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일흔 다섯번째 - 진주, 하동

세종해피뉴스 2022. 4. 16. 22:11

오늘은 꽃구경 간다. 먼저 진주로 향한다. 남도 꽃구경에 매화는 늦었으리라 생각하며 진주서 길을 잡아 하동 그리고 시간이 닿으면 구례로 돌아 귀가 하려한다. 

그래도 여행의 목적이 문화제 탐방인지라 진주의 유명사찰인 청곡사로 향한다.

 

 

함양을 지나는 길부터는 벛꽃이 눈에 들어온다. 산중에도 길가에도 하얗게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벌써 이따금 부는 바람에 꽃비가 내리니 가는 동안에도 눈호강을 한다.

이곳과 고성 일대, 창원, 진해는 벛꽃이 한탕이겠구나 생각하며, 청곡사로 향한다.

 

 

주차장에서 보이는 사찰로 길을 따라 걷기로 한다. 오늘은 일주문을 지나 사찰을 방문하여 본다. 입구의 저수지에 비치는 여린 잎을 가진 나무의 반영이 눈에 들어온다.

 

[청곡사 일주문]
[청곡사 전경]

청곡사는 통일신라 헌강왕 5년(879)에 도선국사가 세웠으며, 임진왜란 때 완전히 소실된 것을 광해군 때 다시 세웠다.

 

[청곡사 사리탑]
[사리탑 앞 석탑]
[대웅전]
[대웅전 옆면]

먼저 대웅전을 들어선다.

 

 

2010년 12월  지정된 보물 제 1688호 진주 청곡사 목조 석가여래 삼존 좌상이 있다. 

 

진주 청곡사 대웅전에는 목조로 만들어진 석가모니불좌상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문수보살좌상이 우측에는 보현보살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현재 이 삼존불은 제작 당시에 기록된 자료가 발견되지 않아 제작자 등의 불상에 대한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건륭 15년(1750)에 기록된 ‘불사동참결연작복록(佛事同叅結緣作福錄)’에서 “만력사십삼년을묘불상조성(萬曆四十三年乙卯佛像造成)...” 이라는 불상의 제작연대가 적혀있어 1615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본존의 석가모니불좌상은 신체비례가 알맞고 자세가 안정감 있다. 머리는 둥근 복발형에 높게 솟은 정상계주와 중간계주가 표현되어 있다. 방형의 상호는 이마가 넓고, 반개한 눈과 넓고 편평한 코, 굳게 다문 입술 등이 조화를 이루어 엄정한 인상을 풍긴다. 볼과 턱에는 적당히 살이 올라와 있으며, 두툼한 귀는 턱까지 내려와 있어 전체적인 상호가 원만하다. 넓은 어깨의 네모난 상체를 가졌지만 가슴은 편평하고 아랫배는 부풀어있다. 수인은 오른손을 무릎아래 살짝 내리고 왼손은 오른발 위에 자연스럽게 올려놓아 손가락을 구부린 항마촉지인을 결하고 있다. 하체는 오른발이 왼쪽 무릎위에 올라온 결가부좌로 넓고 낮아 안정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착의는 변형의 편단우견이며 가슴까지 올라오는 승각기는 의대(衣帶)로 묶어 꽃잎형 주름이 나타난다. 왼손에서 내려온 소매자락은 무릎위에 올려진 오른발을 덮고 왼쪽 무릎 위에 꽃봉오리 모양을 이루었다. 다리위에 흘러내린 대의자락은 양 다리를 감싸고 4단의 부채형 주름으로 표현되었다. 좌·우협시인 문수·보현보살좌상은 좌·우 수인의 위치와 좌·우 어깨를 덮는 이중착의 형식만 다를 뿐 상호와 신체비례 등 전체적인 조형은 본존과 동일하다. 각각의 두 보살좌상의 상투는 높은 편이며 귀를 휘감은 보발은 귀 뒤쪽을 타고 내려와 어깨 위에서 조그만 원을 중심으로 두 개의 타원을 형성하고 세 가닥으로 나뉘어 흘러내렸다. 보관은 높고 섬세하게 표현되었으며 이와 반대로 보살좌상의 영락장식은 단순하게 작은 귀걸이와 팔찌만 표현되었다.

청곡사 목조석가여래삼존불상의 제작자는 관련 기록이 현전하지 않아 알 수 없지만 상호의 표현과 신체의 비례, 착의의 표현 등이 1629년 조각승 현진이 조성한 관룡사 목조석가여래삼불과 유사하다. 청곡사 삼존불좌상은 현진작 불상 중에서 앞서 조성된 1612년 월명암 목조아미타불좌상보다는 얼굴이 편평한 방형으로 바뀌며 당당한 신체표현의 변화가 나타난다. 하지만 이후 제작된 관룡사 삼불좌상 보다는 형식화 되지 않았으며, 옷주름의 표현 등이 자연스럽고 상호의 모습도 안정되어 있다. 또한 본존은 170cm의 대형 불상으로 현전하는 현진 작 목조불상 중에서 비교적 큰 규모를 자랑하는 수작(秀作)으로 현진의 양식연구에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문화제청 자료]

