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백두번째 - 경주

세종해피뉴스 2023. 4. 13. 00:22

- 최부자 경주향교, 첨성대 대릉원

 경주 문화 마을을 찾는다. 이곳에는 많은 보물을 가지고 있는 경주 향교가 있어 찾아가는 중이다. 다리를 건너 마을에 도착하여 향교로 향하다가 길목에 자리한 경주 최부자집을 보고 기웃거려 본다. 대를 이어 만석꾼이며 독립운동에 힘쓴 그 들의 삶을 엿보려고 문을 들어선다. 건물 구성은 사랑채·안채·대문채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중 대문채에는 작은 방과 큰 곳간을 마련하였다. 사랑채는 안마당 맞은편에 있었으나 별당과 함께 1970년 11월 화재로 터만 남아있다고 한다. 원 명칭은 경주최식씨가옥(慶州崔植氏家屋)이었으며, 경주 최씨가문이 대대로 살아왔던 집이다. 문옆에 지금의 소유는 영남대임을 밝히고 있다. 영남대로 넘어간 사유가 어떠하든, 최씨 소유는 아니지만 살림은 계속 살고 있다고 한다. 이 가옥은 '교동 최부자 집'으로 널리 알려져 있어 ‘경주교동 최씨 고택’으로 명칭을 변경(2007.1.29) 하였다.

 

 

잘 가꾸어진 사랑채는 기품있고 정갈하다는 느낌을 준다. 불을 밝히는 관솔대( 노주석이라도 불리는 정료대)는 여느 서원이나 사찰의 것 못지 않은 모습으로 우뚝  마당에 자리한다. 이토록 큰게 자리함은 내왕하여 밤을 함게 하는 사람도 많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경주 최씨의 종가인 이 곳은 예전 신라시대의  '요석궁'이 있던 자리라고 전한다. 자손들이 9대째 대대로 살고 있으며 1700년경 이 가옥을 지었다고 하지만 확실한 시기는 알 수 없다고 한다.

[안채]

사랑채터 뒷쪽의 안채는 트인 'ㅁ'자형이나 실제로는 몸채가 'ㄷ'자형 평면을 가지고 있고, 'ㄱ'자형 사랑채와 '一'자형 중문채가 있다. 또한 안채의 뒷쪽에는 꽃밭과 사당이 있다. 조선시대 양반집의 원형을 대체로 잘 보존하고 있어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너른 공간의 큰집으로 생각했는데 비교적 소탈하다는 생각이 든다.

 

인근한 향교로 향한다.  찾아가는 곳은 서원이 아닌 향교이다. 서원과 향교는 무슨차이일까? 향교는 고려·조선시대 유교교육을 위해 지방에 설립한 관학 교육기관이고, 서원은 우리나라의 선현을 배향하고 유생들을 가르치던 조선의 대표적인 사학교육기관으로 구분한다.

 

[경주향교]

 이 자리는 원래는 신라 신문왕 2년 (682)에 처음 세워진 국학이 있던 곳이라한다. 이곳에 이후 경주 향교가 처음 지어진 시기는 잘 알 수 없으나, 조선 성종 23년(1492)에 서울의 성균관을 본 떠 고쳐지었다고 한다. 이후 임진왜란 때 불탄 뒤 선조 33년(1600)에 대성전과 전사청을 다시 지었다고 한다. 이어 선조 37년(1604)에 동무와 서무를 짓고, 광해군 6년(1614)에 명륜당과 동재·서재를 더 지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이 향교는 경상북도 큰 편에 속하며, 건물 배치는 나주향교<羅州鄕校>와 더불어 향교의 표본이다. 경주향교는 계림(桂林)의 서편에 자리하며 대설위(大設位)향교이다. 평지에 입지하고 있는 경주향교는 외삼문(外三門), 신삼문(神三門), 대성전, 명륜당이 남북 축선상에 자리잡아 남향하고 있으며, 문묘영역이 강학영역 앞쪽에 위치하는 전형적인 전묘후학(前廟後學)의 배치형식을 따르고 있다.  

 

향교 안으로 들어서면 우물이 마중을 하고 있다. 이 우물은 총명수라 불린다.

