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일흔 일곱번째 - 거창, 함양

세종해피뉴스 2022. 4. 25. 17:49

오늘 방문하는 곳은 함양이다. 많은 정자를 가진 곳이나 오늘은 이곳의 못 다 방문한 보물을 찾아 나선다. 무주 구천동을 지나 빼재터널옆의 옛길 빼재로는 인가가 끝난 구간 부터는 공사로 도로가 막힌다. 이곳을 지나며 볼 수 있는 자작 나무 숲을 볼 수 없음을 아쉬워 하며, 길을 돌아 빼재터널을 지나 거창으로 들어선다. 마리면 고학리의 용원정을 찾는다. 짧은 계곡이지만 계곡을 이루는 커다란 바위와 낮은 높이 이지만 물흐름이 좋은 폭포도 있고, 나무들도 푸르러 한폭의 동양화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주차장에서 보이는 용원정 ]

한눈에 들어오는 용원정과 계곡을 건널 수 있는 돌다리 그리고 효열각의 풍경을 계곡으로 내려 서서 감상해 본다.

 

[계곡에서 본 전경]
[쌀다리와 효열각 ]

다리와 수평을 이루며 뻗은 가지가 벛곷을 피우는 벛나무 가지 이다. 한철에는 초록의 잎이 대신 하얀 벛꽃으로 가득하다 한다. 조금은 늦은 감이 있지만 그래도 아직 어린 잎이어서 그런지 벛곷이 한창일때를 연상해 본다. 마음속으로 푸른 잎을 벛곷으로 상상해본다. 

 

[쌀다리]

응원정 쌀다리는 옛 돌다리 가운데 하나로 한개의 중심다리 받침돌 위에 두개의 큰돌을 연결지어 마치 거문고처럼 누운 평교이다. 1758년 오성재, 오성화 형재가 쌀 1천석을 들여 놓았다 하여 '쌀다리'라고 부른다. 주변에 가득한 벛꽃나무와 용원정을 배경으로 자리한 쌀다리 위에서의 사진은 멋진 작품이라 한다. 다리위를 올라서보니 다듬어진 돌이지만 그 크기가 엄청나다. 가운데 교각위에 두 큰돌을 맞불려 중심을 잡기가 그 예전에 쉽지 않았을 듯 하다. 얽여서 만든 다리보다 웬지 힘들다는 생각이 든다.

 

[쌀다리]

예전에 이 돌다리를 따라 경남의 선비가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가며, 팔도를 도는 보부상들이 오갔던 다리라 한다. 전국을 돌라다녀도 다리하나 없으면 불편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중요한 이곳에 돌다리를 자비를 들여 설치한 형제 들의 애씀을 느끼며, 그리고 이곳을 걸은 많은 사람 중에 나도 포함 된다는 생각으로 다리를 건너본다.

 

 

다리끝에는 열행과 효행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는 효열각과 용암정

 

 

다리위에 잎을 드러낸 나무가 벛꽃이 한창일때는 이곳으로 벛꽃보러 많은이 들이 오는데 이번이 첫 방문이라 올해는 벛곷 경치를 놓친다. 다음엔 이곳에 벛꽃이 한창인 모습을 담고 싶어진다. 마음속으로 잎을 하얀 꽃으로 상상 하며 사진 한장을 남겨본다.

 

[용원정 내부의 청룡, 황룡 , 익살수러운 도깨비]

용암정은 조선 순조 1년(1801)에 용암 임석형(1751∼1816) 선생이 바위 위에 지은 정자이다.
임석형이 지은 『용암정 창건기』와 이휘준의 『중수기』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고종 1년(1864)에 보수 공사한 것으로 되어 있다. 정자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중앙에 방 1칸을 만들어 마루 아래에서 불을 땔 수 있게 하였고, 둘레에 난간을 설치하였다. 아름다운 풍경과 더불어 고결한 선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정자 안에는 ‘용암정(龍巖亭)’, ‘반선헌(伴仙軒)’, ‘청원문(聽猿門)’, ‘환학란(喚鶴欄)’이라고 쓴 액자가 걸려 있다.

