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여든 세번째 - 봉화(2)

세종해피뉴스 2022. 8. 13. 00:18

이른 아침 각화사를 찾는다. 새벽 안개가 산허리를 감싼 각화사는 뒷편에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해오던 태백산사고를 수호 하던 사찰이다. 이 자리는 조선시대 5대 사고중 하나이다.

조선왕조는 오대산·마니산·적상산·춘추관·태백산에 각각 사고를 지어 실록을 보관했는데, 태백산사고터는 경상감사 류영순이 추천하여 선조 39년(1606)에 짓고 1913년까지 실록을 보관하였던 곳이라한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이곳에 있던 실록을 경성제국대학으로 옮겼고,  광복 후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있다가 현재 국가기록원 부산기록관에 있다고 한다.

오늘의 방문은 사고터를 보러 가는 길이 아니다. 마음은 그 곳으로 향하나 갈길이 험하고 힘겨움을 이야기 해주는 일행으로 빠르게 포기 한다. 주변의 산세가 워낙 험준하기 떄문이다.
사고 건물은 해방 전·후 불타 없어지고 산사태 등으로 매몰되었던 것을 1988년 발굴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실록각·선원각·포쇄각·근천관 등의 건물터만 남아있다고 하는데, 백두대간 에 자리한 이곳 사고터를 찾아 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차를 대고 아침 산길을 따라 발걸음은 각화사로 향한다. 오르는 길 옆의 계곡은 경사가 심해 물길이 마치 폭포 처럼 흐르는 것이 백룡이 오르는 듯한 기상의 물길이다. 

 

 

산속에 자리한 각화사는 산과 산사이의 계곡사이에 터를 잡아서 인지 축대를 높이 쌓은 위에 자리한다. 이른 아침의 계곡의 습기로 인한 산정 가지 덮고 있어 산속이 사찰이 신비롭게 보인다.

사찰에 들어가기 전 맑은 물로 정화하고 들어서는 느낌을 받는다.

 

 

겹겹이 둘러쳐진 산봉우리들 사이에 자리한 사찰의 축대 위에 올려다 보이는 월영루가 자리한다.

예전의 사찰터를 자리 잡는  방법 중의 하나가 사찰은  안에서 밖을 내려다  볼 수는 있으나, 밖에 서는 사찰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는 곳에 자리잡는다고 한다. 호국의 정신이 깃들고, 외부로 부터의  접근이 용의 하지 않는 아늑한 곳이 사찰의 터로는 길지 인가 보다. 길을 함게 나선 아우의 설명에 이 절이 위치한 장소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새로운 앎을 늘려 간다.

 

 

월영루가 서있던 마당에서 한 단 더 위의 축대 위에는 대웅전이 자리한다. 이곳도 축대를 쌓아 올려서 다진 터에 대웅전이 자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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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무가 낀 대웅전과 요사체 인듯 한 건물이 자리한다. 그냥 보기에도 깊어 보이는 산세의 이곳에 어인 연휴로 이 사찰이 자리하고 있는지, 그저 산속이었을 듯한 이곳에 사찰을 건립한 옛 고승의 안목이나 뜻을 헤아리지 못하겠다.

 

 

그리 오래지 않은 대웅전을 접한다.  사찰의 유래가 오래고 사연도 많은  이곳에 오래되지 않은  반듯한 그러나 그 크기가 크지 않은 대웅전을 접하면서 절의 수난을 상상해 본다.  예전과 동일한 모양의 건물은 아니었을 것인데 하는 추축을 가지며, 예쁜 꽃 문살은 언제 만들어 진 것인지 궁금증을 가지게 한다. 절이 있는 석현리와 인접한 서동리에는 각화사의 전신인 서동리 동서탑이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남화사지(覽華寺址)가 있다. 원효는 이 절을 이건하여 각화사를 창건한 뒤, 옛 절인 남화사를 생각한다고 하여 각화사라 하였다는 설이 전한다. 이사찰의 대웅전은 작고 새건물의 느낌을 보여 주지만, 꽃 문양의 문살과 축대에 새겨진 조각들로 인하여 에술적인 미를 강조하여 지은 듯하다.

  

  

 

적은 규모의 대웅전 이라는 생각에 들어선 법당안에는 석가여래 좌상만이 자리한다. 이곳도 불심이 번창하여 여느 사찰처럼 협시불이 모셔지길 기원해 본다. 

