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백 다섯번째 - 영암

세종해피뉴스 2023. 4. 27. 18:58

- 도갑사

 

남도여행을 나선다. 나무들이 잎을 달아가는 계절에 남으로 향한다. 오늘의 남도 문화재 순례는 월출산에 자리한 영암의 도갑사이다. 먼길이라 생각되어 일찍 집을 나서 서둘러  국도를 통해 도갑사에 먼길돌아 주변을 기웃 거리며 영암에 도착한다.  주차장에서 절의 입구로 향하는 길에 팽나무 고사목을 접한다. 사찰의 입구부터 맞이한 멋짐과 놀라움, 그리고 안타까움이다. 넓게 자리 잡은 듯 한 사찰임을 입구에서 부터 바로 느낄 수 있다. 녹색의 잎을 피워내는 주변의 변화를 즐기며 사찰로 향한다. 

 

[팽나무 고사목]

도갑사와 도선 국사에 관한 이야기가 전한다. 도선의 어머니 취씨는 빨래를 하다가 물에 떠내려오는 참외를 먹고 도선을 잉태하여 낳게 되자 숲속에 버리게 된다. 아이는 비둘기에게 키워지다가  문수사의  주지에 맡겨져 성장한다.  아이는 도선으로 장성하여 중국을 다녀와 문수사 터에 절을 짓고 도갑사라 명한다는 내용이다. 도갑사는 월출산에 있는 절로, 신라말에 도선국사가 지었다고 하며 고려 후기에 크게 번성했다고 전한다.  그 뒤 수미·신미 두 스님이 조선 성종 4년(1473)에 다시 지었고, 한국전쟁 때 대부분의 건물이 불에 타 버린 것을 새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일주문]

잘 정비 된 일주문이 도갑사의 위용을 대변하는 듯 자리한다.  일주문을 통해 사찰로 올라서면 멀찍이서 봐도 오래 된 건물이라는 느낌이 있는 전각이 보인다.

 

[국보 제 50호 영암 도갑사 해탈문]

도갑사로 통하는 정문은  국보로 지정 된 건물 해탈문이다. 이 사찰에서 가장 오래 된 건물이며 모든 번뇌를 벗어 버린다는 뜻의 전각으로, 앞면 3칸·옆면 2칸 이며, 좌우 1칸에는 절 문을 지키는 금강역사상이 서 있고, 가운데 1칸은 통로로 사용된다. 영암 도갑사 해탈문은 우리 나라에서 흔하지 않은 산문(山門)건물이다. 도선국사의 창건 당시 만들어지고, 1960년 해탈문을 해체 복원할 때 발견된 기록에 의하면 해탈문이 1473년에 중건 된 것으로 되어 있다. 통로 좌우 금강역사와 함께 문수 동자와 보현 동자가 자리한다.

 

[해탈문 내부의 금강역사와 문수 보현 동자상]
[해탈문 내부의 금강역사와 문수 보현 동자상]

정유재란과 6.25, 1977년 등 3번의 화재로 전 당우가  소실되지만 해탈문은 불타지 않았다 한다.

 

[보물  제 1134  호 영암 도갑사 목조문수 보현보살상]

해탈문안에 자리한 사자와 코끼리를 타고 있는 두 동자상은 총 높이가 약 1.8m가량이고, 앉은 높이가 1.1m 안팎으로 크기도 비슷하고 조각기법도 동일하다. 사자, 코끼리 그리고 두 동자상은 따로 만들어 결합하고, 두 손도 따로 만들어 끼웠다.  사자와 코끼리를 타고 있는 지혜의 상징인 문수보살과 실천의 상징인 보현보살의 화신으로 추정되며, 사자와 코끼리를 탄 동자상이라는 독특한 목조상으로  해탈문이 건립될 때 함께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큰 규모의 사찰이라는 느낌을 갖기 충분한 광제루가 내부의 사찰의 크기를 가름하게 한다. 

 

[도갑사 대웅보전, 불타기 전의  모습: 광주광역시 시청각자료실]

도갑사는 880년 통일신라시대 도선 국사가 창건한 사찰로, 조선 초기인 1456년에는 전각과 요사채가 966칸의 큰 사찰이었으나, 정유재란과 병자호란, 한국전쟁에 대부분 소실됐고, 1977년에는 참배객으로 인한 화재로 대웅보전이 전소한다. 이후 새로이 전각을 지으면서 2층 대웅보전으로 지은 것이라 한다. 한국 전쟁에서도 대웅보전과 해탈문은 건재하였었는데 안타가움을 가진다.

