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여든 여섯번째 - 서울

세종해피뉴스 2022. 12. 6. 18:51

 오랫만에 이전 서울의 중심 거리인 종로의 종각 역을 나선다. 애초에 여행의 계획을 잡고 방문 한 것이 아니라, 일로 인한 방문이라 바삐 쫓기듯 종각 주변의 문화재를 둘러 보려 한다. 

이전의 기억으로 종로에는 YMCA, 화신 백화점, 낙원상가가 기억되고, 지하 음악다방의 구석에서 디제이가 틀어 주는 음악을 듣던 기억이 있는곳, 그리고 많은 학생의 발길이 드나드는 학원가와 종로 서적 당시는 종로의 거리는 젊은 이의 꿈을 키우던 곳 이었는데, 지금은 세월의 흐름속에 사라진 것이 많고, 주변의 환경도 그리고 사람들의 모습도 많이 바뀌었다는 것을 느낀다. 그중에 눈에띄는 보신각을 바라본다. 세해의 기운을 받기 위해 한두번 밤을 세운 것도 같고,  몇번 방송으로 본것도, 기억 속의 보신각은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곳, 타종을 생중계하던 곳이라는 느낌 과는 달리 이른 아침에 보는 보신각은 무척이나 조용하고 산뜻하다는 느낌이다. 임진왜란과 지진에 의한 화재, 한국전쟁 등으로 전각이 소실과 재건을 반복하다가 현재의 누각은 1979년 철근 콘크리트 구조의 2층 누각으로,  종은 1985년에 새로 주조한 종을 재현해 놓았다. 도심의 한복판에 우뚝이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지만, 빌딩 사이에 그래도 누각의 본연의 모습을 간직하고 매년 년말을 기다리는 모습에 아침해가 뜨기 직전의 쓸슬한 모습이 옛 건물을 맞이한 나의 눈과 머리를 맑게 하여 준다.

 

 

이른 아침 이어서 안으로의 진입이 어려워 발길을 돌린다. 이전에는 이곳을 지키는 무장한 옛날 복장의 수문장이 맞이하여 사진도 같이 찍었는데 이른 아침에 어디 해장이라도 갖나 하고 혼자 웃어 본다.

오전에 일을 보고 저녁의 어스름함을 맞으며 조계사로 향한다. 방문 하여 본 숱한 사찰에서 익숙한 조계종이라는 종단의 본단이라는  조계종 본당이다. 이곳도 최근에는 지나는 다녀도 쉬 찾기가 어렵던 곳이다. 이전 많은 방문과 너무 잘 안다고 생각해서 일까 발걸음이 닿지 않던 곳이다.

 

 

초입부터 무언가 바귐이 느껴진다. 무언가가 바뀐 것은 커다란 일주문이 큰길에서 쉽게 보이고 옆에 주차장이 보인다는 것이다. 불교 용품을 판매하는 조금은 골목길을 걸어 들어 갔었는데 변한 모습에 정말 오랜 만에 온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길 건너에서 조계사를 바라보며 이전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조계사는 삼각산 태고사를 이전하는 형식이었기 때문에 조선 태조 이성계 재위 4년(1395)에 창건 되었다고 말하나, 실질적 창건은 구한말 순종 융희 4년(1910)에 되었다고 한다. 현 조계사는 그 역사가 비교적 짧으나 매우 복잡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마음을 가다듬고 일주문으로 향한다.  양옆의 사천왕상을 접하며  다소 혼란스러움을 느낀다.  조계종의 본산인 조계사를 지키는 사천왕상이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었던 형상으로 자리한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순간 중국, 싱가포르, 대만이 이러한 느낌 인가 생각해 본다. 도심 속의 발전한 한국의 대표 사찰의 인상을 위해 나름 근대화 된 조각상을 설치 한 것일까? 사천왕상을 지나며 내게 있어 엄숙한 감이나 무언가 숙연한 그동안의 사찰을 대하는 느김과는 다른 감정이 올라오는 것 같다.

