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백 서른번째 - 논산

세종해피뉴스 2023. 9. 13. 22:34

- 명제고택, 궐리사

논산으로 길을 접어든다. 기억해 보니 지난 겨울 일흔번째 여행 길, 이곳 논산의 명제고택을 소개 했으나, 그 때는 겨울이라 고택의 여름 멋을 느끼지 못했다는 생각으로 다시 방문해 보려 한다. 푸른 녹음과 여름의 태양광에 밝게 빛을 발하는 모습, 그리고 물이 채워진 연못으로 생명감이 있는 모습이 기대된다.  집 앞에 당도하니 네모난 인공 연못에 원형의 섬에 연잎과 함께 자리한다. 물가를 한번 돌고 넓은 마당이 있는 고택으로 향한다.

 

연꽃이 피어난 연못도 갖춘 이 고택은 지정 당시 명칭은 '윤증선생고택(尹拯先生故宅)'이었으나, 조선 숙종 때의 이름난 유학자 명재 윤증(1629-1711)이 지었다고 전하는 가옥인 점을 반영, 그의 호를 따라 ‘논산 명재 고택’으로 지정명칭을 변경(2007.1.29)하였다고 한다. 연못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을 형상화한 것이라한다.

 

연못을 지나니 여름의 녹색 세상에서 붉은 꽃을 자랑하는 배롱나무의 줄기가 고택과 어울려 방문자의  맘을 설레게 한다. 

고택은 노성향교와 나란히 남향으로 조선 후기 숙종때에 건립되어, 후대에 수리 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안채와 사랑채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고 한다.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 되어 있다. 

 

한 여름 한옥 건물과 가장 잘 어울리는 배롱나무가 함게 하여 오늘의 방문을 맞아주고 있다. 

 

[사랑채]

이산(尼山)이라고도 불리는 노성산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산 줄기의 남사면에 남향으로 자리하는, 집 전체의 평면 구성 형태는 ‘ㄷ’자의 안채와 ‘一’의 사랑채가 조합을 이룬 ‘ㅁ’자형 집이다. 사당은 멸실 되었던 것을 1983년 복원하였다고 한다. 사랑의 앞면에는 넓은 마당이 있고, 마당의 왼쪽에는 우물이 있는데 나무로 둘러쌓여 있다.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 오른쪽 엔 대청을 두고, 왼쪽에 누마루를 두고, 중앙에는 2칸 규모의 온돌방이 있으며, 앞면은 반 칸을 안으로 들여 툇마루를 두었다.

 

[사랑채 옆면]

누마루 후면으로는 1×2칸의 방이 꾸며져 있어, 대문 옆의 행랑채와 ‘ㄱ’자형으로 연결되고 있다.  구조는 공포가 없는 민도리로, 퇴고주를 세워 퇴량과 대들보를 걸었으며, 종량 위에 있는 제형 대공에서는 뜬창방을 볼 수 있다.

 

[사랑채 측면]

온돌방 뒤에 반 칸의 고방(庫房)이 있으며, 대청에 문을 달아 개방과 폐쇄를 통하여 사생활 공간의 자유를 보장 받는 듯 하다.

 

 

대청에서 내려다 보는 장독대를 보며 풍요로움과 여유를 만끽했을 것 같다. 

사랑채의 오른쪽으로는 현재 윤증 집안에서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통 장류를 상품화하여 지역 특산물로 양산하기 위한 장독대들이 들어서 있다.

 

[사랑채와 중문간채]

 

 높은 기단 위에 사랑채가 있고, 왼쪽 1칸 뒤로 '一' 자형의 중문간채가 자리한다. 중문간채는 안채로 가는 1칸 돌아 들어가게 중문이 있다. 중문을 들어서면 'ㄷ'자 모양의 안채가 있어, 중문간채와 함께 튼 'ㅁ'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안채]

들어가 볼 수 없어 소개 글로 정리 유추 해본다. 안채는 1고주 5량가 구조로,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대청과, 뒤편 좌우에 각각 쌍여닫이 띠살문의 고방(庫房)이 있고, 대청의 서쪽으로 2칸의 안방과 1칸의 윗방을 두고,  남쪽으로 부엌이 있다. 안채의 남쪽에 위치한 대문채는 사랑채와 ‘ㄱ’자로 연결된다. 대문이 별도로 없어 중문을 대문으로 겸하되, 문이 열려도 안채가 바로 보이지 않게 판자벽을 두어, 외부 시선을 차단하는 역활을 하게 한다고 한다. 