 

함양으로 들어서며 함양의 승안사지를 찾아본다. 

 

[승안사지]

승안사는 통일신라시대에 번창했던것으로 알려졌는데 1481년 성종 12년에 편찬된 '동국 여지승람'에는 기록이 있지만, 약300년뒤인 1799년 ('정조 23년)에 간행된 [범우고]에는 절이 없어졌다고 기록되어 있어 그 사이 절이 사라 졌을 것으로 본다. 그전에 이곳을 방문시 강아지가 발밑을 따라 다녔는데, 지금은 민가의 큰개가 간만에 온 사람을 보고 목청것 짓어댄다.

 

[경북 유형 제 33호 승안사지 석조여래좌상]

승안사지석조여래좌상은 3층석탑에서 20m 변방 개천가에 있는 불상이다. 하반신은 땅에 묻힌채 상반신만 남아있는 불상은 현재의 크기만도 280cm이다. 오른팔이 떨어져 나가고 머리부분은 몸체와 균형이 맞지 않아보인다. 유난히큰 코와 일자로 다문 입이 엄한 표정이다. 선에 가까운 옷주름과 직선 적인 신체 윤곽선으로 생동감이 없어보인다. 이불상은 거구불상의 조형성이 잘 나타나는 고려시대이 석불 좌상으로 보고 있다. 

 

[승안사지 삼층석탑 보물제 294호]

고려시대의 탑이다. 이탑은 원래 있던 자리에서 두번 옮겨졌는데. 1962년에 현재의 장소로 탑을 옮길때, 홍치7년 (1494년)에 중수에 관한 문서가 발견되어, 조선 성종25년에 처음 탑을 옮겨 세웠음을 알 수 있다. 1층 몸돌위에 만들어진 사리구멍에는 원통형 사리함, 녹유사리병, 비단조각과 주며니, 유리구슬 등이 발견되었다.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통일신라의 양식을 따르면서도 곳곳에 고려 특유의 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기단의 각 면에는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위층 기단에는 부처, 보살, 비천(飛天) 등의 모습을 새겨두었다.  위층 기단의 맨 윗돌에는 연꽃조각을 새겨 둘러 놓았다. 탑신은 각 층의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고 있다. 1층의 몸돌에는 각 면마다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조각하여 놓았다. 지붕돌은 몸돌에 비해 넓고,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다. 지붕의 경사는 급하고, 처마는 수평을 이루며 네 귀퉁이가 거의 들려있지 않다. 탑의 꼭대기에는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 위에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과 앙화(仰花:솟은 연꽃모양의 장식)가 남아있다. 대체로 통일신라 석탑의 기본을 잘 따르고 기단과 탑신의 비례가 균형을 잃어 잘 다듬은 작품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곳곳에 나타나는 특수한 양식이나 장식에 많은 힘을 기울인 흔적 등 고려 전기의 특색을 보여주고 있다.

 

승안사지의 옆 산중턱에는 일두 정여창 묘역이 있다. 

 

[정여창 묘역]

一蠹 鄭汝昌(1450-1504)은 조선 성리학사상 한훤당 김굉필과 함께 포은 정몽주의 학통을 계승하여, 정암 조광조·회재 이언적·퇴계 이황·남명 조식 등과 같은 성리학자들의 배출을 가능케 한 인물이다. 그의 묘소는 1504년 서거 직후에 일어난 갑자사화로 인해 부관참시라는 처참한 역사적 현실을 겪었던 곳이다. 묘역 내에는 일두 정여창의 묘와 정경부인 완산이씨의 묘가 자리잡고 있으며 정여창 묘 앞에 선 신도비는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하려 하자 자결을 시도하여 청사에 이름이 길이 빛나는 桐溪 鄭蘊(1569-1641)이 지은 것이다. 동계 정온 또한 이웃 고을 출신으로 일두 정여창을 사숙하였던 인물이다. 일두 정여창과 부인 정경부인 완산이씨 묘소는 조선 전기 사대부의 무덤양식을 잘 나타내주고 있으며 묘역 내 석물들도 우수한 작품으로 그 가치가 더욱 높게 평가된다.

