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일흔 여섯번째 - 전주, 완주

세종해피뉴스 2022. 4. 22. 00:01

전주로 길을 들어서지만 오늘의 목적지는 완주의 송광사 이다. 이전 완주 여행시 비어 둔 곳이다. 이곳의 보물만 만나 보아도 한껏 문화재를 보는 흥미를 만족하기 때문이다. 오늘의 전주는 코로나 이전의 모습을 보는 듯 하다. 이제 코로나는 무서운 전염병이 아닌 듯 한 모습이다. 전주로 길을 접어든 것은 한벽당을 눈에 담아 보기 위해서 이다. 전주의 한옥마을 인근은 관람객의 발길이 많아 다소 번잡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한복의 화사함과 젊은 이의 미소가 봄을 더욱 반기는 듯하여 온 곳에  생기 있다. 오늘 이곳은 코로나도 자리를 비어 주었나 보다.

 

 

 한벽당을 중심으로 이곳 저곳을 돌며 정자의 모습을 둘러본다. 이곳서 물길을 따라 전주시내와 연결된 산책로도 잘 정비되어 있다. 승암산 기슭의 이 정자가 오른쪽은 큰다리가 인접하고, 뒤편으로는 터널도 있고, 강변도 인공이 가미되어, 예전의 누각 아래 흐르는 맑은 물이 바위에 부딪쳐 흩어지는 물이 시리도록 차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 한벽당이라는 설과는 멀어졌지먄, 물가의 정자가 보이는 운치있는 전경은 그 이름값을 유지하려 하는 듯하다.

 

[한벽당과 요월대]

누각은 조선 건국에 큰 공을 세운 최담(崔霮)이 태종 4년(1404)에 별장으로 지은 건물이다. 예전에는 호남의 명승지로 시인 묵객들이  찾아와 시를 읊고 풍류를 즐겼으나, 지금은 시민들의 발걸음과 관광객의 관심속에 그 빛을 발하는 것 같다.

 

 

 물가 절벽의 바위 위에 새워진 이곳을 오르려면, 큰 길가에서 접근하는 길은 막혀 있어, 한벽당 밑을 돌아 올라 이 계단을 통하여 들어설 수 있다,  

 

[한벽당]

강 기슭의 고목이 달고 나온 작은 잎들이  녹색으로 작은 잎을 피어 내어 정자를 가리지도 않고, 겨울내 앙상하고 어두운 나무에 초록의 색감을 두르고, 주변과 어울릴 것으로 보고 찾은 기대감을 만족시켜 준다. 환벽당을 눈에 담고, 그곳에서 내려다 보이는 봄의 냇가를 즐기다 완주의 송광사로 향한다.

 

송광사는 종남산 기슭에 있는 통일신라 경문왕 7년(867)에 체징(體澄)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그 뒤 폐허가 되어가던 것을 고려 중기의 고승 보조국사가 제자를 시켜서 그 자리에 절을 지으려고 했지만, 오랫동안 짓지 못하다가 광해군 14년(1622) 응호·승명·운정·덕림·득순·홍신 등이 지었다고 한다. 이후로도 인조 14년(1636)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절의 확장공사가 있었고 큰 절로 번창하였다.

 

[송광사 일주문]

속세와 불계의 경계 역할을 하는 상징물인 일주문은 조선시대에 지은 것이다. 처음 볼 때 일주문이  담장을 가지고  사찰 앞에 있는 것이 마치 양반집 쪽문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원래는 지금의 위치에서 약 3㎞ 떨어진 곳에 세웠던 것인데, 절의 영역이 작아져서 순조 14년(1814)에 조계교 부근으로 옮겼다가, 1944년에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건물은 2개의 원기둥을 나란히 세우고 그 위에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간결한 맞배지붕을 올렸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공포는 용 머리를 조각하는 등 조선 중기 이후의 화려한 장식적 수법을 엿볼 수 있다. 기둥의 앞뒤로 연꽃무늬를 장식한 보조기둥을 세워 안정감을 주고 있으며 앞면 중앙에는 ‘종남산송광사(終南山松廣寺)’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금강문]
[금강역사와 동자상]

일주문을 지나면 금강문이 자리한다. 금강역사를 모시는 문으로 일주문 다음에 있는 문이다.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 건물이다. 지붕 천장을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이고, 천장은 뼈대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연등 천장이다. 앞면 3칸 중에 가운데칸이 출입구이고, 양 옆칸에는 금강역사와 사자·코끼리를 타고 있는 동자상 2구씩을 배치하고 있다.