 

자연에 녹아 들어 자리잡은 고택을 나와 궐리사로 향한다. 여느 사찰이라고 생각하기 쉬운 궐리사는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명제고택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공자의 영정이 봉안된 사당이다. 노성 궐리사는 공자가 자란 마을인 궐리촌(闕里村)에서 유래한 명칭이라 한다. 궐리사는 강원도 강릉과 충청북도 제천에도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경기도 오산과 이곳만 남아 있다고 한다. 

현재는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궐리사]

기록을 통해 보면 숙종실록에  1717년(숙종 43) 공징로·공사중 등이 재상 이경억을 따라 중국에 가서 공자의 유상(遺像) 일체를 얻어 왔으며, 1758년(영조 34) 이제후 등의 상소로 이때 가져온 공자상을 노성궐리사에 봉안하였다고 한다. 또 『읍지』에는 궐리사가 이산현(尼山縣) 북쪽 3리 지점에 있었으며, 1716년(숙종 42) 공자의 영정을 구해 노성의 이구산(尼丘山)에 사우를 건립한 후 봉안하였다고 되어 있다고 한다. 

안내문에는 1687년 송시열이 세우려고 했는데 2년뒤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새상을 떠나 뜻을 이루지 못해 , 1716년 그의 제자들이 노성구산에 세우고, 1717년 공부자유상을 모시고, 1791년 송조 오현인 주돈이, 정호, 정이, 장재, 주희의 초상을 추가로 모시고 , 1805년 관찰사 박윤수등이 사당을 지금의 위치로 옯겼다고 전한다  현재의 건물은 당시 규모보다 축소되었는데, 일명 춘추사(春秋祠)라고도 한다.

 

[공부자유상과 석주]

궐리사 옆에자리한 기념물에 눈길이 간다.

 

[석주]

노성궐리사의 동쪽에 ‘궐리(闕里)’라고 음각되어 있는 높이 3.91m 석주의 지름 38cm 석주(石柱)가 있다. 석주는 각을 없앤 배흘림 4각 기둥의 형태로, 꼭대기에는 정방형 옥개석이 올려져 있다. 노성궐리사의 건립 시기와 비슷한 때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측된다고 한다. 정확한 기둥의 목적은 알 수 없으나, 아마도 권리사의 표시물, 오늘날의 기관명을 표시하는 현판과 같은 기능을 한것이라 추정한다. 궐리라는 글씨는 송시열의 제자인 권상하의 작품이라 한다. 네모의 기단위에 북두칠성의 7개별이 그려져 있고, 기단위의 부두칠성의 맨 끝별이 공자가 탄생하신 중국 곡부의 니구산을 가리키고 있고, 탑부분의 옥개석의 흠부분은 별의 빛을 의미한다는 설이 구전되고 있다고 한다.

 

[공부자유상]

석주 뒤에 2002년 중국에서 구입한 높이 약 2m의 공자상이 있다.

 

  

노성궐리사의 건축 구조는 세 구역으로,  외삼문을 지나면 현송당(絃誦堂)이 있고, 현송당 뒤편의 내삼문을 지나면 사우가 있다. 궐리사의 서쪽 담장에 연결되어 모성재(慕聖齋)와 관리사와 문간채가 있다. 중건 당시보다 는 규모가 축소된 것이라 하는데, 경내에는 강당인 현송당, 내삼문, 궐리사, 모성재, 관리사, 문간채 등이 있다.

 

[권리사 관리사]

 아마도 재를 올리기 전 제주들의 대기장소 였을까 그 용도를 어림 짐작해 본다.

 

[궐리사]

 자료들에 따라 건립 시기에 차이는 있으나, 1687년(숙종 13)송시열이 궐리사 건립을 추진하고, 노론이 집권하면서 권상하 등 송시열 문인들이 스승의 유지를 받들어 1716년 노성궐리사를 신축하였다고 본다.

 

 

구석 구석 알아가는 재미, 같은 곳을 계절을 달리하여 보는 재미를 느껴본 하루라 생각한다. 문화재를 통해 옛사람 들의 삶을 알 수 있음을 보며, 다만 이 는 당시 권력이나 재력 또는 재능을 가진 자들이 남겨 놓은 것 인데, 동시대를 같이 한 많은 민초라는 사람들의 삶은 어디서 알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 같이 만든 역사 일텐데.  잠시간  이 후의 우리의 후손 들에게 우리는 하나하나 삷의 자료가 남아질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컴퓨터에 저장 되어진 많은 데이타가 남는다면, 우리의 후손은 우리의 개인의 삷도 모두 알 수 있을 듯하다. 왕의 역사가 아닌 개인의 역사도 정리 가능할 테니, 나의 이러한 여행의 기록도 남겨져 역사 속에  읽힐 수도 있다고 생가하니 여러 생각이 든다.  단순히 여름의 고택을 방문하여 미래에 대한 생각까지 하며 귀가한다.

 

如一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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