 

[ 춘수정]

 

승안사지와 정여립의 묘소로 가는 길목에 자리한다 . 정수민을 기리는 사적비와 누정이 자리한다. 1947년 정수민의 후손이 건립, 정수민은 정여립의 후손이다.

 

[하동 정씨 구충각과 정여항 신도비]

춘수정 옆에는 하동 정씨 구충각이 자리한다, 9명의 하동 정씨 충신들의 9개의 비를 모셔 놓은 곳이다. 

구충각은 하동정씨 일가 여덟 문중에서 아홉 사람을 지칭한다. 1728년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이에 호응하여 안음[지금의 안의면]에서 정희량 등이 난을 일으켰는데 이를 진압한 이들이 하동정씨 아홉 사람이다. 이에 나라에서 공을 인정하여 정려를 내렸다. 9인은 정희운, 정찬헌, 정윤헌, 정소헌, 정중헌, 정상헌, 정승헌, 정사헌, 정진후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한양의 보물인 교산리 석조여래 좌상을 찾아  함양 읍내로 들어선다. 원래는 청룡사터 또는 용산사터에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지금은 함양중 고등 학교에 모셔져 있다.

 

[보물 제 376호 교산리 석조여래 좌상]

고려시대의 석불좌상이다. 대좌의 높이까지 포함하여 4m가 넘는 거대한 조각으로 불상 뒤의 광배(光背)가 없어지고, 불상의 얼굴과 오른손, 무릎 및 대좌(臺座) 일부가 없어진 상태이다. 얼굴은 몹시 닳고 머리에도 파손이 심하여 세부는 알 수 없는데 큼직하고 강건해 보인다. 이런 형태의 얼굴은 함양 덕전리 마애여래입상과 비슷하며 밝은 미소까지 흡사하다. 옷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있으며, 신체는 건장한 편으로 당당한 모습이다. 몸을 가로지르는 옷주름은 평행을 이루고 있는데 조금은 형식적으로 처리되었다. 오른팔은 굵고 우람하며, 손은 깨졌지만 손끝이 땅을 가리키는 모양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왼손도 손바닥을 위로 한 채 무릎 위에 올려 놓았다. 대좌는 4각형인데 윗부분의 앞뒷면은 깨어지고 양쪽 옆면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대좌의 중간부분에는 눈모양의 안상(眼象)이 새겨지고 아랫부분에는 구름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이 불상은 고려적인 불상의 힘과 아름다움을 잘 표현하고 있는 걸작으로 여겨진다.

 

함양하면 유명한 상림을 차로 밖을 한바퀴 돈다. 잘 다듬어진 숲길을 걸어보고 싶은 충동이 있었으나, 새로이 건축된 건물만을 눈에 담고, 벗어난다.

 

[상림 공원내 신축 건물 ]

귀가길을 택하며 용추계곡으로 스며든다. 차를 내달려 영추폭포에 당도한다. 진달래가 폭포 양옆에 피어있는 용추 폭포가 힘차게 물줄기를 내려 꽂는다. 작업에 열중이신 진사님들 사이에서 얼른 폭포모습을 담고 계곡을 탐방한다. 

 

함양(咸陽) 안의(安義) 용추계곡(龍湫溪谷)으로 향한다. 이성계를 도와 조선의 도읍을 정한 무학대사가 정도전의 간계에 몰릴 것을 미리 알고 숨어들어 은신한 곳이고, 주변에 기백산(1,331m), 금원산(1,352m), 거망산(1,187m), 황석산(1,192m)등 천미터가 넘는 산이 우뚝우뚝 솟아 있어 골이 깊고 물이 풍부하며 수많은 소(紹)와 전설과 바위를 거느리고 있다. 예로부터 용추계곡은 많은 선비들이 찾은 곳으로 심진동이라 하여 화림동, 원학동과 함께 안의삼동이라 불렸다.

