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백한번째 - 경주

세종해피뉴스 2023. 4. 10. 19:53

- 불국사

이른 아침에 잠에서 깨어~~ 맑은 정신으로 새벽 기도는 못 올리더라도 아침공기를 마시며 사찰을 찾아 나선다. 몇번의 방문에도 놀랍기만 한 사찰 이고 이 곳을 오지 않으면 경주를 다녀간 것이 아니라는 느낌이 드는 곳이다. 아침에 불국사를 찾는다. 처음 당도하여  주차장에 차를 대고 매표소가 열리기를 기다린다. 새벽은 아니지만 개문 전에 당도 한 것이라  입장시는 몇 팀이 되지 않는다. 사천왕이 지켜보는 정문의 사천왕문을 통과하지 않고 후문을 통과하여  고요한 사찰을 서서이 올라본다.

 

 

이내 불국사의 경내로 들어선다. 관람객의 발길이 아직 닫지 않은 아침의 모습을 촬영하며, 적막하다는 느낌이 드는 이곳 저곳을 살펴본다. 밝아오는 아침 햇살의 조명도 나를 도와 멋진 볼거리를 제공한다. 동궁과 월지의 밤풍경에 불국사를 전세내어 혼자 보는 듯한 분위기에  흥분된 것 같다. 

 

[불국사]

 불국사의 전경을 담는데 뒷 짐을 진채로 걸음을 옮기는 관람객의 모습이 있어 그모습을 담아본다. 이른 시간 거니는 저 분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  그나마 썰렁한 사진 속에  들어와 생동감을 주는  불국사 경내를 거니는 모습이 마음에 들어 오려내 옮겨본다.

건물을 뒤로하고 찾아 본 당간지주 이다.

 

[불국사 당간 지주]

그동안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많은 당간지주를 접하였는데, 불국사의 당간 지주는 무형문화재이다. 불국사의 당간 지주는 오랜 역사 속의 화마에도 석조유물로 잘 보존되어 온 것이어서 보물일 것으로 짐작했으나 의외였다. 나란히 2쌍의 당간지주가 서 있는데, 높이는 동쪽 당간지주가 3.6m, 서쪽 당간지주가 3.45m이다. 각 기둥의 안쪽 면에는 쐐기목을 박아 당간을 고정시켰던 홈과 구멍이 뚫려 있으며, 서쪽 당간지주 사이에는 당간을 받쳤던 둥근 받침대가 남아 있다. 동쪽 당간지주는 통일신라 때 세워진 것이지만, 서쪽 당간지주는 기둥 크기와 제작 수법에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아 각기 다른 부재를 후대에 조합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설명이다. 

 

불국사는 대체로 회랑으로 구분 되고 높낮아로 구분되는데 대웅전, 극락전, 비로전, 관음전의 전각을 주심으로 구획지어진다. 아울러 각각 현생, 미래, 사후 세계등을 관장 하는 부처님을 모신 사찰명 그대로 모든 세계를 관장 하는 사찰이다.

 

이제 불국사에 자리한 보물, 국보를 찬찬히 둘러본다. 청운교, 백운교는 국보이다. 달리 왜 국보인지 설명이 없어도 될듯 하다. 우리는 국보 이기 때문에 이 다리를 밟아볼 수가 없다.

 

[국보 23호 청운교와 백운교]

청운교와 백운교는 대웅전을 향하는 자하문과 연결된 다리를 말하는데, 다리 아래의 일반인의 세계와 다리 위로의 부처의 세계를 이어주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전체 34계단으로 되어 있고 위로는 16단의 청운교가, 아래로는 18단의 백운교가 있다. 우리는 지금 이국보를 밟고 오를 수 가없다. 좌경로 옆길을 통해서 대웅전 으로 들어선다. 청운교(靑雲橋)를 푸른 청년의 모습으로, 백운교(白雲橋)를 흰머리 노인의 모습으로 빗대어 놓아 인생을 상징하기도 한다. 계단을 다리형식으로 만든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으며, 오르는 경사면을 45°각도로 구성하여 정교하게 다듬었다. 다리 아래는 무지개 모양으로 되어있어  직선으로 딱딱해졌던 벽면을 부드럽고 생동감있게 풀어준다. 다리가 있는 석축 아래쪽으로 연못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지금도 계단 왼쪽에 물이 떨어지도록 만들어 놓은 장치가 남아 있다.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진다. 