 

[송광사 당간지주]
[송광사 천왕문]
[ 보물 제 1255호 완주 송광사 소조사천왕상]

사천왕은 갑옷을 입고 위엄이 충만한 무인상을 하고, 동·서·남·북의 사천국(四天國)을 다스리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 초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조선시대에는 사찰입구에 사천왕문을 세워 모시고 있다. 대웅전을 향하여 오른쪽에는 동방 지국천왕(持國天王)과 북방 다문천왕(多聞天王)이, 왼쪽에는 남방 증장천왕(增長天王)과 서방 광목천왕(廣目天王)이 위치하고 있다.

 

송광사의 동방 지국천왕상은, 오른쪽 팔꿈치를 높이 쳐들어 칼을 잡고, 왼손은 엄지와 검지를 길게 펴서 칼끝을 잡으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북방 다문천왕상은 양손으로 비파를 들고 있으며, 남방 증장천왕상은 왼손에는 보주를 잡고 오른손으로 용을 움켜쥐고 있다. 서방 광목천왕상은 오른손을 들어 깃발을 잡고 있는데, 손바닥 위에 보탑을 올려 놓았다. 서방 광목천왕상 왼쪽 머리끝 뒷면에는 조선 인조 27년(1649)에 조성된 것을 알 수 있는 글이 있으며, 왼손에 얹어 놓은 보탑 밑면에는 정조 10년(1786)에 새로이 보탑을 만들어 안치하였음을 알려 주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이 사천왕상은 제작연대가 확실하고 병자호란 이후 국난극복의 강한 의지를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천왕상이 지녀야 할 분노상, 용맹상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어 돋보이는 작품으로 보물 제 1255로 지정되어 있다.

 

[보물 제 1243호 송광사 대웅전]

사찰안으로 들어서면 정면에 대웅전의 화려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대웅전은 절의 중심이 되는 건물로, 기록에 따르면 조선 인조 14년(1636)에 벽암국사가 다시 짓고, 철종 8년(1857)에 제봉선사가 한 번의 공사를 더하여 완성하였다고 한다.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에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대웅전·의창군서’라고 쓰인 현판도 있는데, 의창군은 선조의 8번째 아들이며 광해군의 동생이다. 인조 14년(1636)에 세운 송광사개창비의 글도 의창군이 썼다. 현판은 이때에 쓴 것으로 보이는데 대웅전을 세운 시기를 아는데도 참고가 되고 있다. 다른 건물에 비하여 가운데 칸이 비교적 좁고, 문 위 벽면에 그림을 그려 넣은 것이 특징이다.

건물 안쪽에는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아미타여래와 약사여래를 함께 모셔 놓았다.

 

[보물 제1243 호  송광사 대웅전]
[대웅전 뒷면과 옆면]
[대웅전 뒷면]
[옆면 외벽]

대웅전의 내부로 들어가려하니 큰 부처님 상과 비천상이 건물밖을 가득 메우고 있다.   

 

 

[보물제 1274호 완주 송광사 소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복장유물 (불상 3구, 복장물 2종 6점) ]

 

삼불좌상은 본존불인 석가불을 중앙에 안치하고, 오른쪽에는 아미타불, 왼쪽에 약사불을 배치하고 있다. 무량사 소조아미타불상(5.4m)과 함께 가장 거대한 소조불상(5m)으로, 신체 각 부분이 비교적 조화를 잘 이루고 있는 작품이다. 장중하고 원만한 얼굴과 두껍게 처리한 옷은 당당한 불상양식에 걸맞는 표현기법을 보여준다.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 표현은 강한 인상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는 조선 후기 양식이 나타나기 시작한 시대적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다. 