 

 대웅전의 입구에는 또다른 보물이 자리한다. 보물 제 1232호 지주 청곡사 목조 제석천 . 대범천의상이다. 기억에는 이곳 박물관에 괘불과 함께 있었는데 대운전 안에 새로이 제작한 듯한 깔끔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제석천과 대범천은 원래 브라만 또는 힌두교의 신상(神像)이었으나, 대승불교 이후 불법을 지키는 신상이라 여겨 사천왕상 등과 더불어 불교미술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왔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는 조각상이 아닌 그림으로 그려졌다고 전하며, 조선시대 탱화에서 주로 예를 찾아볼 수 있으나 조각상으로는 청곡사의 것이 유일하다.

 

[보물 제 1232호 지주 청곡사 목조 제석천 . 대범천의상]

사천왕상이 위엄을 나타내는 무서운 인상임에 비해 제석·대범천상은 보살상같은 자비로운 인상이다. 탱화의 경우 보살은 양손에 물건을 들고 그 기능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과 얼굴이 금색인데 비해, 제석천과 대범천은 두 손을 합장한 경우가 많고 얼굴에 호분으로 흰색을 칠하고 있다.
청곡사의 것은 탱화의 일반적인 특징과는 다르게 입체감을 나타낸다. 양 손은 합장이 아니며 옷주름도 보통 탱화의 것과는 다르다. 회화로서는 조선 후기 불교그림에서 흔히 찾을 수 있지만, 홀로 있거나 새겨져 있는 것은 청곡사의 것이 처음이다.

 

[이전에 성보 박물관 전시품]

조각기법은 조선 후기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중국이나 일본에서 만든 예와는 현저한 차이를 나타내어 우리나라의 양식적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대웅전에 모셔져 있는 것이 진품인지는 확실하게 알아보지 못하였다. 이날 청곡사의 성보 박물관이 휴관 중 이었다.

 

[업경전]

 업경전은 청곡사를 세울 당시 대웅전 옆에 부속 건물로 지었는데 조선말 포우대사가 보수하였다.
명부전·지장전이라고 불리우는 업경전은 앞면 3칸·옆면 1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새 날개 모양으로 짠 익공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안쪽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천장 속을 가린 우물천장이고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10명의 명부왕을 모시고 있다.

청곡사 업경전은 다른 사찰의 명부전과 같이 지장보살을 비롯해 시왕 등 명부의 존상들이 봉안된 전각이다. 업경전에는 불단에 지장보살좌상을 중심으로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인 지장보살삼존상이 자리하고 좌우로 시왕, 귀왕, 판관, 인왕 등 총 21구가 배치되어 있다.

 

[보물 제 1689호 진주 청곡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

지장보살좌상은 무릎이 높고 폭이 넓어 앉은 자세가 안정감이 있으며, 의자상의 시왕과 범천·제석천상 등도 의자에 허리를 기대고 무릎을 내려뜨린 자세가 다양하고 자연스럽다. 지장보살좌상은 이중으로 대의를 걸쳤으며, 드러낸 가슴 아래에는 승각기가 가로지르고 있다. 옷주름은 상체의 대의자락은 간략하게 직선으로 양감 있게 처리한 반면 하체의 옷주름은 곡선을 살려 장식적면서 볼륨감을 살려 두텁게 표현하였다. 장식적인 곡선의 옷주름 표현은 도명존자의 가사나 시왕의 무릎의 옷주름 등에서도 찾을 수 있다. 어린아이와 같은 상호와 신체비례와 달리 두 손은 여성스럽게 가늘고 길게 조각하였다.

 

[보물 제 1689호 진주 청곡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

지장보살삼존상을 포함해 시왕상 및 권속을 살펴보면, 일반적으로 좌상의 지장보살은 입상이나 의자상인 다른 권속보다 크게 조성해 위용 있게 표현하지만, 청곡사 지장보살좌상은 도명존자와 무독귀왕, 시왕 등과 비슷한 크기로 주존을 제작하였다. 모든 존상의 상호는 둥근 얼굴형에 두 눈은 눈꼬리가 길게 빠졌으며, 코는 높고 콧등이 반듯하고 입술은 작아 아이 같은 인상을 준다. 각 존상의 비례를 보면, 전체적으로 신체에 비해 두부를 크게 제작하였다. 특히 무독귀왕, 시왕 및 권속 등은 쓰고 있는 관모가 높아 3등신의 신체비례를 하고 있다. 신체는 어깨가 둥글고 좁지만 상체와 하체를 양감 있게 처리하였다.

 

[보물 제 1689호 진주 청곡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

2010년 12월 보물로 지정된  보물 제 1689호 진주 청곡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은 청곡사 업경전에 모셔져 있다.