 

[국보 22호 연화교와 칠보교] [보물 제 1745호 경주 불국사 가구식 석축]

서쪽의 연화교와 칠보교이다. 연화교와 칠보교는 극락전으로 향하는 안양문과 연결된 다리로, 세속 사람들이 밟는 다리가 아니라, 서방 극락세계의 깨달은 사람만이 오르내리던 다리라고 전해지고 있다. 전체 18계단으로, 밑에는 10단의 연화교가 있고 위에는 8단의 칠보교가 놓여있다. 청운교·백운교보다 규모가 작을 뿐 구조나 구성형식 등이 매우 비슷한데, 계단을 다리형식으로 만든 특이한 구성이나 경사면을 45°각도로 구성한 점, 다리 아래가 무지개 모양이 유사하다. 층계마다 연꽃잎을 도드라지게 새겼는데 오랜 세월동안 사람들의 발자국 탓인지 닳아서 조각이 희미해져 있어 통행을 금지하고 있다. 청운교, 백운교와 동시기인 헌강왕때  조성 된것으로 보이며, 비구니가 된 신라 헌강왕비도 이곳을 오가며 왕의 극락왕생을 빌었다고 전해진다. 

 

보물로 지정된 석축은 안양문과 자하문 앞 꾸며진 가구식 석축으로 동서로 자리하는데, 동쪽 자하문 앞의 것은 백운교의 계단 위에서 단을 달리하여 상단의 석축을 변화 있게 꾸며 조화를 이루었다. 안양문 앞에서는 밑에서부터 수직으로 석축을 쌓되 중간 중간 칸을 이루어 다듬은 석주(石柱)와 인방석을 가구식으로 걸고, 그 가운데를 자연석으로 채운 행태이다. 자하문이나 범영루 앞의 하층 석축은 밑에서부터 거대한 자연석을 쌓고 그 위에 가공석재를 가구식으로 짜 올린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으며, 범영루의 돌출부 기둥 밑에는 점차형의 석재를 차곡차곡 쌓아 돌기둥을 만들었고 또 석교 밑에서는 정교한 홍예를 이루고 있다.

 

 

역사적 기록으로도 지진 발생 지역인 경주 지방의 지진에 대비한 구조물이 있어 찾아본다. 홍예 구조의 반원의 돌반원 위에 역방향으로 쇄기를 박은 돌문틀이 보인다. 아래의 구조물은 그간 다리의 아치형 구조물에서 많이 보아 왔는데 위쪽의 모양 같이 잘다듬어진 부채꼴의 돌기둥을 쇄기돌을 위로 박아 물리게 한 것은,  조상들의 역발상이며 또한 이를 알아차린 것이 당시 국민학생이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숨어 있는 장면을 알고 보니 신기롭다는 생각이 든다.

 

[불국사 전경]

자하문 앞에는 아름답게 축조된 가구식 석축과 조화를 이룬 청운·백운교가 놓였고, 그 앞에는 평지를 이루며 서쪽으로 약간 치우친 곳에 구품연지가 있었으나 지금은 매몰되어 있다. 가람서쪽에 있는 극락전 중심의 구역은 대웅전 구역보다 한 단 낮추어 배치되었는데, 여기에는 정면에 안양문을 세우고, 그 앞에는 연화·칠보교의 계단을 축조하였다. 극락전 주위에는 안양문과 연결하여 회랑이 둘러졌는데 동쪽에는 대웅전 회랑과 연결되어 별도의 회랑을 두지 않았다. 건물앞에 연못이 있었으면 머리속으로그려본다.  다리의 반영도 비쳐지고 생각만으로도 그 모습이 탐난다. 