2013년 11월 26일에 사천왕상을 일주문 앞에 새로 설치하였는데 철판을 잘라서 겹쳐 만들었단다. 철로 제조되어 무게는 개당 1톤이라 한다. 제대로 천왕문을 만들어 일주문 밖에서 일주문을 바라보아 왼쪽부터 증장천, 광목천, 다문천, 지국천이라고 한다. 
조계사 주지 도문 스님이 조계사에 사천왕상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기던 차에, 금속공예가 이근세를 만나 작품을 주문했다고 한다. 사천왕상을 설치할 공간이 없어 일주문  네 기둥 앞에 하나씩 세웠다가 지금은 천왕문을 통과할 때처럼 일주문 양 옆으로 2개씩 세웠다고 한다.  여러 생각은 뒤로 미루고 안으로 들어선다.
 

 

한눈에 들어오는 사찰의 전경이 눈에 익기도 그리고  낯설기도 한 것은 무슨 연유 일까. 눈에 보이는 부처님의 형상이 다소 낯설어 보인다. 이로 인해 불교의 세계화에 걸맞아 서인지 동남아풍을 느끼게 된다. 뭔지 모르게 이전의 조계사라는 느낌을 지워보이게 된다. 잘 가꾸어진 국화의 꽃길도 왠지 나의 마음 한구석을 다치게 하는 듯하다.

이전 보고 느끼던 조계사의 분위기가 마치 무언가 보여주는 전시장 같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은 나만의 속 좁은 의견일까. 도심속의 사찰에서는 같은 불심으로 존재하지만, 도시의 불자의 맘에는 드는 사찰의 모습은 다소 현대 적인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대웅전 앞에 서본다. 이전에는 이곳 법당안에 좌선 하며 복을 구하고, 생각없이 시간 보내고 간 일이 있었던 곳이다. 먼발치서 대웅전을 접하며 짧게 머물러 본다.

 

 

법당의 측면이 4칸의 사찰인데 시내 중심의 법당이어선지 그리 크게 보이지 않음을 느끼게 된다. 종단의 행사를 위해서는 큰모임을 위해 너른 앞 마당, 큰 전각이 필요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크고 너르지만 작고 좁아보이는 느낌의 사찰의 모습에 그리고 주변에 보이는 콘크리트 빌딩으로 인해 왠지 다소 산만함을 느낀다. 조용히 마음을 다스리는 정적인 감정을 느낄 만한 장소는 어디일까 의문이 든다.

 

 

내부 촬영을 막는 글귀를 보며 위축된 마음으로 법당 외부에서 촬영하여 본다. 대웅전에 불상 3좌를 봉안하여 이를 삼존불이라고 부른다. 좌로부터 각각 아미타여래(아미타불), 석가여래(석가모니불), 약사여래. 이 세 불상은 대웅전 크기 때문인지 법당 내에 모신 불상 중에선 매우 큰 편에 속한다.

 

[보물 조계사 목조 여래좌상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 포털]

사진의 오른쪽의 불단 오른쪽 아래에는 작은  석가모니불이 있는데 이는 대웅전 중수 당시 영암 도갑사에서 모셔온 불상이다. 이 불상이 2022년 2월 28일 보물로 지정된 인 목조 여래 좌상이다.

‘서울 조계사 목조여래좌상’은 조선 15세기에 제작된 작품으로, 전라남도 영암 도갑사(道岬寺)에 봉안되어 오다, 1938년 6월 조선불교 총본산(總本山) 건립에 맞춰 총본산(당시 太古寺, 지금의 조계사)의 주존불로 봉안하기 위해 이안된 상징적인 불상이다. 이 불상은 일제강점기 왜색불교를 배척하고 조선불교의 자주성과 정통성 확보를 위해 건립된 조계종 총본산의 주불(主佛)로 봉안된 것으로, 조선불교의 전통을 회복하고자 했던 당시 불교계의 염원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한국불교사 및 불교미술사에서 차지하는 역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고 한다.

