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일흔 여덟번째 - 익산

세종해피뉴스 2022. 5. 14. 18:10

익산의 왕궁리로 향한다. 익산의 왕궁과 미륵사와 제석사가 위치한 익산, 왕궁을 세운 벡제 무왕의 이야기와 왜 왕궁터인데 왕궁으로의 역활은 왜 다 하지 못하였는지 정리해 보려 나선 길이다. 몇차례의 방문을 통해 얻은 지식을  정리해 보고저 하는 마음이다.

익산에는 왕궁터가 있다. 익산은 백제 무왕을 근간으로 이루어진 백제의 왕궁이라고 한다. 백제의 도읍은 그간 한성백제, 웅진백제 , 사비시대로 알고 있었으나, 최근 익산도 짧은 기간 이지만 백제의 새로운 왕궁터가 있었던 곳이다. 한성백제의 왕성 후보지로는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경기도 하남 등이 유력하며, 웅진 시대는 요사이 발굴 공사가 한창인 공주의 공산성안, 사비시대는  부여의 관북리 유적을 유력하게 보고 모두 발굴 조사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궁궐터에는 궁궐,  그리고 왕궁사찰, 산성 등 몇가지가 함께 존재한다고 한다.  익산은 왕궁터와 왕궁사 그리고 미륵사, 제석사지등 호국 사찰과 미륵산성 등을 함께 하며, 부근의 비옥한 농토가 있어 왕궁터로는 손색이 없는 곳이다.

 

[왕궁리 박물관]

지난번 여행시 미륵사지의 박물관만 보고는 미륵사지 내와 왕궁리터를 가보지 않아 익산을 다시 찾는다. 이곳의 박물관은 현재 내부 수리중이다. 왕궁터 에 자리한 오층석탑에서 나온 사리장구가 어째서 이곳이 아닌 미륵사지의 익산 박물관에 전시 되어 있었는지 이제 알게 된다.

 

익산은 '세계문화유산의 도시', '백제의 왕도',라 한다. 백제의 역사는, 한성 백제, 사비, 백제, 웅진백제로 알고 있는데, 이것에 익산을 집어 넣어야 한다는 것이 이 왕궁터의 발굴이고, 이를 있게 한 왕이 백제의 30대 왕인 무왕이다. 무왕은 삼국 사기에  법왕의 아들이라는 설과 삼국유사에는 ' 무왕의 어머니가 과부가 되어 부여 남쪽 연못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그 연못의 용과 정을 통하여 아들을 낳고 이름을 서동이라 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또한  위덕왕, 진위왕의 서자라는 설도 있다.

또한  마를 깍아 내다 팔고, 서동요를 만들어 선화공주를 모함하는 가사로 선화공주와 결혼 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무왕이 사비궁을 수리하고, 왕흥사와 궁남지를 건설하면서도, 익산 천도를 통한 귀족세력의 재편성을 시도하고, , 미륵사를 조성하고 왕권의 확립을 이해 노력한지만 천도를 이루지는 못한다.  무왕은 신라와 대립하여  12번 한강 유역의 회복을 소망하여  전쟁을 하며, 고구려와 수나라가 각축전을 벌일 땐 중립외교를 펼치기도 한다. 사후의 무왕의 능은 신왕리의 쌍봉으로 추정한다.

 

[왕궁터 성벽]

이곳 왕궁터를 둘러본다. 통일 신라 절터인줄 알았는데 발굴 후 이곳이 왕궁터임을 알게된다. 무왕은  630년 무왕 31년  2월 사비 (부여)성을 고치고, 익산을 별도로 경영하여 이곳으로 천도할 계획이었다.

 

[왕궁 성벽]

성벽은  500미터, 폭이 3미터로  기와 무지 성벽 따라 경복궁의 담장 같은 형태로, 동서 234미터,  남북은  길게 492미터로 성벽은 치석된 외벽 막돌을 채워 넣은 궁궐의 담장으로 추정된다. 