[보물 제 1744 호 불국사 대웅전]

대웅전 전면에는 팔각의 통일신라 석등이 서있다.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5칸의 동서가 약간 긴 장방형의 평면으로 단층 팔작 기와지붕이며, 조선 후기의 다포계 양식이다. 대웅전의 외관은 중앙의 어칸을 협칸(8.7尺)이나 퇴칸(8.2尺)보다 배이상 넓은 주칸(17.7尺)으로 꾸며졌다. 공포는 다포로 어칸에 3구의 공간포가 배치되었고, 협칸과 퇴칸에는 1구의 공간포가 배치되어 있다. 살미첨차에는 초화문양(草花文樣)과 봉황(鳳凰) 머리를 조각하였고, 평방에서 돌출된 용머리 조각 등은 매우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대웅전 정면의 어칸은 사분합꽃살문이고, 협칸과 퇴칸은 쌍분합교살문이며, 양측면의 문은 삼분합띠살문으로 꾸며졌으며, 후면의 어칸은 사분합정자살문이며, 협칸은 벽체로 막았고 퇴칸은 분합정자살문으로 20칸중 10칸은 문을 설치하여 개방 했다. 기단은 면석에 우주(隅柱)와 탱주(撐柱)가 설치되어 있고, 상부에 갑석(甲石)을 덮은 통일신라시대의 가구식 기단(架構基壇)이다. 기단의 사면 중앙부에는 계단이 놓여 있고, 계단 양측의 소맷돌은 측면을 삼각형 문양으로 가공하였다. [나만의 문화유산 해설사]
불국사 대웅전은 창건 당시 기단과 석등 등의 석조물이 보존되어 있으며, 창건 당시의 유구 위에 영조 41년(1765)에 중창된 건물로 중창기록과 단청에 대한 기록이 함께한 건축물이다. 

 

[국보 제 20호 다보탑과 국보 제  21호 석가탑]

번호가 앞서는 것은 지정이 오래전이라는 이야기이다.

대웅전 앞에 자리한 두탑을 번갈아 바라본다. 다채롭고 그모양으로 몇층탑이니 짐작이 가지 않은 다보탑과 햇빛을 받아 하얀 몸체를 드러낸 석가탑은 대조에서 오는 다름에 대한 감정과 그래도 나타내어 보여 주는 것은같을 것이라는 동질감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다보탑과 석가탑(경주 불국사 삼층석탑, 국보)은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석탑으로, 높이도 10.29m, 10.75m로 비슷하다. 

 석가탑은 우리나라 일반형 석탑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두 탑을 같은 위치에 세운 이유는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多寶佛)이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할 때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법화경』의 내용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게 탑으로 구현하고자 하기 위함이다. 석가탑을 보면 2단의 기단(基壇)위에 세운 3층탑이다. 

 

국보 제 20호 다보탑은 십(十)자 모양 평면의 기단에는 사방에 돌계단을 마련하고, 8각형의 탑신과 그 주위로는 네모난 난간을 돌렸다. 탑이 건립된 시기는 불국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으로 추측된다. 목조건축의 복잡한 구조를 참신한 발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4각, 8각, 원을 한 탑에서 짜임새있게 구성한 점, 각 부분의 길이·너비·두께를 일정하게 통일시킨 점 등은 8세기 통일신라 미술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몇층탑인지 분명하지 않다. 안타깝게도 1925년경에 일본인들이 탑을 완전히 해체, 보수하였는데, 이에 관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또한 탑 속에 두었을 사리와 사리장치, 그 밖의 유물들이 이 과정에서 모두 사라져버려 그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기단의 돌계단 위에 놓여있던 네 마리의 돌사자 가운데 3마리가 일제에 의해 약탈되어, 이를 되찾기 위한 노력이 오래전부터 있었으나 아직까지 그 행방을 알 수가 없으며, 현재 1마리의 돌사자가 남아있다.