 

[용추폭포]

여름철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마치 용이 지축을 흔들며 승천하는 것처럼 들린다는 데에서 유래한 용추폭포이다. 백두대간 길의 대야산 용추계곡, 문경 용추계곡, 가평 용추계곡이 있지만 그중 으뜸이 함양 안의 용추계곡이다. 명승 제85호로 지정된 용추폭포는 지우천 상류에 있다. 기백산에서 발원한 물이 만들어낸 폭포로 전국의 수많은 '용추폭포'라는 이름의 폭포 중 가장 규모가 크다한다. 용추폭포 근처에는 신라 소지왕 9년(487)에 각연이 창건한  용추사가 있으며, 용추계곡의 끝 지점에는 용추자연휴양림이 있다.

이 폭포에는 용이 되기위해 108일 동안 금식 기도를 하던 용의 전설이 있다. 이 이무기는 108일을 하루 앞둔 날, 용이 된다는 기쁨에 날짜도 잊고 하늘을 치솟고 말았다. 그러자 이무기는 천둥 벼락을 맞고 인근의 위천면 서대기못에 떨어진다. 이후 서대기들판은 이무기가 썩은 물로 3년 동안이나 풍년 농사를 지었다는 이야기이다. 폭포의 모습이 용이 승천하는 모습과 소리를 가져서 만들어진 이야기 일 것이다.

 

도로옆에 많은 시설과 민가가 자리한다. 계곡은 이미 이전의 모습이 아니다. 이제는 마을 앞을 흐르는 계곡이 되어간다.  용소에서 잠시 차를  멈추고 계곡으로 내려간다. 

지금은 길이 잘 뚫려 훤하지만 그 옛날엔 안의 사람들도 용추골 사람들을 산중 사람들이라고 불리고, 깊은 계곡의 아름다움으로 인해 진리삼매경에 빠져든다 하여 심진동(尋眞洞)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용소]

 

용의 이야기거리를 가지고 있는 이곳을 지난 물이 용의 형상으로 바위를 파고 흐르며 용소로 떨어진다. 사진 한장에 담을 수 없어 종영상으로 이어 촬영하여 보존한다.

  

[용소 위편의 명품 소나무]
[용추정]

계곡을 내려오다 차를 세우고 외관만 촬영한다.  계곡으로 내려가 계곡과 함게 정자를 보려 하였으나 도로 주변에 큰 공간이 없어 그대로 지나친다. 지금은 옆에 새로이 화장실이 지어져 다소 맘이 상하여 지나갔으리라.

이곳아래로 이동하면 연암 물레 방아 공원이 있다.  

 

[연암 물레방아공원]

연암 박지원이  중국을 여행하면서 목격하였던 여러 과학기술을 안의현감 시절에 시험해보고자 한다.  박지원이 안의현에서 물레방아를 제작하였다는 사실은 자신이 남긴 기록에서는 직접 없다.  그의 둘째 아들 박종채(朴宗采)[1780~1835]가 아버지의 전기(傳記)로 쓴 『과정록(過庭錄)』에서 존재한다고 한다.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안심마을은 산골에 물이 맣은 곳이라,  연암 박지원이 처음으로 물레방아를 설치하여 시험 가동하였던 곳이라 한다.

연암물레 방아 공원도 지나간다. 겨울에는 물레방아에 얼음이 매달려 색다른 풍경를 보여 주었는데 오늘은 철쭉이 만개하여 붉고 초록인 색감이 화사하다.

 

입구에 차를 대고 심원정으로 향한다. 

덕유산을 부리로 남으로 양산맥이 뻗어 세고을 형성하는데, 중앙에 삼진동, 동편에 원학동, 서편에 화림동으로 옛 안음삼동이다. 이들 고을에 삼가승경(三佳勝景)이 있는데, 삼진동에는 심원정, 원학동에는 수승대, 화림동에는 농월정을 이른다.

