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백번째 - 청송, 경주

세종해피뉴스 2023. 4. 6. 21:43

여행을 잔잔히 기록해 보는 글쓰기도 어느덧 백번째에 이른다. 그 간의 여행의 족적을 글로 옮기며, 여행한 곳을 다시 한번 상기할 수 있고, 자료와 기록을 통해 문화재에 대해 좀더 알아가는 시간과 기회를 갖게 된 것이 뿌듯하기 까지 하다. 이번 여행은 100회를 위하는 것도 있지만, 문화재를 많이 가진 도시에 1박2일로  방문하여 보다 다양한 문화재를 둘러볼 계획으로 경주로 향한다.  국도를 따라 내려가며 여유로이 발길이 닿은 곳에  문화재가 있으면 들려 보기로 마음먹고 경상도를 가로 지른다. 여러 곳을 지나며 나만이 가진 눈행복이 많으나 다음으로 미루고, 청송을 지나는 길 옆에 나란히 자리한  3채의 누정이있어 둘러보며 글 올리기를 시작한다.  

 

[침류정(왼쪽) 오월헌(가운데) 동와정(오른쪽)]

 청송의 월성리를 지나는 길 건너 길안천의 갈대밭을 앞세우고 자리한 3채의 건물을 지나칠 수 없어 찾아본다. 차를 댈 만한 장소가 협소하나 내 건너의 과수원 앞에 정차하고 다리를 건너 누정으로 향한다.

 

[동와정]

다리를 건너며 처음 대하는 동쪽에 따로 자리한 누정 이름은 동와(東窩) 김흥서(金興瑞)가 세운 동와정이다. 가장 천변에 자리하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집이다. 강이나 계곡에 위치한 강계연변형(江溪沿邊形)으로 마루는 누마루의 형태로 난간이 설치되어 있다. 동와정은 조선 선조 때 통정대부장악원정(通政大夫掌樂院正)을 지낸 김흥서가 후학을 가르치며 말년을 보낸 정자로 그는 이곳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자연과 함께 하며 남은 생을 보냈다 한다.  

 

[동와정 측면]

 동와정은 견고하면서 소박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옆면의 느낌이 건물이 꽉차고 단단한 느낌이며  앞으로 이어진 툇마루로 인해  답답하지 않게 생활 할 것 같은 느낌이다.

 

[오월헌]

  오월헌은 서당으로 사용되던 건물로 1868년 2차 서원 철폐령 때 철거되고, 지금의 건물은 파천면 세덕사(世德祠)의 헌 자재를 이용하여 건축한 것으로 오월헌의 건립 경위는 명확하지 않고, 현서면 일대에 세거하던 의성김씨의 서당으로 활용되었다고만 전한다. 이에 의성김씨가 현서면 일대에 정착하는 16세기 중반 이후 오월헌이 건립된 것으로 보이며, 인근 월정리 침류정의 건립 시기를 고려하여, 김성진(金聲振)[1558~1634]이 건립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현재의 건물은 1869년(고종 6)에 새로 지어진 것으로 일설에 따르면 흥선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1868년 철폐된 세덕사(世德祠)의 구재(舊材)로 지었다고 한다. 오월헌은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기와집으로 평면 구성은 가운데 대청을 놓고, 그 좌우에 각각 온돌방 1칸을 배치한 중당협실형으로 전면에는 퇴칸마루를 설치하였다. 정자는 시멘트로 마감한 자연석 기단 위에 덤벙 초석을 놓고 정면만 원주를 세웠으며, 상부 가구는 5량가(五樑架)의 소로수장형으로 처마는 홑처마이다. 가운데 2칸은 마루이고 양쪽에는 앞뒤가 1칸반 되는 방이다.   오월헌은 정면 4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 건물이다. 좌우에 방이 있는데 오른쪽 방에는 강학재(講學齋), 왼쪽 방에는 돈의재(敦誼齋)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기문은 쌍호거사(雙湖居士) 권별(權)이 썼다.