 

[대웅보전]

사찰 안마당의 대웅보전은 규모가 큰 이층 전각인데 너른 마당으로 인하여 오히려 단정하다는 느낌이 든다. 기둥 주련이 아름다운 복층의 대웅보전은 큰 규모로 화사한 색감과 선명한 단청이 넓은 마당에 안정적으로 자리하고 있다. 중창 된 도갑사 대웅보전은 중층 양식을 취하고 있다. 팔작지붕에 정면 5칸, 측면 4칸, 250여㎡(74평) 규모다. 지난 1977년 참배객의 부주의로 인한 소실로 복원 된 대웅보전은 기존 자리보다 6~7m 가량 뒤에 자리했다고 한다. 팔작지붕에 정면 5칸, 측면 4칸, 250여㎡(74평) 규모로 복원된 복구된 대웅전은 외부에서는 2층이나 내부는 1층이며, 홍송으로 삼존불을 조성했다. 도는 이를 위해 목포대에 의뢰, 4차례 발굴 조사를 거쳐 본래 3칸 단층(單層) 구조였던 대웅보전을 5칸 중층(重層) 규모로 복원하였다 한다. 

 

[무형 문화재 석조]

여느 사지등의 석조도 보물이 많은데,  보물로 지정이 되지 않았지만 제작 연대도 있고 모양도 독특하여 보불로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석조 절 마당의 광제루 앞에는 물을 담아 두거나 곡물을 씻는데 쓰는 돌그릇인 석조가 있어 크기로 이전 도갑사의 번성기의 모습을 알려 주는 듯 하다.  길쭉하고 네모난 돌을 사용하여 내부를 파내고, 각 모서리는 둥글고 곡선으로 다듬어 마치 그 모양이 작은 통나무배 같아 보인다. 안쪽 바닥에는 작은 배수 구멍이 뚫려 있고,  표면에는 조선 숙종 8년(1682) 이라는 기록이 제작연대를 나타 내는 것 같다.

  

입구를 들어설 때 부터 눈에 들어온 탑이 있다. 화려한 대웅보전을 배경으로 너른 앞마당 으로 인해 대웅보전과는 다소 멀찍이 떨어져 있는 이 탑은 보물로 지정된  5층 석탑이다.

 

[보물 제 1433호  5층 석탑]

이 5층석탑은 하층기단을 잃어 버리고 있다가 목포대학교 박물관의 도갑사 경내 발굴조사 중 하층기단부가 발견되어, 2002년 2중기단의 5층석탑으로 복원되고 2005년에 보물로 지정된다. 높이 5.45m,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각 부재도 잘 남아있으며 체감율과 안정된 조형미가 돋보이는 석탑이다. 1층탑신은 길고 이후는 낮게 조성되어 있고 기둥을 넣어 목탑형식을 나타내고 있다. 이곳 대웅보전 뒤편에는 3층석탑 하나 더 존재하는데 이 탑도 유형 문화재라고 한다. 대웅 보전 안에는 큰 규모의 전각에 어울리는 삼존불과 후불 벽화 장식이 자리한다.

 

[대웅보전의 삼존불]

석가모나불이 주불이며 협시불은 약사여래불과 아미타불이 모셔져 있다. 봉안되는 삼존불은 높이가 4m정도 이며, 후불 탱화는 홍송(紅松)으로 만들어져 큰 전각에 어울리게 자리한다.

대웅보전을 나서면  사찰 오른 쪽 옆으로 경내에는 수비왕사 비각이 자리한다.

[전남 유형문화재 수미왕사 비각]

영암 출신으로 도갑사의 중창 발전에 애쓰신 수미왕사의 활동과 내력을 기록하고 있다. 수미는 조선시대 승려로 13세에 출가하였고, 세조 임금이 그 스승(왕사)으로 모셨던 인물이다. 비는 용의 머리와 흡사한 거북모양의 받침 위에 비 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린 일반적인 모습이다. 목이 짧고 앞뒤의 발톱이 다섯개씩이며, 거북 등에는  육각형이 매우 두껍게 조각되어 있으며 등껍질을 갑옷처럼 두르고 있다. 머릿돌에는 섬세한 조각의 구름 위로 두마리의 용트림 하고 있다. 선조 14년(1581)에 비가 넘어져 세우고, 인조 7년(1629)에 시작하여 인조 11년(1633)에 완성하였다. 전체적으로 조각이 섬세하고 17세기 초에 세운 석비로서는 특이하게도 고려시대  양식과 수법을 따르고 있다고 한다.

 

경내의 들러봄을 마치고 명부전 옆길로 난 산길로 접어든다. 산으로 오르는 초입에 자리한 용수 폭포와 정자를 지나 등산로가 아닌 왼쪽으로 오르는 계단을 타고 오르면 석불상과 비석을 맞이하게 된다.

