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여든 다섯번째 - 고성

세종해피뉴스 2022. 8. 28. 01:28

멀리 와본다. 그리고 오랜 세월 걸려 오게 된다. 돌이켜 보니 20년 만의 방문이다. 오래전의 건봉사에 대해 떠올려 보려 노력 한다. 옛 모습을 지우지 못하고 찾아보니 입구 부터 생소하다. 너른 주차장에 차를 대고 서서이 먼 발치의 사찰을 바라본다. 당시는 대웅전 건물과 몇채의 요사채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어 가장 북쪽의 사찰로 썰렁한 느낌 이었고, 언덕에서 건너다 보이던 사찰은 여느 사찰이라기 보다는 사지와 비슷한 느낌에 그 나마 건물터에 몇채의 건물이 있었던 모습으로 기억되고 다만 붉은 글기가 새겨진 우둣 솟은 돌기둥과 글씨가 희안하다는 생각 뿐이었다고 기억된다. 주차장에서만 보아도 잘 정비된 모습이다. 이즈음 옛 모습을 찾으려 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다고 생각해 본다.  

 

 

 주차장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건물이 자리하는 데 마음은 벌서 사찰안으로 향하여 먼발치에서 사진 만 찍어본다. 나름의 신축에 대한 건립비로 생각하며 새로이 지어진 건물이라는 생각에  지나친다.

 

 

 예전에 본 모습인가 그자리였나 궁금증이 생기게 하는 일주문이다. 예전에는 큰 사찰이었슴을 알게 해주는 문이고, 유일하게 전쟁에도 남은 건물인 불이문이라 한다. 무언가 변화가 있다는 직감으로 옛 발자취를 찾아본다. 사찰입구에 자리한  불이문은 예전의 그대로 보전되는 지를 알아본다.

 

 

 오래전의 불이문의 돌기둥에는 지혜의 바라밀을 나타내는 문양에 금강저 문양에 붉은 색이 도색되어 있다. 오랜시간의 흐름 속에 남아있던 기억이 되살아 남으로 뿌듯해진다.

 

 

당시의 사진을 뒤져 보며 회상에 잠겨 예전의 모습을 올려 본다. 사지 같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 당시 모습을 사진으로 보면서 이해해 본다. 세월은 우리곁을 빠르게 지나간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사적기에 따르면 건봉사는 신라 법흥왕 7년(서기 520년)에 아도 스님에 의해 원각사(圓覺寺)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 이후 신라 말 도선 국사가 중수한 뒤 절의 서쪽에 봉황새 모양의 돌이 있다고 하여 서봉사(西鳳寺)라 하였으며, 고려 공민왕 7년(1358년)에는 나옹 스님이 중수하면서 다시 건봉사라 이름하였다한다. 사찰입구의 안내판을 통하여 지식을 넓혀본다. 조선 고종 15년(1878년)에 불이나 모두 타버려 이듬해 다시 고쳐 지었다 한다. 한국 전쟁 당시 약 2년의 공방전 중에 1920년에 건립된 불이문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무너져 폐허가 되고, 휴전 기간엔 민간인 통제선 북쪽에 속하게 되었다가 1989년 민간인 출입이 가능하여 진다.

 

 

 불이문의 천장, 천장의 모습을 통하여 불이문의 구조를 살펴본다. 

1920년 건립된 것으로 전쟁중 불타지 않은 유일한 건물 이다. 1단의 기단에 1.61 미터의 4개의 돌기둥과 다포양식에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돌기둥에는 금강저가 음각되어 있어 이는 천왕문을 따로 건립하지 않고 불이문에 사찰 수호의 기능 가지 보탠 것이다. 상단 중앙의 불이문 현판은 해강 김규진의 글씨라 한다.

 

 

 오래전에 본 석주 곁에는 범종각이 있다. 예전의 돌기둥의 글씨는 붉은 색이었다.

 

 

 예전의 돌기둥을 확인해 본다. 건너편에 대웅전의 모습이 보인다.

 

 

 지금은 극락전이 들어선 자리이다. 옛날 나에게 사지처럼 느끼게 한 모습이다.

 

 

 사찰의 입구에 세워진 봉서루는 이전에 보지 못하던 것이라 새로이 지은 것이지만 건봉사에 어울리게 오래된 건물 처럼 보이게 너무도 그 모습이 옛스럽다. 고증에 의해 복원으로 지어진 것인지 궁금하다. 

 

 

 시바라밀 석주는 능파교를 건너면 대석단이 보이고, 대석단의 중앙 통로 좌우로 높이 158cm의 사각형 석주 2기가 서있다. 이곳에 새겨진 것은 십바라밀의 도형으로 음각이 되어 있다. 이의 조성 연대는 1920년대라 한다.  십바라밀은 대승 불교의 기본 수행법인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의 6바라밀에다 이를 보조하는 방편, 원, 력, 지의 4바라밀을 첨가한 것이다. 십바라밀도는 이들 열가지의 수행방법을 상징화하여 나타낸것으로 하나하나에 의미가 있다.