정확한 제작 연대는 밝혀져 있지 않지만, 양식적으로 명대(明代) 영락(永樂)~선덕연간(宣德年刊)에 제작된 티베트 불상의 국제적 양식을 반영하고 있으며, 1450년 ‘통도사 은제도금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을 비롯해 1451년에 제작된 ‘금동여래좌상’, 그리고 사명대사가 발원한 ‘포항 대성사 금동여래좌상’, 1458년 ‘영주 흑석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1466년 ‘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 등과 유사한 양식을 공유하고 있어 조선 15세기 작품으로 보고 있다고 한다.

생각에 잠긴 듯한 고요한 표정, 편단우견(偏袒右肩)의 착의형식, 안정된 비례감을 지닌 신체, 탄력적인 양감, 생동감 있게 연출된 세련된 옷 주름의 표현 등이 조선 전기 대표작 국보 ‘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과 비교될 정도로 높은 수준과 조형적 완성도를 갖추고 있다. 지금은 뒤편에 금색 광배가 자리하고 있다.

 

[ 10층 탑과 조계사 백송]

백송은 나무껍질이 넓은 조각으로 벗겨지며 흰빛이 되어서 백송 또는 백골송(白骨松)이라고도 한다. 중국이 원산지로서 조선시대에 중국을 왕래하던 사신들이 가져다 심은 것이라 한다. 조계사 백송의 나이는 약 5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14m, 뿌리부분 둘레 1.85m이다. 조계사 뜰 안 대웅전 옆 가까이 서 있고, 대웅전 쪽으로 뻗은 가지만 살아 있다. 나무의 한쪽은 사람들이 오가는 통로에 바로 접해 있고, 다른 한쪽은 건물에 인접해 있어서 나무가 자랄 수 있는 공간이 부족하고 생육상태도 좋지 않아 희귀 소나무라는 것이외  천연기념물의 이름값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생각이다. 

종래의 통례로는 대개 홀수로 탑의 층수를 따랐는데 이번 이 탑은 8각 10층인 짝수의탑이다. 8각은 정견(正見).정사유(正思惟).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정정진(正精進).정념(正念).정정(正定) 의 팔정도(八正道)를 상징하였고, 10층은 불살생(不殺生).불투도(不盜).불사음(不邪).불망어(不妄語).불양설(不兩舌).불악구(不惡口).불기어(不綺語).불탐욕(不貪慾).불진에(不瞋).불치암(不痴暗) 등의 십선법(十善法)을 뜻하고 있다고 한다.  팔정도와 십선법은 부처님의 근본교설 중 전법(傳法)과 수행의 핵심 기조이다. 그간 탑을 건립함에 있어 층을 홀수로 마감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여러 차례 제기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범종각과 경내를 둘러보며 조계사를 나선다. 세월의 흐름 속에 변하는 것이 세상이치 이지만 오늘의 조계사의 방문에서는 왠지 정적인 예전의 느낌을 맛보지 못한다. 아마도 법당안의 부처님아래 앉아보지 않아서 일 것이라 생각해본다.  몇번은 발 걸음 할 수 있으리라 생각되어 법당안으로 발길을 들이지 않아서 인지 겉만 빙빙 맴돌다 바삐 빠져 나온다. 얼마 간의 이동을 하여야 머물며 잠을 청하는 곳으로 가려면 지하철이라는 정해진 시간에 움직이는 교통 수단으로 이동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서울은 정해진 스케줄에 바쁘게 움직이는 사랍들 틈에 끼어 그 흐름에 몸을 맡기고 함께 움직이는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서울 떠난지 오래 되어서 일까 왠지 익숙하지 않고 적응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 하루 이다. 시간을 가지고 이곳의 불교중앙 박물관을 다시 찾아볼 생각을 갖고 있다. 이때 이곳 조계사를 다시 한번 방문 예정지로 잡고 아쉬움으로 지하철 역으로 향한다.

 

如一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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