 

국보 제 21호는  탑의 원래 이름은 ‘석가여래상주설법탑(釋迦如來常住設法塔)’으로, ‘석가탑’이라고 줄여서 부른다. 1966년 9월에는 안타깝게도 도굴꾼들에 의해 탑이 손상되는 일이 있었으며, 그해 12월 탑을 수리하면서 2층 탑신의 몸돌 앞면에서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던 사각형의 공간을 발견하게 되었다. 여기서 여러가지 사리용기들과 유물을 찾아냈는데, 그 중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국보)이다.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로 닥나무 종이로 만들어졌다. 탑의 머리장식(상륜부)은 16세기 이전에 유실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1973년 남원 실상사 동ㆍ서 삼층석탑(보물)의 머리장식을 본따서 복원하였다. 

이 탑은 ‘무영탑(無影塔:그림자가 비치지 않는 탑)’이라고도 불리우는데, 여기에는 석가탑을 지은 백제의 석공(石工) 아사달을 찾아 신라의 서울 서라벌에 온 아사녀가 남편을 만나보지도 못한 채 연못에 몸을 던져야 했던 슬픈 전설이 서려 있다.

 

[대웅전 불상] [보물 제 1797호 불국사 영산회상도 ]

천정은 우물 천정인데 층단식으로 중앙이 높게 꾸며졌다. 협시보살은 미륵보살과 갈라보살이며 그밖으로 가섭과 아난 두 제자상이 모셔져 있다. 이 대웅전의 보물은 삼존불 뒤에 자리한 영산 회상도와 사천왕 벽화이다. 경주 불국사 영산회상도 및 사천왕 벽화(慶州 佛國寺 靈山會上圖 및 四天王壁畵)’는 1769년에 영조의 딸인 화완옹주와 상궁 김씨 등이 시주하여 제작한 불화로, 영산회상도와 2점의 사천왕 벽화로 이루어진 독특한 구성을 보여준다. 조성연대는 영산회상도에만 1769년이라는 연대가 있고 사천왕 벽화에는 조성연대 없이 화원의 이름만 적혀 있는데, 영산회상도 제작에 참여한 화승들이 사천왕벽화를 그리는 데도 참여하였고 두 불화에서 인물표현과 채색 등에 유사점이 많은 것을 볼 때 영산회상도와 사천왕벽화는 같은 해에 함께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불화는 18세기 중후반 통도사와 봉정사 등 경상도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화승들이 함께 제작한 것으로 경상도 지역의 화풍을 잘 보여준다.

 

발길은 국보를 찾아 무설전을 지나 관음전을 거쳐 비로전으로 향한다. 비로전에 자리한 국보를 대한다.

 

[국보 제 26호 경주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 좌상]

비로전에 모셔진 국보 제26호 경주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은 높이 1.77m로  진리의 세계를 두루 통솔한다는 의미를 지닌 비로자나불을 형상화한 것이다. 머리의 머리칼은 작은 소라 모양이며, 얼굴은 위엄과 자비를 동시에 뿜어낸다.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은 옷은 매우 얇게 표현되어 있다.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는 옷주름의 표현은 매우 사실적이다. 손모양은 오른손 검지를 왼손으로 감싸고 있는데 일반적인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일반적인 오른손을 왼손이 감싸는 손모양과는 반대로 표현되었다.

비로전 옆에 자리한 보물에 눈길이 간다. 돌에다 저토록 섬세한 표현을 할 수 있으며, 저러한 모습을 디자인한 것이 경이롭기까지 하다.

 

[보물 제 61호 경주 불국사 사리탑]

