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아흔아홉번째 - 안동

세종해피뉴스 2023. 4. 4. 21:42

 안동의 안동문화단지로 향한다. 요즘 들어 한창 그림에 재미를 알아가시는 동행인의 한옥을 소재로 한 어반스케치 그림 소재를 위한 것이기도 하고, 개인적으로는 예전 외가집에 방문시 접하고 호기심과 두려움을 안겨 주었던 석빙고를 만나기 위해서 이다.  한옥을 모아 놓은 것을 보는  눈호강을 위해 안동댐의 건설로 수몰 될 뻔한 문화재를 모아 둔 안동문화 관광단지를 찾는다. 입구에 차를 대고 문화단지를 걸으며 댐을 포함 주변을 흘깃거려 본다.

 

[월령교]

이 다리입구를 지나 강변에 접한 산으로 조금 오르면 석빙고가 자리한다. 원래 자리하던 곳의 석빙고가 어렴풋이 기억된다. 강의 얼움을 채우기 위해선지 강변의 언덕에 있던 것으로 기억 된다. 그 곳의 뒤로는 높고 가파른 산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조금의 걸음 투자로 석빙고를 맞이한다.  석빙고 내부는  문을 닫아 잠그어 들어가 볼 수가 없다. 문이 있었나, 그땐 안에 들어간 것 같은데 예전 기억이 아스라함이 못내 아쉽다. 다만 내부를 볼 수 있도록 설치 된 반사경을 통해 안을 훑어본다. 저안에 들어가 처음 접하는 것에 대한 호기심과 두려움을 느끼던 생각과 그 곳에 데려다 준 외삼촌을 떠 올려 본다. 경험을 함께 한 분을 떠올리는 추억여행이 된다.

 

[보물 제 305호 석빙고 입구]

조금은 음습했었다는 기억은 입구를 비추는 낮의 햇살로 인해 지워진다.  석빙고는 얼음을 저장하기 위한 돌로 쌓은 창고이다. 이 석빙고는 얼음을 진상하기 보다는 낙동강에서 많이 잡히는 은어를 보관하여 임금에게 올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예전 석빙고가 자리하던 곳의 지명은 예안이다.  예안읍지(禮安邑誌)에 현감 이매신이 돌로 얼음 창고를 축조하여 매년 지붕을 잇는 수고를 덜었다는 기록이 있어, 이매신이 예안현감으로 재직 중 안동 석빙고(조선 영조 13년(1737)에 축조 된 것으로 알려진다. 형태는 동·서로 흐르는 낙동강 기슭의 넓은 땅에 강줄기를 향하여 남북으로 길게 누워 있으며, 입구는 특이하게 북쪽에 옆으로 내었다.

 

[석빙고 내부 모습]

안으로 들어가는 계단이 있고,  밑바닥은 경사지고, 경사진 바닥의 중앙에는 녹은 물이 강으로 빠지는 배수로가 있다. 4개의 무지개 처럼 틀어 올린 홍예를 세우고, 천장엔 길고 크게 다듬은 돌들을 각 홍예 사이에 가로로 채워 마무리하고, 천장에는 환기구멍을 두어 안의 기온을 조절하도록 설치하여 바깥과 연결된다.

바닥은 평평한 장방형의 구조에, 막음벽과 홍예(紅霓)를 지탱해 주는 양측벽은 수직으로 올려져 있다. 얼음방의 규모는 길이 12.5m, 너비 6.1m, 높이 5.4m라 한다. 

 

[석빙고이 윗면]

석빙고의 윗모습이 궁금하여 올라본다. 위부와의 열차단을 위해 봉토를 하여 선지 위에서 본 모양은 마치 큰 무덤 같다. 밖으로는 들어난 세군데의 환기구가 보인다. 예전의 느낌을 맛보기 힘들다. 이제 시간이 지나면 예전의 모습에 대한 기억은 아는 자의 기억 속에만 자리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지금은 보물로 보호 되고 있지만 소시적의 어둡고 음침하며, 소리 지르면 울리던 석빙고 안에서 어른인 척 담대해 보려던 기억으로 혼자 웃음 지어본다. 

 

석빙고에서 발길을 옮긴다.  글을 쓴 사람과 새긴 사람을 알 수 없는, 원래는 안동 월곡면의 '금하재'라는 정자 앞에 있었다는 월영대를 옮겨논 곳을 지나면  선성현 객사가 자리한다. 