심원정은 용추계곡 입구의 매표소 바로 우측을 흐르는 지우천 계곡의 제 1담소인 청심담의 거북바위위에 건립되었으며, 심진동 초입에 세운 정자이다.

 

[심원정]

 

1558년 돈암 정지영이 현 위치보다 조금 상류인 덕추폭포 부근에 초가로 건립하였으나 임란 때 소실되었고 1770년에 후손 초계 정씨들이 중수하였으나 풍수해로 훼철된다. 1845년 7세손 정복운 등이 현재의 위치에 재건하였으며 1948년에 중수가 있었다한다. 

[심원정]

심원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이며 단동으로 세워진 중층 누각건물로서 내부는 모두 틔워 경관을 즐길 수 있게 하였다. 배면 쪽의 모퉁이를 틔워 누상으로 오르게 하였는데 현재 계단은 배면 쪽의 자연 암반위에 시멘트로 3단의 계단을 시설하여 사용하고 있다.  4면 모두 기둥의 바깥쪽으로 약 18cm 정도를 연장하여 평난간을 둘렀고 마루에는 우물마루를 깔았다.

천연의 평탄한 암반위에 조성하였으나 암반이 크지 못하여 암반위에는 초석을 쓰지 않았으나 암반이 아닌 부분에는 큰 자연석을 초석으로 사용하고 있다. 기둥은 모두 원주를 사용하였는데 누하주는 직경이 큰 재목을 틀어지거나 울퉁불퉁한 채로 대강 다듬어 사용하였다. 4면의 추녀 끝부분에는 활주를 세워 건물의 안정감을 높였으며 기둥위에는 익공 없이 보아지로 처리하였고 창방과 처마도리 장혀 사이에는 소로를 끼워 장식하였다. 가구는 5량 구조로 대들보위에 동자주를 세워 종보를 받도록 하였고 종보위는 반자를 설치하여 격을 높였다. 좌, 우측면에서는 충량을 대들보위에 얹었는데 충량의 머리부분에는 용두를 초각하였고 가구재에는 모두 단청을 올렸다. 처마에 팔작지붕형식이다.

 

[심원정 과 청심담]

거북모양의 구암이 심원정을 등에지고 청심담으로 향하는 모습처럼 느낀다. 이곳이 정씨의 개인 소유지라 정자 주변에는 그들의 너른 평상들이 자리하고 있고, 수영 금지의 표찰로 인햬 깊은 정감을 맛보지 못한다. 

 

귀가 길은 화림동 계곡을 끼고 달린다. 차창밖으로 언뜻 농월정을 지나 동호정 가는 길에 보이는 정자가 이채로워 길을 멈추어 본다.

 

[화림계곡의 정자]

늘 귀가 길에 망설여 지는것이 더 즐길 것이냐 길을 재촉할 것이냐 이다. 지나는 길에 행락인파가 눈에 띄어 화림동계곡을 차안에서 본다. 그간 눈에 담아둔 그림을 연상해본다. 언제 보아도 다시 차를 멈추게 하는 경관이다. 마지막 본 새로운 정자는 근간에 지은 듯하다. 여느 정자 못지 않게 주변 경관이 멋있다.

머물수  없다는 것이 섭섭하기도 하다. 물가에 앉아 차라도 한잔 하고 싶어진다. 함양은 정자의 고장이라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다. 날을 잡아 함양의 정자만을 한번 돌아보는 여행을 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때는 커피를 보온병에, 의자 하나도 준비하여 머물며 즐기는 기회도 가져보고 싶다. 늘 여행 말미 가보고 싶어지고 아쉬움이 남는 것은 그만큼 보고픈 곳이 많음을 생각하게 되고 또한 해보고 싶은 것이 많아서 일 것이다. 매주 떠도는 것은 나의 업보려니 생각하며, 오늘도 하루를 돌며 나름 새로운 것을 접한 것의 즐거움으로 일상에 복귀하려 집으로 향한다.

 

如一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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