 정비작업을 통해 새로운 명승지로 자리매김 하는 것 같다. 행성 및 많은 건물과 성벽이 새 단장 된 것 같다. 이곳으로 편히 차로 올라온 길이 남한 산성에 식량을 추진하던 길이라 일러주는 친구를 통해 전쟁에서 겪는 일반인이 고생을 다시금 생각해 본다.  전쟁은 군인 만이 아닌 우리 모두의 전쟁이라는 것에  슬픔을 느껴본다. 우리에게는 아픈 기억으로만 남아 있는 삼전도의 굴욕을 되새기는 이곳, 남한 산성이 주는 교훈을 깨우치는 교육의 장으로 거듭 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보물을 통해 문화유산이라는 자랑보다는 이 땅의 미래세대에게 아픈 역사를 들려주고 나라의 중요성을 느끼게 하는 교육의 장으로 쓰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며 집으로 향한다.

 

如一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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