 

[후원 정원]

네모난 못과 화려한 조경석과 자갈로 장식한 정원이다. 이곳은 주변을 유리로 된 집을 지어 내부를 보호하고 있다. 이러한 방식을 각동 유물에 적용되었으면 한다. 정원의 존재는 백제 궁성에서 전모가 밝혀진 최초의 사례이다. 이곳도 기암 괴석을 배피하고 물을 흐르게 하고,  주변에 꽃을 가꾸고, 정자를 지어 연못이 딸린 정원을 마련하였다.

 

[저수로]
[저수로]

역U자형 대형수로가 후원에 존재한다.  U자나 역사다리꼴로 땅을 판 후, 잘다듬은 돌이나 자연석을 쌓아 만들고 부분적으로 다양한 크기나 모양의 조경석으로 장식한다. 전체 길이는  450m, 너비는 3~7m, 깊이는 1m정도라 한다.  

 

[후원에서 바라 본 왕궁터]
[왕궁터 모습]

멀리 보이는 두 건물이 화장실이다. 왕궁터내에는 화장실 시설을 갖추고 있슴이 밝혀지고, 뒤를 본 후 해결하는 죽간도 발견된다

 

이곳이 왕궁으로서의 역활을 다 못한 것은, 다음 왕인 백제 31대 마지막 의자왕의 지지 정치세력이 무왕지지 세력과 다르고, 이곳이 아닌 사비성에 자리잡아서  익산이 활용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다.

왕궁터에  자리한 오층 석탑은 통일 신라시대에 이곳 왕궁터 위에 새로운 사찰이 들어섰슴을 알게 하여 준다.

이렇듯 왕궁터에 통일 신라가 궁터를 헐고, 절을 짓고, 탑을 쌓는다. 오층 석탑은 왕국이 자기 역활을 못한 왕궁터에 새로운 절을 지으며 세운 탑인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왕궁리 오층석탑안에서 나온 금제금강경을 통해 알게 된다. 원래 이것은  제석사에 있던 것을 무왕의 지시로 왕궁사로 옮긴 것이다. 

 

[국보 123호 오층석탑]

기단부는 통일 신라의 기단을 쌓는 방식이고, 지붕돌이 넓고 날렵하며 끝이 올라간 형테는 백제탑의 유형이다. 이탑은 통일 신라시대의 후반의 것으로 추정 된다고 한다. 

1965년 왕궁리  석탑 해체. 수리공사시  기단부 석탑의 주춧돌에서 나온 品(품)자형 사리공 속에 국보 123호 청동 방울 ( 지름 3센티) , 국보 123호 구슬 (크기0.3~0.5), 국보 123인 청동여래 입상 (통일 신라시대, 전주 박물관 소장 )이 발견되었다.

 

[국보 123인 청동여래 입상 (통일 신라시대)]
[사리내합과 녹색 유리 사리병]

1층 지붕돌에  두 개의 사리함이 있었고, 금동 사리함 안에는 각각 금동 사리내합이 들어있다.  동쪽 사리내합안에는  녹색 유리 사리병이 나옴.

 

[ 국보 123호인 금제 금강경]

서쪽 사리공의  금제 사리내함은 단순한 형태이나 안에는  금제금강경이 있다.

금강경은 순금으로 제작된 유일한 경본이다. 옻칠 청동 사리함 속에 금으로 만든 내합안에 들어있는, 금으로 만든 한 권의 책으로 두줄의 금띄로 묶여져 있다.  19장의 순금 경판을 연결하기 위해 순금으로 만든 경첩을 사용하였다. 불설 금강반야 바라밀경을 붓으로 쓴 것처럼 두게 0.15미리 미터의 판에 글짜가 두드러져 나오게 새겨 놓았다.

금제 금강경은 백제때 만들어진 것이고, 사리내합의 문양은 동일한 것이 67세기 사비시대 것이고, 연화문은  무령왕릉 의 연화문 내합의 주문양인  연화 서운문 (사비시대)쌍릉의 관장식과 같다.

통일 신라의 오층 석탑에서 통일신라의 불상과 백제의  유물이 동시에 발견되었는지, 통일신라시대 탑에 어떻게 백제의 유물이 있었는지 학계의 관심사 였다고 한다.