 

[경주 향교 우물]

지름이 80cm, 깊이 5.8m인 이 우물은 신라 우물 가운데 분황사 우물에 버금 가는 큰규모의 우물이라 한다. 삼국유사에 원효대사와 요석공주가 인연을 맺어, 설총을 낳은 요석궁이 바로 이곳이고, 요석궁의 우물인 이 물을  마시고 설총이 대학자가 되었다고 하여 '총명수'라고 부른다. 안내문에는 생원, 진사시에 급제한 경주 출신이 212명이 기록되어, 과거를 준비하는 학생들에게는 총명수였을 것이라 적어 전한다.

 

이제 옛 글을 배우던 향교 여행을 해본다. 향교는 훌륭한 유학자를 제사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나라에서 지은 국가교육기관이다. 처음 맞이한  건물인 명륜당의 마루에 걸터앉아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가족을 맞게 된다 . 두리번 거리며 주변을 살피며 그들이 자리를 비우길 바라 본다. 몇번이나 사진 찍는 자세를 하니 자리를 옯겨준다.

  

[보물 제 2097호 경주향교 명륜당]

 2020년에 강릉, 안성, 밀양, 상주, 담양, 창평,순천 향교 등과 함께 향교가 보물로 함게 지장된 시기에 보물로 지정된 경주향교 명륜당은 1614년 중건 이래 18세기와 19세기에 중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는 오래된 건축물로서, 정면 5칸, 측면 3칸의 2고주 5량가의 맞배집으로 우리나라 현존하는 향교 명륜당 가운데 객사형(성균관, 나주향교 명륜당)을 제외한 단일 건물로는 가장 규모가 큰 사례라고 한다.  중수기 등의 문헌 기록이 풍부하게 남아 있어 건축 연혁을 자세히 알 수 있고, 기단과 초석에 사용된 석재의 가공, 익공의 초각, 지붕가구의 구성에서 17세기 건축의 면모를 볼 수 있으며, 같은 시설 내 보물 경주향교 대성전과 함께 자리하고 있다. 

 

[명륜당 동재. 서재]

명륜당을 중심건물로 양쪽으로 늘어선 건물이 동재와 서재이다. 강당인 명륜당과 동재·서재는 학생들이 공부하고 기거하는 시설로, 학교 공간에는 강의실인 명륜당과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있다. 교생들은 명륜당에서 교관에게 강의를 듣고 토론하기도 하며, 명륜당을 교관의 거처로 쓰기도 하였다. 동재와 서재는 명륜당의 양쪽에 위치하며 학생들이 숙소로 사용하였으며 조선 후기에 양민의 입학이 늘면서 동재는 양반의 자제, 서재는 양민의 자제가 사용하여 교생들의 신분을 구별하기도 하였다한다.

 

명륜당 구역에서 나아가니 대성전과 역시 양옆으로 늘어선 건물이 강한 햇빛 아래 빛을 발한다. 시간여행이라는 느낌이 난다 . 예전에는 이곳을 이리 자유로이 왕래도 못했을 것 같은 엄숙함이 자리한다. 

 

[보물 1727호 경주향교 대성전]

 2011년 지정된 경주향교 건축물 중에서 대성전은 연혁이 분명하고, 공포와 창호 및 가구에 고식의 기법이 잘 남아 있고, 대성전 종도리에서 발견된 상량 묵서명을 통하여 대성전의 중건년대와 당시 참여한 장인등의 역사적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대성전은 연혁이 분명하고, 공포와 창호 및 가구에 고식의 기법이 잘 남아 있고, 대성전 종도리에서 발견된 상량 묵서명을 통하여 대성전의 중건년대와 당시 참여한 장인등의 역사적 사실을 확인할 수 있어 역사적, 학술적, 건축적으로 가치가 크다. 

[보물 제 2098호 경주향교 동무, 서무, 신삼문]

넓은 마당을 가지고 자리한 대성전 앞뜰에서 그당시 학생들도 공부하다 심신을 단련하기 위해 이곳에서 운동이라도 했는지? 대성전 뒤에 보이는 건물이 동재와 서재 이며 마당 양쪽의 건물이 동무와 서무이다.

