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여든 일곱번째 - 서울(2)

세종해피뉴스 2022. 12. 23. 18:12

- 탑골공원

 

그간의 멈춤을 뒤로 하고 글쓰기를 하여 본다.

이글의 서두에 밝힌 어머니와의 동행이 멈추게 된다. 근간에 몸의 거동이 어려우시어 잠시 여행이 중단 되고 끝내는 곁을 떠나시게 되었다.

먹먹하지만 정리 못한 글 몇개를 써보며  지속적인 여행에서 그 간에 함께한 추억을 떠올리면서 여행을 이어보려 한다. 

오늘은 탑골공원으로 향한다. 학창시절 기억이 있어 낯설지가 않다. 당시는 가는 세월을 아쉬어 하며 소일 하던 분 들이, 나의 눈에는  아저씨, 할아버지에서 어느덧 동기나 선배로 바귄 것 뿐이다. 

예전에 모여서 바둑이나 장기를 두는 모습은 아직도 담장 밖 한켠에서 진행 되고 있다. 예전의 장기 고수 님과 바닥에 나무가지로 글쓰며  인생 철학을 가르치시던 분들을 기억해 본다.

 

이곳은 탑골 공원, 파고다 공원 등의 명칭을 가졌던 곳이다. 이는 국보 제2호인 원각사지 십층석탑이 있어  '탑골(탑곡;塔谷)'이라고 불리고, 탑모양이 길쭉한 뼈 모양이라 '탑골(塔骨)'이라는 이름을 갖고, 탑을 뜻하는 영어 표현 파고다가 사용되어서 파고다 공원으로 불리었다. 조선 세조 13년에 원각사로 건립하였던 것을 고종 34년인 1897년 도지부 고문인 영국인 브라운에 의해 공원으로 조성되어 1920년에 공원으로 개원하였다.

 

삼일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선다. 

내부로 들어 서면 공원이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고 관람위주와 잠시의 시간 둘러보는 장소로 변화되어 장시간 머무는 분들을 볼 수가 없다.

온전히 이곳이  독립운동의 시발점인 곳으로 기념되기 위한 장소로 경건한 감이 들도록 하려 노력한듯 하다. 

 

[내부 전경]

사적 제354호로 1919년 3. 1 운동의 발상지로 처음으로 독립 선언문을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친, 우리민족의 독립 정신이 살아 숨쉬는 유서 깊은 곳이다. 1992년 5월 28일 공원 명칭을 파고다공원에서 탑골공원으로 개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주요 시설로는 독립운동 봉화에 불을 당겼던 팔각정을 중심으로 국보 원각사지 10층 석탑, 보물 원각사비 등의 문화재와 3.1운동 기념탑, 3.1운동 벽화, 의암 손병희 선생의 동상, 한용운 선생 기념비 등이 있다.

 

3.1운동 기념탑 :독랍 선언서를 조각
[손병희 선생동상]
[원각사비]

원각사의 창건 내력을 적은 비로, 조선 성종 2년(1471)에 건립되었다. 원각사는 탑골공원 자리에 있던 절로 조선시대 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조계종의 본절로 세웠다. 조계종이 없어지자 관아로 사용되다가 세조가 간경도감에서『원각경(圓覺經)』을 번역하고, 회암사 사리탑에서 사리를 나누어온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곳에 다시 원각사를 짓고 10층 사리탑을 세웠다.

[보물 서울 원각사지 대원각사비]

비는 머릿돌을 따로 얹지 않고 비 몸돌 위를 두 마리의 용이 감싸듯 표현되어 있어 복고적인 형식을 따르고 있다.
비를 지고 있는 돌거북은 둔중한 몸체로 머리는 목을 표현하지 않고 앞으로 나와 있다. 등무늬는 육각형이 아닌 사다리꼴 평행세선을 새겼으며, 등 중앙에는 연잎조각을, 꼬리와 다리에는 물고기 비늘을 조각해 놓아 조선시대 조각미의 독특한 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비 몸돌 위로는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를 드는 두 마리의 용이 조각되었으며, 조각 아래의 가운데에는 ‘대원각사지비 (大圓覺寺之碑)’라는 비의 이름이 강희맹의 글씨로 새겨져 있다. 비문은 당대 명신들이 짓고 썼는데, 앞면의 비문은 김수온, 성임, 뒷면의 추기는 서거정, 정난종이 각각 짓고 썼다. {문화제청}

 

[팔각정]

기억속에 팔각정은  당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던 뜻깊은 장소, 그리고 많은 사람들로 자리하던 곳으로 기억된다. 이전의 많은 인파가 모여 있던 계단에 몇몇이 앉아 있는 모습이 예전과 온전히 다른데 별다른 느낌이 없음은 무었일까. 당시 내게는 맞지 않는 장소였다는 생각으로 느껴 졌는데, 팔각정을 지나 국보를 찾아본다. 보존을위한 것인지 수리를 위한 것인지 보호 설비로 인해 이유는 잘 알 수 없느나 온전한 모습을 보기 어렵다. 

 

[국보 2호 원각사10층 석탑]

원각사는 지금의 탑골공원 자리에 있었던 절로, 조선 세조 11년(1465)에 세워져, 조선시대의 숭유억불정책 속에서도 중요한 사찰로 보호되어 오다가 1504년 연산군이 이 절을 ‘연방원(聯芳院)’이라는 이름의 기생집으로 만들어 승려들을 내보냄으로써 절은 없어지게 되었다한다.

이 탑은 조선시대의 석탑으로는 유일한 형태로, 높이는 약 12m이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탑 구석구석에 표현된 화려한 조각이 대리석의 회백색과 잘 어울려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탑을 받쳐주는 기단(基壇)은 3단으로 되어있고, 위에서 보면 아(亞)자 모양이다. 기단의 각 층 옆면에는 여러가지 장식이 화사하게 조각되었는데 용, 사자, 연꽃무늬 등이 표현되었다. 탑신부(塔身部)는 10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3층까지는 기단과 같은 아(亞)자 모양을 하고 있고 4층부터는 정사각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각 층마다 목조건축을 모방하여 지붕, 공포(목조건축에서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에 얹는 부재), 기둥 등을 세부적으로 잘 표현하였다. 우리나라 석탑의 일반적 재료가 화강암인데 비해 대리석으로 만들어 졌고, 전체적인 형태나 세부구조 등이 고려시대의 경천사지 10층석탑과 매우 비슷하여 더욱 주의를 끌고 있다. 탑의 윗부분에 남아있는 기록으로 세조 13년(1467)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으며, 형태가 특이하고 표현장식이 풍부하여 훌륭한 걸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나만의 문화 유산 해설사]

 

원각사의 절의 화려함이 연산군에 의하여 기생집으로 자리하다, 궁궐의 인근 종로 통에 자리한 사람의 내왕이 많은 곳이 갖는 운명인듯하다. 근대공원의 시초로 자리한 것도, 새로운 역사를 일으키는 1919년 3.1운동 당시 학생들과 시민이 이 앞에 모여 학생대표의 독립선언문 낭독에 이어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고 시위 행진을 벌였던 것도 모두 이에 기인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서울에서의 한가한 장소를 과거에 가장 북적이던 곳에서 느끼며 삼일문을 나선다.

 

如一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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