지장보살좌상에서 발견된 발원문에 의하면, 이 상들은 1657년에 조성되었다.
이 상을 조성한 조각승은 인영(印迎), 탄준(誕隼), 지변(智邊), 학염(學廉), 서명(瑞明), 법율(法律), 종탄(宗誕), 선우(善祐) 등으로 청곡사 업경전의 상들을 제외하고는 현재 이들이 조성한 다른 불상은 알려지지 않았다. 청곡사 불상은 비록 17세기에 활동한 여러 조각승의 불상과 계통이 연결되는 요소가 없는 독특한 조각 형식을 하고 있으며, 상의 전체적인 조형미가 뛰어나고 조각 수법 또한 우수하다. [문화재청]

 

성보 박물관의 휴관으로 이전의 방문시 감동하였던 괘불을 볼 수 없었으나 이전의 감동을 되새기며 옛 자료를 찾아 올려본다.

 

[국보 302호 청곡사 영산회괘불탱]

1997년 국보로 지정된  청곡사 영산회 괘불탱은 성보 박물관에 실재애 길게 걸어둔 상태로 보존되고 있다. 여행 중에 많은 괘불이 괘불함에 보관 되어 그 모습을 볼 수 없었으나. 이곳은 따로이 전시관을 만들어 괘불을 펼쳐 걸어서 전시하고 있다. 양산 통도사의 성보 박물관의 규모는 아니나 처음 접할시의 감동은 계속 남아있다. 온습도를 맞추고 조명을 해결하여 사찰마다 괘불을 걸어두는 박물관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져 본 곳이다. 

 

이괘불은 석가가 설법하는 장면인 영산회상도를 그린 괘불이다. 괘불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불교그림을 말한다.
길이 10.4m, 폭 6.4m 크기의 이 괘불은 본존불인 석가를 중심으로 양옆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배치되어 있다. 화면 중심에 꽉 차게 배치되어 있는 석가는 얼굴이 둥글고 원만하며, 예배자의 시선을 의식한 듯 당당하게 표현하였다. 두 어깨를 걸친 옷은 중후하게 묘사하였고, 가슴 중앙에 ‘卍’ 자를 크게 그려 넣어 눈에 띈다. 옷은 붉은색과 녹색으로 채색하였고 옷깃에도 변화를 주었으며 전면에 걸친 꽃무늬 장식이 밝고 선명해 보인다.

석가 좌우에 있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은 연꽃가지를 들고 서 있다. 본존보다 약간 작은 신체, 화려한 보관, 둥근 얼굴, 정면을 향한 자세 등이 매우 당당하고 화려하며 본존 뒤로 물러서게 배치해 원근감을 나타냈다. 청색, 하늘색, 연분홍색 등이 다양하게 나타나고 복잡하고 화려한 꽃무늬와 장신구가 보살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보살의 머리 위에는 석가의 제자인 아난, 가섭을 비롯해 여러 불상이 그려져 있다.
조선 경종 2년(1722)에 승려화가인 의겸(義謙) 등이 참여하여 제작된 이 괘불은 석가불, 문수보살·보현보살을 화면 가득 배치한 구도, 당당하고 건장한 체구, 둥글고 원만한 얼굴, 화려하고 밝은 색채와 꽃무늬 장식 등에서 18세기 초반의 불화 가운데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된다. 석가·문수·보현의 삼존불입상이라는 점에서 예천 용문사의 괘불도와 비교되며, 의겸의 작품 가운데 가장 우수한 작품 중 하나로 여겨져 불교회화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되는 매우 가치있는 작품이다.

 

국보와 몇 보물이 전시된 성보 박물관은 휴관증이다. 진주 청곡사 목조여래삼존조좌상 좌대 보존 처리를 위해서 이다. 굳게 닫힌 문에 아쉬워 하며 외부 촬영한 모습을 전한다.

 

[할매산신각]

특이한 것은 이 산신각의 할머니 산신령이다.  한국절의 산신령은 수염이 하얗고 머리도 하얀 할아버지 산신령들이었다.  그러나 청곡사 산신령이 할매산신령이다.  할머니 산신령이 월아산을 지키고 있다.

 

[할매산신]

 

나한전을 둘러본다.

 

[나한전의 나한상]
[범종각과 박물관]
[청곡사 벛꽃]
[섬진강가의 벛꽃]
[섬진강가의 벛꽃]
[하동 구길의 벛꽃]

청곡사를 나서  하동으로 길을 잡는다. 가는 길의 진주시도 도로변은 벛꽃이 만개했다.  혹시  하동의 매화가 꽃을 달고 있을가 생각해 본다. 도착하니 벛꽃이 한창이다. 매화는 벌써 지고 없는데 벛꽃이 한창이다. 차로 강변을 한바퀴 돌며 꽃비를 맞아본다. 구례로 길을 잡아보려 하였으나 차로가 막혀 움직이도 않고 있다. 답답함에 길을 돌아 산청 쪽으로 길을 잡는다. 길이 순조 롭다. 오늘은 길을 멀게 잡고, 마지막 길막힘까지 있는 여행 이다. 그래도 올해도 벛꽃구경은 하였구나 하는 말씀을 듣는 것으로 만족한다. 긴 여행이 피곤하여도 지나 온 여행지를 정리해 보는 즐거움을 맛보기 위해 집으로 향한다. 

 

如一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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