2020년 명륜당과 같이 보물로 지정 된 경주향교 동․서무는 1604년 중건 이래 1829년, 1995년 보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며, 대성전과 함께 경주 향교의 제향공간을 구성하는 건축물로써, 정면 12칸으로 우리나라 현존하는 향교의 무 건축물 가운데 가장 길며, 큰 도리칸의 규모를 갖고 있다.

 

[보물 제 2098호 신삼문]

신삼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3량가 맞배집으로 평삼문의 형식과 문짝, 문얼굴, 홍살 등의 세부 형식에서 향교 제향 공간의 신문이다.

 

그 밖에 향교에 들어서는 정문인 외삼문(外三門), 문묘와 학교 공간 사이에 위치한 내삼문(內三門), 향교의 관리인이 거처하는 교직사(校直舍), 자료를 보관하는 경판고(經板庫), 제례 용품을 보관하는 제기고(祭器庫) 등이 있고, 향교 정면에는 홍살문(紅箭門)이 있다.

 

향교를 나서며 정면에 자리한 숲을  바라본다. 완연한 봄의 기운은 없지만, 가지끝이 노래지고 있어, 다음 여정 과 관계없이 발길을 옮겨 본다. 

 

 

조금만 걸음을 옮기면 계림에 들어선다. 원래 신라를 건국할 때부터 있던 숲으로, 시림(始林)이라고 하던 것을 알지가 태어난 뒤로 계림(雞林)이라 한다. 탈해왕 4년(60)에 시림에서 금궤짝안에 사내아이가 있어 태자로 삼는다. 아기라는 뜻의 '알지' 금궤에서 나와 성을 김씨라 하는 경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가 태어난 숲이다. 알지의 7대 후손이 왕위에 오르는데 바로 미추왕이다. 이후 내물왕부터 신라가 망할 때까지 김알지의 후손이 나라를 다스리게 되어, 계림은 신성한 곳으로 전해오고 있다. 이곳에는 조선 순조 3년(1803)에 세운 김알지 탄생에 대한 비(碑)가 남아있다.

숲에서 보는 커다란 나무 (왕버들인듯)들이 신비감을 주는 장소를 조금 지나면  첨성대가 자리한다. 국보 하나 더 볼 욕심으로 가까이 다가가 본다. 

 

[국보 제 31호 경주 첨성대]

신라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귀중한 문화재인 첨성대이다. 이 건물은 지진에 대비한 여러 장치들이  있다고 한다.  받침대 역할을 하는 기단부(基壇部)아래는 기초를 파서 다지고, 위에 술병 모양의 원통부(圓筒部)를 올리고, 창문같이 보이는 곳까지 막돌로 메꾸고, 그리고 맨 위에 정(井)자형의 정상부(頂上部)를 얹은 것들이 모두 지진에 대비한 것이라 한다. 높이는 약9m이다. 원통부는 부채꼴 모양의 돌로 27단을 쌓아 올렸으며, 외부에 비해 내부는 돌의 뒷뿌리가 삐죽삐죽 나와 벽면이 고르지 않다. . 동쪽 절반이 판돌로 막혀있는 정상부는 정(井)자 모양으로 맞물린 길다란 석재의 끝이 바깥까지 뚫고 나와있다. 이곳에 앉아 별을 관찰 한 것이다. 이런 모습은 19∼20단, 25∼26단에서도 발견되는데 내부에서 사다리를 걸치기에 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옛 기록에 의하면, “사람이 가운데로 해서 올라가게 되어있다”라고 하였는데, 바깥쪽에 사다리를 놓고 창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 후 사다리를 이용해 꼭대기까지 올라가 하늘을 관찰했던 것으로 보인다. 천문학은 하늘의 움직임에 따라 농사 시기를 결정하여 농업과 깊은 관계가 있고, 국가의 길흉을 점치던 점성술(占星術)은 정치와도 관련이 깊음을 알 수 있다. 

 

아침일찍 시작한 여정으로 아직 조금의 여유로운 시간이 있어, 이번에는 또 다른 여행의 즐거움과 또 다른 보물 탐색을 위해 잘 보존된 마을을 찾아보려 한다. 

 

如一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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