 

이는 왕궁터 내의 왕궁사에 서있던 목탑 주춧돌이 석탑의 1층 으로 그대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교토 청년원 천태종에 존재하는 옛 문서 7세기 관세음 응헙기 영적 체험에 벡제 무왕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제석정사가 불타다라는 기록이 있다.  앞서 방문한  궁평마을 제석면  왕궁탑 제석사지가 모두 불타버리고 심초석을 열어 보니 오직 불사리병과 금강반야 칠함만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라는 기록이 있다. 왕궁리 것은 제석사에 것으로 무왕것이 왕궁리로 이전한 것이다. 실제 이것의 크기는 제석사지의 목조탑 심초석의 사리공과 크기가 같다고 한다.

왕궁터를 닦으며 불탄 제석사의 사리를 왕궁사의 목조탑의  심초석에 넣었다가 불탄 이후 오층석탑을 지을때 심초석을 그대로 이용하여  사찰이 들어서고 이때 만든 5층 석탑의  1층기단에는 당시의 불상을 넣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듯 유물의 발견, 조사를 통하여 시간의 변천에 따른 과거에 있었던 역사적 사실들이 규명되는 것이 신기하다.

 

미륵사지에서 발견, 유물을 통하여는 다른 사실들이 알려진다. 우리는 미륵사가 선화공주의 발언에 의해 지어졌다고 알고 있었다.

2009년 1월 14일에 미륵사지 서탑 해체 중 발견된 금동사리함과 639년(무왕 40) 절대연대를 기록한 금제사리봉영기(金製舍利奉迎記)명문에 의해 역사학계에 파문이 일었다. 

 

[금동사리함]
[금제사리봉영기]

금제사리봉영기 명문에는 '우리 왕후께서는 좌평 사택적덕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에 선인을 심어 금생에 뛰어난 과보를 받아 만민을 어루만져 기르시고 불교의 동량이 되셨기에 능히 정재를 희사하여 가람을 세우시고, 기해년(639년) 정월 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맞이했다'라고 적혀있다.

그 결과 미륵사지 석탑의 준공 당시 무왕의 왕비는 선화 공주가 아니라 좌평 사택적덕의 딸인 사택왕후라는 것이 확인된다. 이러한 이유로 선화 공주와의 결혼이 후대에 꾸며진 허구라는 식의 주장이 대두되고 있다. 그러나 역사학계에서는 당대 왕들은 일반적으로 2명의 왕비를 두고 있었다는 것으로 볼때 설화적 요소가 더해졌을 지라도 섣부른 결론을 지양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미륵사지]
[미륵사지 당간지주]
[복원된 미륵사지 동탑]
[복원된 미륵사지 서탑]

백제 최대의 사찰이었던 익산 미륵사는 무왕(武王, 600-641) 대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륵사는 전형적인 1탑1금당의 백제식 가람배치와 달리 세 개의 탑과 금당 등으로 구성된 3탑3금당의 독특한 배치형식이다. 이 미륵사지 석탑은 세 개의 탑 중 서쪽에 위치한 탑이다. 우리나라 석탑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창건시기가 명확하게 밝혀진 석탑 중 가장 이른 시기에 건립된 것이다. 원래는 9층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반파된 상태로 6층 일부까지만 남아있었다. 창건당시의 정확한 원형은 알 수 없으며, 17~18세기 이전 1층 둘레에 석축이 보강되고 1915년 일본인들이 무너진 부분에 콘크리트를 덧씌운 상태로 전해졌다.

남아있던 6층까지의 높이는 약 14.2m이고 상·하 이층으로 구성된 기단의 전체 폭은 약 12.5m이다. 1층은 각 면이 3칸으로 구성되고 가운데 칸에는 문을 내달아 계단을 통해 사방으로 통하게 하였다. 기둥석은 아래가 넓고 위가 좁은 민흘림기법과 양 끝 모서리를 약간 높인 귀솟음기법이 반영되어 있다. 기둥석 하부에는 목조건물에서처럼 별도의 초석이 있고 기둥과 기둥을 연결하는 상ㆍ하 인방석(引枋石)과 기둥 상부에 평방석(平枋石), 포벽석(包壁石) 등이 구성되었다. 옥개부(屋蓋部)는 목조건물의 지붕처럼 모서리 끝이 살짝 치켜 올라가고 가운데가 오목하게 들어가는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고 있다.