 

[선성현객사]

이 건물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각 고을에 설치했던 관아 건물이라고 한다. 조선 숙종 38년(1712)에 예안현감 김성유가 다시 지은 것으로 전해온다. 안동댐 건설로 1976년 지금의 위치로 옮겨진다. 一자형 구조의 객사는 앞면 11칸·옆면 3칸 규모로,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이다. 벽돌이 깔려 있는 가운데 5칸은 중심공간인 정당으로, 온돌방·대청·툇마루로 이루어진 양옆 3칸씩의 익실보다 지붕이 한층 높게 되어 있다. 중심공간인 정당에서는 원래 궐패를 모셔놓고 초하루·보름에 대궐이 있는 쪽을 향하여 절을 하였고, 양 옆의 익실은 사신이나 귀한 손님을 맞이하는 숙소로 사용되었다. 도산면 서부리에 있던 건물이다.

 

[선성현 객사 옆면]

단지 내의 여러 민가 한옥을 둘러본다. 각기 삶의 흔적을 간직한 가옥들을 둘러보는 재미를 만끽한다. 돌아 나가는 길로 인해 나는 다소 흥분한다. 들어 오는 길에 공사로 인해  확트인 벌판에 자리한 법흥사지 칠층 전탑을 보아서 이다. 예전에는 담에 가려 가까이서 올려다만 보던 것을 그 전체적인 모습을 벌판에 세우고 볼 수 있는 뜻하지 않은 일에 오늘 횡재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길을 공사하여 주변을 정비히고 보니 그리도 크게 보이던 탑을 전체의 모습을 느긋하게 바라 볼수 있다는 것이 기쁨으로 흥분된다.

  

[ 국보  법흥사 칠층 전탑]

아직 공사중이지만 인근에 주차하고 먼저 들어가 주변을 돌며 관찰하는 행운을 즐긴다. 길 공사가 끝나면 옆에 자리한 고성 이씨 탑동 종택과 임청각과 함께 새로운 문화재 볼거리 장소로 거듭날 곳이다. 시원하게 헐린 길옆에 뭐가 있었지 기억을 되새긴다. 오늘은 어찌 기억과 현실 속을 부산스리 왕래한다.

 

[국보 제 16호  안동 법흥사지 칠층전탑]

이탑은 국보 제 16호 이며 흙으로 만든 벽돌을 이용하여 쌓아 올린 전탑(塼塔)이다.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법흥사에 속해 있던 탑으로 추정된다. 이곳 안동 지방엔 이상하리 만치 전탑이 많이 존재하는데, 이에 대한 답은 어디에도 없다. 탑은 1단의 기단 위로 7층의 탑신을 쌓아올린 모습이다. 기단의 각 면에는 화강암으로 조각된 8부 중상과 사천왕상을 세우고, 기단 남쪽 면에는 계단을 설치하여 1층 몸돌에 만들어진 감실(부처상을 모시는 방)을 향하며, 탑신은 진한 회색의 무늬없는 벽돌로 쌓아 올렸으며, 지붕돌은 위아래 모두 계단모양의 층단을 이루는 일반적인 전탑양식과는 달리, 윗면에 남아 있는 흔적으로 보아 기와를 얹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단의 윗면을 시멘트로 발라 놓아 아쉬움을 남기는 이 탑은  높이 17m, 기단너비 7.75m의 거대한 탑이며,  지붕에 기와를 얹었던 자취가 있는 것으로 보아 목탑을 모방하여 전탑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노출된 탑의 주변을 돌며 갑자기 얻은 행운에 혼자 만족하며 멀지 않은 곳의 이천동 마애불상 입상을 찾아 자리를 옮긴다. 도로변에서도  보이는 석상의 머리가 큰 바위에 얹혀져 있는 특이한 모습으로 눈길을 주는 석불이다.

 

[보물 제 115호 이천동 마애여래입상]

자연암벽에 신체는 선으로 새기고 머리는 따로 올려놓은 전체 높이 12.38m의 불상이다.  머리의 뒷부분은 거의 파손되었으나 앞부분은 온전하게 남아 있다. 머리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높이 솟아 있고, 얼굴에는 자비로운 미소가 흐르고 있다.  앞의 바위로 길에서는 알수 없는 불상을 보려면 사찰을 돌아 찾아보아야 한다.  입에는 주홍색이 남아 있어서 채색의 흔적이 있고.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몇 개 안되는 옷주름은 매우 도식적이며, 양 손은 검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어 왼손을 가슴에 대고, 오른손을 배에 대고 있는 모습이다.

