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백 스물 여섯번째 - 성주(2)

세종해피뉴스 2023. 8. 26. 02:06

한개 마을에 들어서기 전 마을 지도를 살펴 본다.  이곳 출신의 후배님의 권유도 있고, 한개 마을은 안동의 하회마을, 경주의 양동마을과 함께 3대 전통마을 이라고 하여 찾아보고 싶던 곳이다. 

 뙤약볕아래 마을을 둘러본다. 입구서 좌우로 갈리는 길 중에 비교적 종택이 많아 보이는 왼쪽길로 접어든다. 실제로 주민들이 생활하고 있는 마을의 종택은 찾아 보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라 조심조심 방문해 본다.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산1리의 한개마을은 조선 세종때 진주 목사를 역임한 이우가 입향하여 거주한 때로부터 560여년을 내려오면서 성산 이씨가 집성하여 살고 있는 전통 깊은 마을이라 한다. 이곳에는 경상북도 문화재로 지정된 건축물이 9동 이며, 이들은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에 걸쳐 건립되어, 풍수지리학적 마을 구성이나, 상류주택과 서민주택의 배치 등이 조화를 이룬  마을이다. 또한 많은 과거 급제의 인물과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마을로 '한개’라는 마을 이름은 예전에 이곳에 큰 개울 또는 나루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광대바위와 이정표]

마을로 들어서는 길에는 광대바위와 이정표가 자리한다. 과거 급제자의 잔치를 하던 곳이며, 밧줄을 나무와 이 바위에 메고 광대들이 3일을 머물며 '광대걸'이란 민속줄놀이를 하던 중, 도중에 줄이 끊어지면서 광대가 바위에 떨어져 죽은 사고가 있어, 이바위를 광대바위라 한다는데, 밤에 한동안 죽은 광대가 바위근처에 나타나  무서워 출입을 못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마을을 대표하는 이어지는 토속탐이 걸음을 가볍게 한다. 

 

[상주 응와종택]

왼쪽으로 차로 오르며 문이 열려 있는 응와 종택을 찾는다. 성산 이씨의 발상지로, 이곳에 입향시 종택인 대초당을 1721년에 이이신이 매입하여 터전을 마련한 곳이다. 아들 돈재 이석문이 북쪽으로 문을 내어 '북비고택'으로도 불린다.

 

[응와고택 사랑채]

응와 이원조가 1845년 사랑채로 사미당을  낙성한다. 사랑채의 규모나 모습과 수목의 관리가 대감댁의 위용을 나타내고 있다.

 

[사랑채와 솟을 대문]

솟을 대문은 고종 36년에 증축하여 대감댁의 면모를 갖추고. 충절과 학문을 중시하는 가문의 이 가옥은 안채, 사랑채, 안사랑채, 사당, 죽비채, 대문채 등 6채로 구성되어 있다.

 

 

가옥의 이름은  안주인이 시집 온 지명을 붙인 월곡댁,  하회댁과 벼슬에 따라 붙인 교리댁, 호를 따라 붙인 극와고택, 한주고택 등으로 불리는 것 같다. 집안을 속속이 둘러 보지는 못하였지만, 가옥의 자리함이 멋진 마을을 이루며, 같은 성씨의 집성촌으로 정을 나누면서 좁은 골목을 이웃하며 지내온 곳이라 정겹다.

한주 종택, 한말 독립운동가인 이승희의 생가를 들어서 보고 골목끝까지 둘러본다.

 

[한주 종택]

 이인검이 처음 짓고 1866년 이진상이 고쳐 지었으며, 1910년 이승희가 아버지인 이진상의 호를 딴 한주 정사를 지으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이번의 비 피해로 인하여 담장이 무너져 공사 중인데, 마당의 소나무와 당호가 무너진 담너머로 봐도 옛스러움을 보여준다. 마을의 왼편을 주로 구경하고 볼거리인 첨경재는 뒤로 한채 마을을 나선다. 이곳을 자랑하던 이곳의 자손인 후배님의 귀뜸을 무심히 넘기지 못하고 방문한 이곳에서 많은 것을 보고 얻고 간다. 