 

[미륵사지 서탑]

나의 눈에 새로 만든 탑과 복원한 탑이 다름을 알게 된다 . 새로이 지은 탑에는 간주석이 없지만 오래전의 탑엔  간주석이 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원래 탑을 건설할 때는 간주석이 없었는데 후대에 무너지는 것을 보고 더 붙여 세웠을 것으로 추정하고, 새로이 만든 것은 원형애 가까이 재현 하고저 하여 넣지 않은 듯하다. 서탑을 보면 간주석의 설치가 일정하지 않음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석탑의 1층 내부에는 ‘十’자형 공간이 조성되어 동서남북 네 방향에서 출입이 가능하며, 탑의 중심에는 여러 개의 사각형 돌을 수직으로 쌓아올린 기둥(심주)이 4층까지 연속된다. 이러한 모습은 다른 석탑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이다.

 

2009년 1층의 첫 번째 심주석에서 발견된 사리봉영기(舍利奉迎記)의 기록을 통해 639년이라는 석탑의 건립연대가 명확하게 밝혀졌다.

석탑은 1998년 구조안전진단 결과에 따라 이듬해 해체수리가 결정되었고 2001년 해체조사에 착수하여 2017년 조립공정이 완료되었다 한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은 고대의 목탑에서 석탑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충실하게 잘 보여준다. 또한 고대건축의 실제 사례로써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아 우리나라 불탑건축 연구에서 대단히 중요한 문화재이다.

 

[석인상]
[석인상]

이 석인상은 동물에서 사람으로 변화하는 과도기적인 모습을 보이며, 탑을 수호하는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 된다. 현재 석인상의 표면은 삭박되어 뚜렷한 도상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뭉그러져 있다. 그러나 남서 석인상은 세 방위(서북·북동·동남)에 놓인 석인상에 비해 물성은 약하지만 도상이 뚜렷하게 잘 남아 있다. 탑의 네귀퉁이에 하나씩 돌아가며 서있다.  새로이 조성한 동탑에는 그 원형이 확실하지 않아 복원하지 않은 듯하다.

 

왕궁터와 미륵사지탑의 복원 등 문화재 보호를 위한 발굴 사업을 통한 유물의 발견을 통하여 역사적인 사실들을 규명하여 나가는 일을 알게 되니 흥미가 더한다.

익산의 남은 문화재를 통하여 무왕의 행적과 이곳의 문화재의 연관성을 알게 되며, 익산의 여행의 재미를 가지게 한다.  백제 시대의 제석사가 번창하다 불타 그곳의 사리기가 왕궁터의 목조 탑의 심초석으로 옯겨가고, 목조탑이 불탄 후 그 자리에 오층석탑을 쌓으며 통일신라시대의 청동여래 입상을 넣어 백제와 통일 신라의 물건이 함께 존재하는 수수께기를 풀면서,  이 탑이 오래동안 이곳이 절터로 알려지다 왕궁터로 복원되고, 석탑이 생겨난 일들을 알게 되고, 전설의 선화공주의 설화는 미륵사지 탑안의  금제사리 봉영기를 통하여  왕후가 좌평의 딸로 나오므로써 부인되고. 그래도 미륵사에 대한 설화가  선화공주 일 수도 있겠다는 다른 질문을 남긴다. 예전엔 왕비가 여럿 이었다 하니 혹시 서탑은 좌평의 따님이고 동탑이나 가운데 목탑은 선화공주의 발언으로 세워지지는 않았는지, 아님 선화공주의 발언으로 이루어진 이곳의 서탑은 사택 왕후인 좌평의 딸이 보시한 것은 아닌지 풀어야 하는 숙제를 혼자 추축해본다. 

온전히 다는 몰라도 어느 정도 무왕과 익산에 대하여는 연결 고리를 맞추어 본 것 같다. 구슬을 꾀듯 사실을 찾아 애쓰는 역사학자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그냥 지나치며 사물의 외형 구경으로만 만족했을 것이다. 구슬도 꾀어야 보배라 하는데, 나름의 익산을 들르며 보아온 구슬 같은 경험과 기억이 목걸이가 된 것 같다.  가슴을 피고 집으로 향한다.

 

如一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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