이전에는 제비원 석불이라고도 불리었는데 석불 옆에는 제비원  연미사가 자리하여, 불상 주변에  관람과 참배가 편하게 입구및 바닥이 잘 정비되어 있다. 

 

커다란 법흥사지 칠층 전탑을 대하고 이내 운흥동의 전탑을 보러 향한다. 이곳은 안동역의 주차장 바로 옆에 자리한다. 전탑과 당간지주가 공존하는 지역은 아마도 사찰이 있던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안동 운흥동 당간지주]

이 당간지주가 속해 있던 절의 이름은 알 수 없으나 동쪽에 있는 동부동 5층 전탑과 같은 절의 유적으로 보인다. 한국전쟁 때 양지주의 윗부분이 파손된 이 당간지주는 양 기둥에 아무런 조각을 새기지 않아 간결하며, 기둥 사이에는 당간을 꽂는 둥근 받침돌이 놓여 있다. 기둥 안쪽면에는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홈을 파 놓았다. 윗부분의 일부가 파손되어 완전한 모습은 아니나 소박하고 간결한 모습이며,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짐작된다 

 

[보물 제 56호 안동 운흥동 5층 전탑]

통일 신라시대의 전탑으로 한국전쟁 때 일부 파괴 된 것을 1962년 복원한 것으로, 건립 이후 여러번의 수리로 원형이 일부 변경되고 외관의 손상이 많다. 이 곳 자리는 『동국여지승람』이나『영가지(永嘉誌)』에 기록으로 법림사의 옛터로 전한다. 탑의 높이가 8.35m, 탑신부는 길이 27.5cm 너비12.5cm, 두께 6cm의 무늬가 없는 벽돌을 사용하고, 각층마다 불상을 모시는 감실이 형식적으로 설치 되어 있고, 이는 지불동돌 윗면의 기와와 함게 목탑의 잔재인 듯 하다. 2층 남면에는 인왕상 2구를 조각한 화강암 판석이 있다. 탑의 꼭대기 머리 장식으로 복발만 남아 있다. 『영가지』에 법림사 전탑이 7층이라는 점, 조선시대에 크게 보수를 하였다는 점, 탑의 머리장식은 법흥사탑(法興寺塔)과 같이 금동제였으나 임진왜란 직후 명나라 군인들이 도둑질해 갔다는 사실 등이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지금의 모습과는 큰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고 한다.

 

여정을 마무리 하며 안동 여행길에 고속도로 들어가기전 습관적으로 들르는 마을이 있다. 오층전탑을 마을에 품고 잇는 조탑리 이다.

 

[ 아동 조탑리 오층석탑]

오랜간의 공사인것 같다. 이제는 공사 차단막의 변화도 기록에 남길 수 있을 것 같다. 아마도 공사는 2026년 까지 이어질 듯 하다.  통일신라시대의 전탑으로 화강암 석재와 벽돌을 혼용해서 만든 특이한 탑이다. 우리나라 전탑에는 거의 모두 화강암을 혼용하고 있으나 이 전탑에서는 그러한 의도가 더욱 적극적으로 나타나 있다고 한다. 탑에 대한 이야기는 추후 공사가 끝나고 그 모습을 보며 알아 보려 한다. 

탑의 모습도 그때 까지는 공개 안하기로 한다. 전탑이라 하나 복원하는 것이 쉽지 않나보다. 기사 한 귀절 인용해 본다. "2011년 보수를 결정해 부재를 해체했으나 조립 작업이 이뤄지지 않은 보물 '안동 조탑리 오층전탑'을 문화재청 산하 특수법인인 전통건축수리기술진흥재단이 수리한다. 전통건축수리기술진흥재단은 6일 안동시와 업무협약을 하고 2026년까지 안동 조탑리 오층전탑 부재 보존처리, 구조 보강, 조립, 주변 정비를 진행한다고 밝혔다." 

 

한옥을 위한 여행 속에  뜻밖의 계기로 인해 오늘 여행은 전탑 관람으로 변하였다. 문화재를 오랜간 유지 보전하고, 또한 관광자원화의 일원으로 개발하기 위해 주변 환경 개선 등 많은 노력을 지자체에서 한다고 생각된다. 문화재는 그 원형으로 보존하는 것은 물론이고 , 그 쓰임새에 어울리는 주변 환경을 가지게 되나 보다. 문화재 주변이 많이도 변하는 모습을 보며, 인간의 자기 위주에 의한 본능적 사고와 행동이  자연 현상과 상태를 많이도 바꾸고 있다고 생각하며 집으로 향한다.

 

如一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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