 

성주 대왕 태실로 향한다. 입구에서 더운 날의 뙤약볕에서 이 곳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여 주신 도씨 성의  해설사로 부터, 이곳이 명당이며, 태실의 유래와 역사이야기 그리고 태실을 없애는 일제의 만행으로 부터 이 곳을 지켜 내오신, 성함을 기억나지 않는 도씨 성의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아룰러 성주가 우리 만이 갖는 장태문화를 세계문화 유산에 등재하기위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도 알게 된다.  

이곳 성주에서는 '생명이 깃든 태실, 희망 충전 성주 여행' 이라는 기치아래 이곳 태실이 문화유산으로 등재 되기를 바라며 많은 활동을 하고 있다.

 

[태봉으로 오르는길]

주차장서 태봉을 오르는 계단 길을 걸어 올라 본다. 이곳은 픙수 지리상으로 좌청룡 우백호 형상의 선석산과 가운데 도톰한 알봉인  태봉 그리고 앞에 자리한 연못인 인촌지 등이 좋은 기를 많이 받을  수 있는 명당이라고 하여 걸어 오르며 많은 기를 받아본다.  

 

세종대왕자태실은 성주군 월항면 선석산 아래 태봉(胎峰) 정상에 있으며, 세종의 적서(嫡庶) 18왕자와 세손 단종의 태실 등 19기가 군집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태실은 왕실에 왕자나 공주 등이 태어났을 때 그 태를 넣어두던 곳을 말한다. 세종대왕자태실은 조선초기 태실 형태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며, 우리나라에서 왕자태실이 완전하게 군집을 이룬 유일한 곳이며,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 교체와 함께 왕실 태실 조성방식의 변화 양상을 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고 한다.

 

[사적 세종대왕자 태실]

전체 19기 중 14기는 조성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나,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한 다섯 왕자의 태실의 경우는 석물이 파괴되어 남아 있지 않다가, 1977년 복원시 찾아 내어 보존하고 있다고 한다.  세조 태실의 경우에는 즉위한 이 후 특별히 귀부를 마련하여 가봉비(加封碑)를 태실비 앞에 세워 두었다.

 

[손인 단종의 비]

일반 왕자와 왕의  태봉은 한글로는 같지만 일반 왕자는 봉우리 봉자를 (胎峯) 임금이 되면 가공비 들레석을 설치하고 (胎封) 이라 구분한다고 한다.

19왕자 중 첫 아들인 문종은 제외되고, 원손인 단종의 태실이 자리한다. 이곳 세종대왕자 태실은 조선 세종 20년(1438)에서 24년(1442)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태봉은 당초 성주 이씨의  이장경의 묘가 있었는데, 왕실에서 이곳에 태실을 쓰면서 그의 묘를 옮기고 태를 안치하였다고 한다. 한편 1977년 태실에 대한 보수시 분청인화문대접·뚜껑, 평저호 및 지석(誌石) 등의 유물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선석사]

선석사(禪石寺)는 신라 시대인 의상이 창건한 화엄 십찰중의 하나로, 처음에는 신광사로 자리는 현재보다 서쪽에 있었는데, 고려 말 1361년(공민왕 10)에 승려 혜근이 신광사의 주지가 되어 절을 지금의 자리로 옮기는데, 터를 닦는 중 큰 바위가 나와 ‘닦을 선(禪)’ 자와 ‘돌 석(石)’ 자를 붙여 선석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세종 대왕자 태실이 있는 태봉에서 인근한 선석사는 왕자의 태실(胎室)을 수호하는 사찰로 지정되어, 영조가 어필을 하사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선석사 법당의 삼존불]

선석사에는 보물로 지정된 괘불탱을 가지고 있다.

 

[보물 제 1608호 선석사 영산회괘불탱]

1702년(숙종 28)탁휘(卓輝)·법해(法海)·설잠(雪岑)·성징(性澄) 등이 제작된 괘불탱이다.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화면의 상단에 아난과 가섭 제자가 있으며, 좌우협시는 본존불보다 한 발짝 앞서  공간감과 입체감을 드러내고 있다. 본존 석가여래의 수인은 오른손을 어깨로 들어 연꽃가지를 들고 있다. 그림에 “영산회도일부봉안(靈山會圖一部奉安)”이라고 기록되어, 선종의 염화시중과 조선시대에 성행한 선교합일(禪敎合一) 표현한 것으로, 염화시중의 내용을 표현한 불화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이라고 한다.