 

 

[복장유물 불상조성기 3점과 후령통 3점] 문화재청 자료

본존불에서는 삼불의 조성기와『묘법연화경』을 비롯한 불경류, 후령통(喉鈴筒) 등 다수의 복장품이 발견되었다. 『조성기』에 의하면 숭정 14년(인조 5년, 1641) 6월 29일 임금과 왕비의 만수무강을 빌고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있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조속한 환국을 기원하면서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명나라와 청나라의 연호를 함께 사용하고 있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당시의 극심한 혼란기를 극복하기 위한 국난극복의 의지와 역사의식의 반영과 함께 당시의 문화적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이 불상은 만든 연대가 확실하고 역사 의식이 반영된 작품이라는 점에서 귀중한 자료로, 불상과 함께 복장유물 12종 중 불상조성기 3점과 후령통 3점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송광사 대웅전 내부 모습]

[송광사 목조삼전패]

대웅전 삼존불 사이 앞쪽에 있는 나무로 만든 3점의 패(牌)이다. 전체적인 만든 방법과 형태는 같으나 부분적으로는 차이를 보인다. 그중 하나는 높이 2.28m로 앞면에 임금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글씨가 있고, 뒷면에는 조선 16대 왕인 인조 때 조성된 것이란 제작연대가 있다. 다른 2점은 높이가 2.08m로 같으며, 뒷면에 정조 16년(1792)에 수리하였음을 검은 글씨로 기록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불·보살의 명칭을 적은 다른 위패들과는 달리 왕, 왕비, 세자로 조성한 2m가 넘는 대작이다. 여러 장의 목판을 엮어서 만든 것으로 구름과 용을 뚫어새긴 것이 특징이다. 

조각이 정교하고 크기가 크며, 조성된 연대와 수리한 연대를 알 수 있는 작품으로, 대다수 연대를 알 수 없는 불교 목공예의 시기을 정하는데 기준이 되는 중요한 작품이다.

 

[대웅전 벽의 비천상]

대웅전 천장과 벽에는 생동감을 있는 19세기의 작품 비천(飛天)상이 그려져 있는 것이 숨은 볼 거리 이다.

 

[대웅전 불상 뒷벽 불화]

뒤편의 어둠속에서 좁은 공간에서, 시간을 갖고 보지는 못하였으나 여러폭의 불화는 팔상탱화로 추측해 본다. 

대웅전의 옆에는 지장전이 자리한다. 이곳은 명부전으로  소조 지장 보살 삼존상및 권속상일괄이 모셔져있다. 

 

[송광사명부전소조지장보살삼존상및권속상일괄]

흙으로 만든 지장보살은 나무로 만든 연꽃무늬 대좌(臺座) 위에 놓여 있다. 원만한 인상에 눈·코·입 등이 가지런하며, 양 귀는 긴 편이 아니나 큼직하여 근엄하면서도 자비롭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데 양 팔에 걸쳐 옆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오른손은 가슴 높이로 들어 엄지와 중지를 잡고 있으며, 왼손은 무릎 위에 놓고 엄지와 중지를 잡고 있다. 지장보살상 속에서 발견된 기록에 의하여 1640년에 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상 등이 함께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송광사 나한전]

송광사 나한전은 현재 내부 보수 중이다.  효종 7년(1656) 벽암 각성대사가 송광사를 다시 지을 때 같이 지은 것이며, 전체적인 모습으로 볼 때 현재 건물은 20세기 초를 전후로 고친 것이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으로 옆면 지붕선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 건물이다. 또한 지붕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되어있다.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짜맞추어 천장 윗부분을 가리게 꾸민 우물천장이다.

 

[가건물에  봉안 모습]

나한전의 보수 공사로 인하여 옆에 임시 건물을 지어 내부에는 목조 석가여래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16나한과 오백나한·인왕상·동자상·사자상을 모시고 있다.