 

 

각화사의 문화재는 서암 신중도와 금봉암 아미타불회도, 독성도, 금종암 신중도 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이러한 문화재가 이곳이 아닌 이 사찰에 속하는 적은 암자에 보관되어 있나 보다. 

이 곳 보다 더 깊이 들어간 암자에 보관되어 있어서  그래도 문화재로 오랜기간 존재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산속의 계곡사이에 자리한 사찰이고  해도 오래 들어오지 않을 이곳 산중에서, 입구의 월영루 옆으로  습도가 높아서 인지 이끼가 자욱한 탑이 자리한다. 이 탑은 옥개 받침이 두텁게 4~5 개로 옥개석이 두텁고 둔탁해 보이고, 층의 탑신석이 줄어드는 형태를 가지고 있으나 어쩐지 배치가 균형을 잃은 듯하고 맞지 않는 모습이다.  전체적으로 안정 감은 그리 없어 보이나, 이끼를 얹은 모습이 어울려 오랜 역사의 탑인 듯한 분위기를 가지나 그 내력을 알수 없는 탑이다. 이 삼층석탑은 도괴된 것을 다시 모아 조성한 것으로,  높이는 약 3m이며 체감률이 낮고 상륜부도 없다.

 

각화사에 머물며 일행과 여러 이야기를 주고 받다가 올라 오던 길을 다시 내려오다 보면 부조와 탑이 있는 곳으로 향하게 된다. 올라 오던 길에 지나친 길이다. 

 

 

사찰의 중요문화재로는 1984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귀부(龜趺)가 있다. 이 중 귀부는 가로 2m, 세로 1.85m의 방형석(方形石) 위에 놓인 길이 1.75m의 것으로서, 시대나 유래 등은 알 수 없으며, 비석이 꽂혔던 자리만 남아 있다. 각화사에 놓여 있는 비받침돌로, 고려 전기 문신인 좌간의대부 김심언이 세웠던 ‘통진대사비(通眞大師碑)’의 일부로 전하고 있다.

바닥돌과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등 중앙에 마련된 비좌(碑座:비몸을 꽂아두는 네모난 홈)는 약간 파손되긴 하였으나 거의 본 모습을 갖추고 있다. 등무늬는 6각형이 전면에 덮혀 있고, 그 안마다 ‘王’자와 ‘佛’자를 도드라지게 새겼다.  대체적으로 고려 전기의 정교하고도 웅대한 조각솜씨로 보이나, 몸통에 비해 머리가 작은 감이 든다. 소중한 고려 전기의 작품이라 할 수 있으며, 후에 비몸과 머릿돌을 새로이 만들어 그 위에 세워놓았다.  각화사 귀부(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984년 지정) 안내표지판에는 각화사는 686년(신문왕 6)에 창건하였다고 하고, 고려 예종 때 국사 무애계응(無礙戒膺)이 중건한다. 오래전 있어 왔던 역사적인 사실이 비를 통하여 우리에게 많은 것을  전해준다.  역사나 사실을 목판이나 종이로 인쇄나 서적을 통하여 아는 것이라 생각 하지만, 정확한 위치에 존재하며 오랜간 그 내막을 간직하고 있는  비를 통해 사실적, 역사적 일들을 알게 되는 일 이 많다. 이것이 우리가 우리의 석조물에 대한 관심과 보전이 필요한 이유 일 것이다. 

 

 

이웃에 사리탑들이 자리 한다.  세월의 흐름을 보여주는 부도탑들이다. 아침의 맑은 공기를 마시며 각화사를 보게 된 것도 봉화여행의 또다른 기쁨이었다. 앞 큰길을 몇번이고 지나며 미루어 온것은 이 사찰에 보물 같은 문화재가 없음이다, 오늘을 통하여 사찰 하나 하나 이어오는  많은 이야기 를 접하게 되는 즐거움이, 꼭 보물을 접하며 느끼는 즐거움 보다 적지 않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찾아보아 보물이 있으면 더 좋고 보물이 없어도 다른 문화제와 볼거리는 사찰 마다 존재 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도 여행의 즐거움이 아닌가. 길 앞을 바삐 움직이는 정체 불명의 물체를 따라 길을 내려 간다. 눈길을 사로 잡은 것은 콘크리트 길위를 구르는 솔방울이다. 마치 생쥐가 기어가듯 앞을 내달리는 솔방울을 따라 쫓으며 길을 재촉한다.

 

如一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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