선석사입구에는 태실문화관이 있다.  생명존중 정신이 깃들어 있는 "태실의 고장" 성주를 소개하고 조선왕실의 출산의례, 태실의 조성, 태실의 구조등 태실과 관련된 내용을 전시하고 있다. 

 

[태실 박물관 전시물]

'장태'(藏胎)라는 의식행위의 정확한 기원은 알 수 없지만,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고려사 '지리지'에  "지금의 진주(鎭州·충북 진천)에서 김유신이 태어나자 그의 태를 높은 산에 묻었다. 지금 태령산(胎靈山)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라는 최초의 기록이 있다. 

 장태 습속은 태를 불에 태우거나[燒胎], 태를 땅에 묻거나[埋胎], 태를 물에 흘려보내거나[水胎], 태를 말려서 보관하는 것[乾胎] 등 크게 네 가지 방식으로 행해졌는데, 그중 우리나라에서는 독특하게 태실(胎室)을 조성하는 독창적인 문화가 왕실에서 행해진 것이다. 이곳에는 태를 받아서 모시는 모든 것이 전시되어 있다. 

 

여행을 마무리 하고 귀가하며 성주의 화연서원을 찾아본다. 향교는 공립, 서원은 사립이라고 하니 두 교육기관을 모두 찾아보는 것이 예가 아닐 런지 생각해본다.

서원 앞에 무흘구곡의 제1경 봉비암의 입간판이 자리한다. 이곳에서 부터 무흘계곡의 전경을 보는 출발지 인 것이다. 서원옆으로 언덕을 오르면 나타난다. 

 

[회연서원 현도루]

 한강 정구(鄭逑)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을 위하여 세운 서원있던 곳인데,  제자들이 정구가 세운 회연초당이 있던 자리에 선생의 뜻을 기리며 세워 회연서원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이곳도 전학후묘가 아닌 두공간이 나란히 위치한 동학 서묘의 구조이다. 숙종 16년(1690)에 임금으로부터 ‘회연(檜淵)’이라는 이름과 토지·노비를 하사 받는다. 선생의 문집판 『심경발휘』가 보관되어 있고 현판은 한석봉이 쓴 것이라한다. 대경재·명의재·양현청 등의 건물이 있었으나 양현청은 고종 5년(186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고, 해마다 2차례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회연서원 강당]

서원 철페령에도 남은 건물이다. 1974년 복원 작업을 거친 건물로 정면 5칸 중 3칸이 대청마루로 되어 있다. 강당 앞의  정료대는 도둑을 맞아 2005년 문중에서 다시 만든 것이라 한다.

앞에는 동재 (지경재)와 서재(명의재)가 있어 유생들이 숙식하던 공간인데 1976년 이들을 신축 하였다고 한다. 

 

 

강당의 현판 글씨는 좌로부터 미수체의 허목 선생의 글로 망운암(望雲庵), 중간은  경회당(景晦堂), 오른 쪽은 옥설헌(玉雪軒) 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회연서원이란 글의 현판은 한석봉의 글로 알려지나 확실하지는 않다고 전한다. 

 

[향현사]

정구 선생과 이윤우를  배향한 사당으로는  구사당과 새로이 짓는 신사당이 따로 있다.  향현사는 송사이, 이홍기, 이홍량, 이홍우, 이서 등이 봉양되어 있다.   한강 선생의 업적을 기록해 놓은 기념비인 신도비가 입구옆에 자리한다. 

무흘 구곡이 출발점인 봉비암에서 계곡을 거스르며 집으로 향한다. 각 곡 마다 많은 피서객들이 물놀이를 하여 차를 세울 곳도 없다. 몇몇 곳을 사진에 담아 보며, 옛 기억을 떠올리며 길을 재촉한다. 이번 성주의 여행은 성공한 자와 그러하지 못한 자의 삶을 되새겨 보게 한다. 무언가 누리고 사는데 필요한  조건은 무엇인지 생각하며 집으로 향한다.

 

如一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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