 

[가건물에 봉안된 모습]

완주 송광사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 및 소조십육나한상 일괄

 

[이전 방문시 원래의 나한전 내부 모습]

[보물 제 2126 호 완주 송광사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 및 소조십육나한상 일괄 예전 모습] 

 

[보물 제 2126 호 완주 송광사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 및 소조십육나한상 일괄 예전 모습]
 
 완주 송광사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 및 소조십육나한상 일괄  27구(불상3, 나한16, 좌우제석천2, 용녀1, 동녀1, 사자2, 장군2), 발원문 7점으로 최근 2021년 6월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후 나한전이 보수에 들어간 듯하다. 지금은 옆에 임시 건물을 짓고 모셔져 있고 나한전은 내부 수리중이다. 이전 방문에 찍어둔 모습과 비교해 본다 . 배치가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완주 송광사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 및 소조십육나한상 일괄’은 1656년(효종 7)에 만들어진 불상으로, 당시 제작된 나한상 중 수량과 규모면에서 가장 큰 작품이다. 참여한 조각승도 이에 걸맞게 30명 이상 참여하였고, 이는 1622년 왕실 사찰인 자수사(慈壽寺)·인수사(仁壽寺) 불상 조성에 참여한 장인 인원수(조각승 13명, 야장(冶匠) 4명)를 능가하는 인원이 참여한 것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제작방식도 당시 유행한 목조와 소조, 채색 기법 등을 두루 활용하여 작가의 재치와 개성이 잘 드러나 있고 작품성도 뛰어나다. 특히 나한상과 동자상을 일체형으로 제작한 작자의 창의성이 돋보이며, 이외 영산회상에 용녀헌주상의 등장은 유례가 드문 것으로, 이는 모든 중생의 성불(成佛)이라는 불교의 대명제를 실천적으로 보여주는 실질적 사례로써 불교사적으로도 의미가 크다.
이 일군의 불상은 제작에 있어 수조각승 무염(無染)의 통솔 아래 조각승들이 1∼4명씩 분담해 제작한 것이 특징이다. 참여 조각승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무염·승일파, 현진·청헌파, 수연파의 조각승들이 참여한 것으로, 이는 자수사ㆍ인수사 불사와 마찬가지로 17세기 대표적 승려 벽암(碧巖) 각성(覺性, 1575∼1660)의 요청에 의한 것으로 그 만큼 이 나한전 불사의 중요성을 가늠케 한다.

[보물 제 1244 완주 송광사 종루]

주변의 연등으로 인해 종루만의 모습을 담는 것이 어렵지만 행사를 위한 준비가 한창이라 스쳐 지난다.

 

[ 십자각 종루]

종을 달아 놓은 종루는 십자각을 가리키는 말이다. 십자각은 열 십(十)자 모양을 하는 2층형 누각이다. 종이 걸려 있는 중앙칸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각각 1칸씩 덧붙여 이루는 모양인데, 지붕 역시 중앙에서 모아지는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다. 가운데 칸에는 종을 두고 목어·북·운판은 돌출된 칸에 각각 보관되어 있다. 마루 밑의 기둥들은 원형기둥과 사각기둥이 섞여 있으며, 위에 기둥들은 모두 원형기둥을 세워 놓았다. 십자각은 보물 제1244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12개의 기둥을 사용하여 2층 누각형태로 일반적이지 않은 모양이다.  이 십자각 내에는 1716년(숙종 42)에 주조한 범종·법고(法鼓)·목어(木魚) 등이 있다.

조선시대의 유일한 열 십(十)자형 2층 누각으로 그 가치가 크다.

 

 

이외 여러 시설과 요사체들이 잇다. 4개인 줄 알고 방문한 이곳에 보물이 모두 5개 된다. 사천왕상, 종루, 대웅전, 소조 삼존불, 나한상 등이다.

한 사찰에 이렇듯 보물을 소장하고 있는 것을 보면 순천의 송광사에 뒤지지 않다고 생각된다. 순천 만큼 아기자기한 멋은 없으나 너른 광장에 배치된 가람이 시원함을 주고 있다. 