 

[보물 제 89 호  영암 도갑사 석조여래좌상]

계단의 용화문을 지나면 석조여래 좌상이 자리한 전각이 보인다. 도갑사 미륵전에 모셔진 보물로 지정된 석조여래 좌상이다. 불상의 몸체와 광배가 하나의 돌에 조각되어 있어,  광배 뒷편의 돌이 자연석의 모양으로 남았다면 이는 큰바위에 불상을 새긴 마애불과 같다는 느낌이다. 미륵전에 미륵불이 아닌 석조여래좌상이 자리한 이유는 모셨던 전각이 불타 없어지고 석불만 남아 현재의 자리에 전각을 짓고 미륵전이라 이름 한 것이다. 머리칼은 작은 소라에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를 하고, 얼굴은 타원형이며 전체적으로 강건하게 표현 되고 크기도 적지 않아 전각이 좁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갸름한 타원형의 광배에는 가운데 연꽃무늬가 있고, 꼭지와 머리 양 옆에 각각 작은 부처가 자리한다. 대좌(臺座)는  4각형의 형태로 석불의 크기에 비하여 작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미륵전을 벗어나 조금 걸음을 옮기면 부도전 옆에 도선국사비각 이라는 전각이 서있으며 안에는 효종4년 1653년에 건립된 그 비의 건립에만 18년이 걸린 보물 제 1395호 거대한 석비가 자리한다.

 

[도갑사 도선 수미비]

도갑사 도선·수미비는 귀부(龜趺), 비신(碑身), 이수(이首)를 구비한 석비로 도갑사의 부도전(浮屠田) 부근에 건립된 보호각 안에 보존되어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승려인 도선국사와 조선시대 수미왕사의 행적을 기록한 석비이다.

 

[ 보물 제 1395 호 도갑사 도선국사 수비선사비]

2004년 보물로 지정된 도갑사 도선·수미비는 귀부(龜趺), 비신(碑身), 이수(이首)를 구비한 석비로  통일신라시대의 승려인 도선국사와 조선시대 수미왕사의 행적을 기록한 높이 517㎝ 규모의 석비이다. 석비가 자리한 탑구(塔區)는 수매의 판석으로  전체적으로는 6각형의 형태를 보이고 있다. 귀부의 머리는 오른쪽으로 약간 튼 형태인데 입에는 상·하 8개의 이빨로 여의주를 꽉 물고 있는 형상이다.  등에는 평행 사선문을 음각하고, 앞발은 5조, 뒷발은 3조의 발가락이 있으며 꼬리는 왼발의 허벅다리에 닿았다. 비신은 대리석으로 상면에는 전서로 「월출산도갑사도선국사수미대선사비명」이라 썼으며, 비제(碑題)는 횡서로 「월출산도갑사도선국사수미대선사비명병서」라 음각되고,  양 측면에는 구름과 용이 양각되어 있다. 이수 역시 1석으로 조성되었는데, 하단에는 28판의 앙련(仰蓮)이 조각되고, 윗면은 구름 위에 2마리의 용이 이수의 양끝을 물고 있는 형상을 지니고 있다. 비문의 내용을 볼 때 석비를 다시 세우기로 계획하고 3년의 모금활동과 건립기간 18년을 포함한 21년간에 걸친 건립과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 

 

[무형문화재 도갑사 도선 국사 진영]

국사전에는 도선국사, 수미왕사의 진영이 자라한다. 여는 사찰의 조사당인데 도갑사는 국사전이라 칭한다.

가운데가 도선국사이다. 초상화는 불교의 의식 때에 왕사나 대사 등이 손에 드는 장자를 들고, 의자에 걸터앉아 약간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그린 전신상으로, 화폭의 윗부분에 ‘도선국사진영’이라는 제목을 써 놓았다. 기록에는 도선의 초상화는 도갑사를 중창한 수미왕사의 제안으로 처음 그려 지고,  이 초상화는 이후 다시 옮겨 그린 것이라 한다.

왼쪽은 수미왕사의 초상화다. 수미는 세조의 왕사(王師)이며 15세기 중엽에 도갑사를 크게 중창한 승려로서, 당시 선종판사가 되어 황폐한 불교를 부흥시켰다. 초상화에는 약간 왼쪽을 향한 자세에 불교용구인 불수를 들고, 가부좌로 의자에 앉은 모습으로, 화폭의 오른쪽 윗부분에 ‘수미왕사진영’이라는 그림 제목이 써 있다. 

 

[도갑사 명부전]

이날 도갑사 입구에 들어서며 왼쪽에 자리한 성보박물관은 문이 닿혀 있어, 내부에 보존되어 있는 도선 국사관련 유물에 관한 정보는 얻지를 못한다. 하얗게 절마당에 깔린 잔돌이, 사찰을 드러나 보이게 하고 넓게 보이게 한다. 오랜 전통적인 사찰의 모습은 아니지만 그래도 문을 들어서면서 맞이하는 국보와 보물, 그리고 이곳 저곳 발길을 옮겨야 볼 수 있는 석불과 석비들이 너른 앞마당과 새로 지은 높은 전각과 조화되어 불거리와 현대와 과거를 함께 아우르는 사찰이라고 생각이 된다.

아쉬운 것은 시간이 많지 않아 사찰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곳 월출산의 다른 한자락에 자리한 강진의 무위사로 가기 위해서이다. 월출산 자락을 훑으며 강진으로 향한다.

 

如一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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