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일흔 네번째 - 논산

세종해피뉴스 2022. 4. 12. 20:25

익산 왕궁리를 다시 방문해 보려고 길을 나선다. 

지난번 익산의 박물관을 통하여 본 유물과 백제의 역사속에 하나의 왕궁으로 자리 잡은 익산에 관하여 총정리 해 보고 싶어서 이다.

왕궁리로 향하는 길에 지난번 논산 여행 에서 찾지 못한 누정을 찾아본다.

지금은 논산인 강경의  금강을 가로 지르는  황산대교 옆 강어귀에는 임리정 과 팔괘정 누각이 자리한다.

 

[팔괘정]

팔괘정 이라는 누정의 입구에 산수유가 꽃을 피어 누정을 돋보이게 한다.

            

[팔괘정이 측면]

팔괘정은 강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언덕에 자리한다. 정자의 옆에는 커다란 암석이 자리한다.

 

[바위]

자채가 우람하고 힘있어 보이는 암벽바위에는  송시열이 새긴 '청초암', '몽괘벽' 등의 글자가 있다.  바위는 강언덕에 길게 발을 뻗고 있는데, 예전에 강 물길이 이 바위 밑을 흘렀다면 팔괘정에서의 모습은 정말 운치 있으리라 생각된다.

 

[바위 아랫부분]

바위 옆 암벽 을 따라 가다보면  밑부분의 앞에는 건물이 있고, 정자앞 언덕 옆에도 가옥이 있어 온전한 정자를 지을 때의 운치는 상상으로 그려본다. 정자가 자리하고 그 곳에서 보는 모습 못지 않게 강의 배에서 올려다보는 경치가 절경이었을 것 같다.

 

[팔괘정의 후면]

건물 뒤에서 보면 오른쪽에는 너럭바위가 쉼터를 제공하고, 앞에는 강이 훤히  내려다 보인다. 

정자와 바위 암벽 사이에는 대나무가 자리하고 있다. 이 대나무가 없었다면  바위와 정자가 만들어 내는 풍광이 강과 어울어져 더욱 멋진  장면을 만들수 있을 터인데,  상상으로 대나무를 건물 뒤편으로 옮겨본다. 강이 훤히 보이도록 앞이 터있고, 뒤는 대나무 숲으로 아늑하게 가려지고, 옆은 강쪽으로 이어진 바위가  보이고,  멋진 모습이다.  앞의 건물이 원망스럽다. 

 

 

팔괘정은 조선 인조 4년(1626)에 우암 송시열이 지었다고 전하는 정자로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를 추모하며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기르던 곳이다.
금강변에 남향으로 세워졌으며, 앞면 3칸·옆면 2칸의 규모이다. 왼쪽으로 2칸은 넓은 대청마루로 하고 오른쪽 1칸은 온돌방으로 꾸몄다. 지붕은 화려한 팔작지붕으로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이다.
건물 안에는 시를 쓴 현판이 걸려있다 한다. 

 

[앞에서 본 팔괘정의 정면 모습]
[전망대]

팔괘정에서 등산로를 따라 조금만 오르면 등대처럼 보이는 전망대가 있다. 나선형의 계단을 따라 오르면 강경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망설이다 오른 길인데  정말 잘왔다는 생각이다.

 

 

위에서 내려다 본 팔괘정은 정면 아래 발밑에 지붕만이 보이고, 바로 앞쪽에 발길을 이을 임리정이 서원 뒤편 나무숲에 자리한다.  송시열은 스승 기장생이 임리정을 건립하고 강학을 시작하자 스승과 가까이 있고 싶어 조금 덜어진 곳에 팔괘정을 지었다 한다. 

        

 

황산 대교밑으로 예전에 이곳 강경까지 오르내리는 배가 다녔을 것이다. 강경이 생선 젓갈을 담아 내륙으로 보내는 길목임을 느끼게 한다.

 

 

강변을 정화하여 위락시설을 만들은 모습이 보인다. 여름에는 이곳이 수상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장소임을 알 수 있다.

 

[강경읍]

팔괘정에서 약 150 미터 정도 이동하면 임리정이 있다. 스승의 곁에 머물고 싶어서 라는 예전의 스승에 대한 존경심을 알 수 있다.

그 곳으로 발길을 옮긴다.

 

[죽림 서원]
[죽림서원]

전망대를 나와 임리정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한  죽림 서원이다.

이 서원은 인조4년 창건으로 옛 논산의 지명이 황산이었기에 황산서원이라 하였다가, 현종 5년 에 죽림서원의 사액을 받는다. 대원군의 서원 훼철시 철폐되었다가 1946년 제단을 설치하고, 1965년 사우를 복원한다.  송시열이 쓴 '죽림서원 묘정비'에 의하면 황산의 위치가 호서와 호남의 중간에 위치하여 이 곳에 서원이 들어섰다고 한다. 사우에는 죽림사라는 현판이, 사당 앞 좌우에는 공적비, 중건비가 있다. 제향인물은 조광조, 이황, 이이, 성혼, 김장생, 송시열 등 6인을 제향하여 육현 서원으로도 불렸다 한다.

 

[임리정 정면]

임리정은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정자 양식을 보여 주는 건축물이다.  조선 인조 4년(1626) 사계 김장생(1548∼1631)이 지은 정자로 학문을 닦고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원래의 이름은 황산정이었으나 “깊은 못가에 서 있는 것과 같이, 얇은 얼음장을 밟는 것과 같이, 자기의 처신과 행동에 항상 신중을 기하라”라는 『시경』의 증자의 구절을 따서 임리정이라 이름을 바꾸었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 집이다. 앞면 3칸의 기둥 사이를 같은 간격으로 나누어 왼쪽 2칸은 마루를 깔아 대청으로 하고 오른쪽 1칸은 온돌방을 두었다. 뒤쪽으로는 사랑방을 2개 꾸며 사람들을 맞이할 수 있게 하였다.

 

[임리정 후면]
[임리정의 측면]
[임리정 후면, 앞쪽이 금강]
[임리정기비]

앞마당의 '임리정기비'는 김사영이 글을 짓고, 김영목이 써서 1875년(고종 12년)에 세운 것이다. 비에 남긴 글을 읽고 기리기는 지식이 짧아 엄두가 나지 않아 참아본다. 임리정과 죽림서원의 창건에 대하여 적은 글이라 한다는 것으로 만족해본다. 

오늘의 목적지인 익산으로 향하다. 찾아본 두 누정을 보며 스승에 대한 제자의 존경심,  후학을 가르키기 위한 노력, 강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정자를 짓고, 책을 읽고 세속의 삶을 지켜보며 생활한 선비의 삶을 옅보게 된다. 

눈 호강하고  충청에서 많은 흔적을 볼 수 있는 송시열을 궁금해 하며 논산을 벗어나 익산으로 향한다.

 

如一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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