송광사를 나선다. 오늘 이곳은 관람객이 그리 많지 않다 . 모두들 여행지를 정함에 나름 이유가 있겠지만 이곳이 한산할 것으로 생각한 것이 적중했다. 천천히 사찰 경내를 둘러보고 길을 나선다.

늦은 시간이 아니어서 한곳을 더 방문하여 보려 한다. 사찰의 해설사 집에서 완주의 관광안내도를 탐색하다가 되재성당을 알게 된다, 이따금 여행중에 맞이하는 성당을 방문하지만 모습이 특이한 성당이라 생각하며 집으로 가는 길에  들려본다. 

 

[되재성당]

안내문을 통하여 이곳을 알아본다. 되재성당은 1895년 한국 천주교회에서 서울 약현성당에 이어 두 번째로 완공된 성당으로 한강 이남에서는 처음 세워진 성당이며, 최초의 한옥성당으로 추정도하 있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 성당건물이 전소되었고, 그 자리에는 1954년에 다시 세운 공소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되재성당은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세워진 성당 건물이며 동시에 최초의 한옥 성당이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완주군 화선면에 자리한 되재고개가 있는 이곳 지역 명칭을 그대로 성당이름으로 삼은 듯하다. 차도가 없으면 찾기도 힘든 이곳에 웬 성당이라 생각하며 찾아본다. 조선후기 천주교 박해로 인한 산골로 찾아든 신자들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 진 것 같다. 

 

[되재성당 종탑과 건물]

우리는 유럽이나 북미를 방문시 그곳의 성당건물을 보며 감탄하고 찬사를 보낸다. 우리의 사찰이 문화재이듯 그들에게는 성당이 그런 것이라 생각된다. 화려하고 웅장하지는 않지만 한옥으로 지어진 이 성당이 주는 모습은 왠지 멋스럽게 느껴진다.

 

[성당의 내부]

성당내부는 남녀의 구별을 위해 가운데 칸막이 시설이 있다. 처음엔 남녀가 유별 하여 이러한 구조를 가졌나 보다. 예전에 갓쓴 모습 또는 한복 차림의 남자와 머리띄 두른 한복 입은 아낙네들이 마루바닥에 앉아 미사를 보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성당의 내부]
[성당의 옆면]

이 성당은 서양의 바실리카식 교회건축양식을 한식 목구조로 번안한 한옥성당으로서 새로운 문화의 토착화 과정을 보여주는 최초의 한옥성당으로 추정하고 있다. 1895년에 세워진 되재성당의 본디 보습은 제8대 조선교구장이었던 뮈텔주교(Gustave Charles Marie Mutel)의 일기와 사진자료 등을 통해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다. 본디의 성당은 한식 목구조의 단층건물로서 지붕은 기와를 얹은 팔작집이었으며 평면은 장방형 평면으로 종축상에 제단과 출입구를 배치하여 제단으로 향하는 공간의 깊이를 확보하였다.

남녀 구분하여 입장하는 옆문중 왼편이고  남자가 사용하는 출입문으로 쓰인다. 여자는 반대편에 문이 세개 있다. 문을 세군데가 둔것은 입장 부터 남녀 뿐 아니라 노소, 계급간에도 구별이 있지 않은지 생각해본다. 초기에는 이곳의 전통과 융화하려는 했다는 것을 건물에서 느껴 본다.

 

 

 종탑이 모양이 서부영화에서 본듯하다. 조용한 이곳 마을에 자리 잡아서 인지 주변에는 축사가 자리한다. 축사의 냄새가 느겨지고 인근 마을 이 있는데, 사찰과 달리 성당이 마을에 자리한 것이 어색하지 않게 느껴진다. 오늘은 누정, 사찰에 , 그리고 성당까지  저마다 그 역활은 틀리지만,  오랜간 자리를 지키며 우리에게 문화재로의 가치와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을 듣고 다닌다. 이 소리를 들으려 나름 힐링하며 다니는 것이 여행의 멋이라 생각해본다.  내눈을 즐겁게 해주고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 것들에 감사하며 집으로 향한다.

 

如一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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