 

 

새겨진 10 바라밀에 대한 설명이 되어 있어 도형의 뜻 풀이에 관심을 가진 사람에게 이해를 시키고 있다.

 

 

 예전의 대웅전은 봉서루가 없었던 시기라 계곡 건너편에서 바로 보였다. 

 

 

이전에 보았던 대웅전이다. 잘 정비된 마당과 법당이 오래전과는 다르다고 뽐내며 자리한다.

 

 

삼존불의 모습은 예전에 느낌 처럼 형상이 강하게 느껴진다. 인자한 미소로 내려다 보는 여느 불상과는 다소 다르게 당당한 모습이다.

 

 

 명부전을 대한다. 세월이 흘렀는데 새로이 단장 한 단청 때문인지 화사한 모습이다.

 

 

내부에서 지장 보살을 대한다. 모든 먼저 가신 분들에게 다시 한번 극락 왕생을 빌어본다.

 

 

 대웅전에서 바라본 봉서루의 모습이다. 너른 마당에 편평한 돌을 펴서 만든 마당이 특이하게 느껴진다. 봉서루 내부에는 금강산 4대 사찰의 하나인  장안사의 옛 모습을 촬영한 사진 들이 전시되어 있어 또다른 볼거리와 앎을 제공한다

 

 

2002년  보물로 지정된 능파교이다. 아마도 이것을 보려 이곳에 방문 한 것 같다. 능파교라 이름 하는 이 홍교의 옛 모습을 담은 사진을 같이 실어본다. 

 

 

 예전의 모습이 자연스럽고 내겐 더 좋아보이는 것은 옛 것을 좋아하는 나의 천성때문 만은 아닌듯하다. 잘 다듬어진 모습이 마냥 눈을 행복하게 하지는 않는 듯하다.

 

 

고성 건봉사의 대웅전 지역과 극락전 지역을 연결하고 있는 무지개 모양의 다리로, 규모는 폭 3m, 길이 14.3m, 다리 중앙부의 높이는 5.4m이다. 
다리의 중앙부분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를 틀고 그 좌우에는 장대석으로 쌓아서 다리를 구성하였는데, 홍예는 하부 지름이 7.8m이고 높이는 기석의 하단에서 4.5m이므로, 실제 높이는 조금 더 높다. 
조선 숙종 34년(1708)에 건립된 경내 불이문 옆의 '능파교신창기비(凌波橋新創記碑)'에 의하면 이 다리가 숙종 30년(1704)부터 숙종 33년(1707)사이에 처음 축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후 영조 21년(1745)에 대홍수로 붕괴되어 영조 25년(1749)에 중수하였고, 고종 17년(1880)에 다시 무너져 그 석재를 대웅전의 돌층계와 산영루(山映樓)를 고쳐 쌓는데에 이용하기도 하였다. 규모가 비교적 크고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다리로, 축조연대와 건립자 등을 알려주는 비석을 갖추고 있어 홍예교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나만의 문화유산 해설사)

 

 

변한 모습을 계곡으로 내려서서 바라본다. 자연석으로 쌓아올려진 석축이 반듯한 돌로 달라짐이 간결하고 단정하기는 하나 왠지 예스러움 과 자연스러움이 없어 진듯 하다.

 

 

오랜 세월뒤 먼길로 다시 본 건봉사는 이제 여는 사찰의 모습과 흡사해져 간다. 이전의 모습보다 가꾸고 새로이 번창하는 사찰을 마주 하며,  보전에 관하여 생각해 본다. 왠지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다. 적은 세월이 아니었기에라고  가지는 회환이라 생각한다. 오랜 세월을 보물과 유적을 찾아보아 왔는데, 같은 그 모습을 다시 한번 보기 힘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요사이는 문화재를 보전하려  적지 않게 주변의 변화에 힘을 쏟는다.  이로 인한 장점에 보이지 않게 사라지는 원형의 유지는 중요하다고 본다 . 예전에 사용된 돌은 어떠한 모양을 가지고 어찌 축대를 쌓았는지 원형대로 보전 하였으면 한다. 적어도 그것이 보물로 지정 되었다면 더욱이 정형화 된 모습보다는 여유로운 자유로운 모습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흘러가는 세월은 세상을 저마다의 편의나 생각에 맞는 모습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빨리 미처 접하지 못한 많은 새로운 문화재를 보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나라엔 둘러보고 찾아보아야 할 것들이 많고, 거기다 예전에 모습에서 얼마나 변했는지도 보려면  다시 가 보아야 할 곳도 많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바뻐진다. 이렇듯 답답해 하는 열정이 나를 길로 나서게 하나보다.

 

如一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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