불국사 강당 뒤쪽의 보호각에 보존되어 있는 사리탑으로,  현재로서는 여래의 사리탑인지 승려의 사리탑인지는 분명하지 않다고 한다. 겉모습이 석등과 비슷하게 생긴 사리탑으로, 사리를 모시는 탑신(塔身)을 중심으로 아래는 받침이 되는 기단(基壇)을 두고, 위로는 머리장식을 두었다. 기단은 연꽃잎을 새긴 반원모양의 돌을 위 · 아래에 두고, 그 사이를 북(鼓)모양의 기둥으로 연결하고 있는데 기둥에 새겨진 구름무늬에서 강한 생동감이 묻어난다. 탑신(塔身)은 가운데가 불룩한 원통형으로, 네 곳마다 꽃으로 장식된 기둥모양을 새겨두었다. 기둥에 의해 나뉘어진 4면에는 감실(龕室:불상을 모시는 방)을 안쪽으로 움푹 파놓은 후, 그 안에 여래상(如來像)과 보살상(菩薩像)을 돌을새김하여 모셔놓았다. 지붕돌은 추녀끝에서 12각을 이루다가 정상으로 올라가면서 6각으로 줄어든다. 경사면은 완만하며,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일부만 남아있다. 평면이 8각인 기본형에서 벗어나 새로운 형태를 보여주는 것으로, 화려한 조형과 섬세한 조각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의 양식을 계승한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1905년 일본인에 의해 동경의 우에노(上野)공원으로 불법 반출되었다가 1933년에 반환된 것으로, 일제시대 당시 모진 수난을 당한 우리 문화재의 아픈 역사를 잘 말해주고 있다.

 

[극락전의 복돼지]

극락전 현판뒤에 숨어서 2007년 발견시 까지 오랜 세월을 숨어 지낸, 이빨이 삐져나온 멧돼지상이 있다. 이곳에 어떻게 들어와 자리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요즘은 이 돼지를 복돼지라 칭하면서 마당에 복돼지 전신상을 만들어 만지면서 복을 비는 사람들에게 복을 나눠주고 있다. 흔하지 않은 멧돼지 형상을 설치한 제작자의 의도는 무엇일까? 

 

[국보제 27호 . 불국사 금동 아미타여래좌상]

극락전의 주불인 앉은 자세의 높이가 1.8m 로 머리모양은 작은 소라 모양이며, 정수리 부근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큼직하게 솟아 있다. 원만하고 자비스러운 얼굴은 정면을 향하고 있으며, 눈썹은 반원형이고 콧날은 오똑하다. 신체 표현은 장중하여 건장한 남성의 체구를 연상시키며, 두 무릎은 넓게 퍼져서 매우 안정된 느낌을 준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은 옷에는 거침없는 주름이 새겨져 있는데, 특히 옷깃 안쪽에서 밖으로 늘어지는 옷 접힘이 사실적으로 표현 되어 있다. 어깨 높이로 들어 약간 오므린 왼손은 손바닥을 보이고 있으며, 오른손은 무릎에 올려 놓고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약간 구부리고 있다. 떡 벌어진 어깨, 양감있는 당당한 가슴, 잘록한 허리 등에서 사실적이면서 세련된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모습을 엿볼 수 있으며, 국보로 지정된 경주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 경주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과과 함께 통일신라 3대 금동불상으로 불린다.

 

[보물 제 1523호 불구사 석조]

 촬영한 모습이 맘에 들지 않아 사진을 문화유산 포탈서 가져온다. 보물로 지정된 경주 불국사 석조는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수조의 형상이 원형인 백제시대의 석조와 달리 통일신라시대 이후의 형상인 직사각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내·외면에 조각이 있는 점과 다른 직사각형의 석조와는 달리 모서리를 둥글게 한 것이 특이하다. 특히 내부 바닥면에도  화려한 연화문을 조각한 통일신라시대 불교미술의 뛰어난 조형의식과 높은 예술수준이 보인다.

 

수많은 국보와 보물을 접한다. 일찌기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유물을 한 곳에서 접하다 보니, 아침 일찍 발걸음으로 조용히 감상하기로  맘 먹은 것을 잘한 일이라 생각한다. 불국사를 돌아나올 쯤 관람객의 발길을 느낄 수 있다. 다음 여정은 잘 알려지지 않은, 일반인의 관심이 덜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지켜야 할 보물을 많이볼 수 있는 곳 경주 향교이다.

 

如一유광하 기자

[관련기사] 如一同行 백한번째 - 경주 > 뉴스 | 세종해피뉴스 (xn--vg1b03zi5a71m9wruj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