 

[오월헌  측면]

  오주헌 마당에는 높이 10m, 흉고지름 80cm, 나이는 350년 이상의 노거수인경북 기념물 제 108호 향나무가 있다.

 

[침류정]

냇가를 내려다 볼 수 있는 둑방에 끝자락에 내어 지은 침류정은 조선 중기 학자인 김성진(1558∼1634)이 후배양성에 전념하기 위해 지은 17세기의 건물로 추정된다. 김성진은 학식이 높고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생들을 의병에 참가하게 하고 자신은 노모를 무사히 피난 시킨다. 이후 임진왜란이 끝나고 침류정을 지어 후학을 양성하고 문집 목판각을 만들어 책을 인쇄하여 널리 보급하였다.
침류정은 낮은 언덕위에 세워진 누각 형식의 정자이다. 앞면 3칸, 옆면2칸의 팔작지붕을 얹은 기와집이다.
 

[침류정 측면과 길안천]

 갈대가 드리워진 천변에 자리한 침류정은 축대를 쌓고 언덕을 북돋우어 정자를 물가가 잘 보이는 끝자락에 지어졌다. 바람에 넘실 대는 갈대와 함께 오후의 햇쌀을 느겨본다. 

 

[침류정 뒷면]

덧문이 달려 있어 뒤로 드나드는 듯 하고 누정 앞의 마루에서는 학동이 학문에 정진하는 글읽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여러동의 누정을 본 후 오후의 갈길을 재촉하여 동궁과 월지로 향한다. 

 

[동궁과 월지]

안압지라는 이름이 더 익숙 하던 이곳은 야경이 멋지기로 이름이 난 곳이다. 조선시대 폐허가 된 이후 이곳에 기러기와 오리 무리가 있는 연못이라 하여 ‘안압지’라 불렀다는데, 원래 이곳은 신라시대 왕자들이 기거하던 별궁이 있던 자리라고 한다. 하여 2011년 ‘동궁과 월지’라는 제 이름을 찾게된다.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문무왕 14년(674)에 연못인 ‘월지’가 조성되었고, 삼국통일이 완성된 이후인 679년에 ‘동궁’이 지어졌다고 전한다. 동궁내의 ‘임해전’은 연희, 회의, 접대 장소로 활용된 곳이다.
건물 터만 남고 못으로만 남아 존재하던  이곳이 발굴 작업으로 많은 유물과 배등을 건지고 , 쓰이던 건물 자재와 축대를 찾아 복원한 이곳은 밤의 조경에 비치는 건물이 연못에 드리워지는  모습이 장관이다. 이곳의 밤풍경이 소문이 무성해서인지 저녁이 다가오는 시간 주차장이 만석이다. 서서히 내리는 어둠속에 맑아지는 조명이 낮의 모습과는 다르게 황홀감을 주고 있다.

 

 

길을 따라 연못주위를 돌아본다. 많은 인파가 자리한 곳이 보이기 까지는 그래도 여유로움이 있는 공간이다.

 

 

건물이 마주보이는 명당이라는 자리는 이미 많은 사진맨들이 옹기종기 밀집해 자리를 하고있다. 그래도 옆에 다가간 한커트 찍어본다. 어둠이 짙어지면서 물에 비치는 음영도 빛을 발하고, 걸음을 옮기면  각도가 변하면서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동궁과 월지]

고생하여 맞춘 시간에 누릴수 있는 행복감을 맛보다 서서히 걸음을 옮겨 자리를 빠져 나온다. 이제는  내일의 일정을 생각해본다 . 무조건 불국사로 정한다. 경주 하면 불국사고 그곳에는 국보도 많이 있지 않은가. 꼭 나를 부르는 것은 아니지만 왠지 가야만 한다는 생각이다. 숙소를 찾아 잠을 청해본다.

 

如一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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