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일흔 번째 - 논산

세종해피뉴스 2022. 3. 15. 21:12

논산으로 향한다. 오늘은 논산에 보존되어 오는 돌다리 3형제를 모두 보려 한다. 보물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우리의 실생활에 가장 필요하고, 많은 사람이 이용하였던 문화재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유산이다. 이전에 원목다리와 강경미내다리는 지나며 몇번 탐방하였으나, 이번 기회를 통하여 그간 가보지 못하였던 석성수탕석교를 보려한다. 

 

 [반야사]
[반야사 뒤편동굴입구]
[동굴 법당 입구]

논산에 자리한 동굴법당이 있는 반야사로 먼저 향한다. 이 사찰에 대한 정보는 없으나 동굴 법당을 가지고 있어 요즘 핫 한 플에이스이기 때문이다. 예전의 광산을 활용하여 사찰을 중수 한 것으로 알게 되지만 사찰의 중수나 동굴 법당에 관하여는 알고 있는 것이 없다. 이것을 기회로 앞으로 동굴 법당이 있는 곳을 찾아다니기 위한 첫 걸음으로 삼고저 한다. 

삼전리 동네 입구를 통과하여 사찰로 향하는 길은 넓지는 않고, 아직은 정비되지 않은 맨 땅이지만 비교적 넓은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사찰로 올라서면 대웅전 건물이 절벽 앞에 자리한다.

 

[동굴 법당 입구]

대웅전 뒤 로는 두군데의 지하입구가 있는데 그 중 한 곳으로 들어서는 동굴 법당 입구가 나온다. 입구로 법당을 향하는 곳은 안전과 편익을 위해 잘 정비되어 있다.

 

[동굴법당 내의 천수 천안 보살 좌상]
[ 산신상]
[동굴의 전망대]
[ 동굴 내 연못의 유아독존불]
[유아독존불]

법당 두갈래로 갈리는데 한곳은 깊지 않은 굴에 천수천안불이 자리하고 다른 한곳으로 들어서면 산신상이 자리한다. 산신상 옆으로 길게 난 굴은 한쪽 벽으로 연못이 흐르고 그곳에는 유아독존불이 연못 한 가운데 자리한다. 동굴 법당의 특성일 듯한 조명이 법당 내를 신비스럽게 하고 있다. 그리 크지 않고 있다. 이 곳의 끝 부분은 계속 이어지는 동굴의 입구 부분일 듯 하다. 아마도 법당터는  채굴 하던 곳이 아닌 채굴을 준비하던 공간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법당의 마지막 부분의 팬스 뒤는 탄광으로 들어가는 입구로 검은 동굴로 자리하고 있다. 무한한 개발이 가능하리라 본다. 내부로는 진입이 불가하여 전망대에서 내부를 상상해 본다. 돌아나오는 길에 느끼지 못한 실내온도가 입구로 향하니 썰렁하다는 느낌으로 차이를 느끼게 한다.  입구에는  법당으로 가는 길이 아닌, 예전 탄광으로 내려 가는 곳인 듯 안으로 볼 수 있는 판으로 격리하여 안을 볼 수 있게 한다.

다리로 향하기 이전 명재고택을 찾아본다. 

 

 [명재고택 입구]
[명재고택]
[명재고택]
 [명재고택과 장독]
 [명재고택 안채입구]
[명재고택] 

 

고택의 입구에 당도하니 차량 몇 대가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아직 봄의 느낌이 들지 않지만 연못의 물이 녹아서 꽃샘 바람에 윤슬이 빛을 발한다.

가지에 잎이 달리지 않은 나목으로 인해 볼 수 있는 고택의 모습이, 이 시기에 고택을 보는 또 다른 즐거움이 아닐는지. 고목 사이로 모습이 들어난 고택이 눈을 즐겁게 한다.

 

이곳에는 아직 후손들이 생활하고 있어, 안채는 출입이 금지 되어 있다. 이 명재고택은 조선 숙종 때의 학자인 윤증(1629∼1714)이 지었다고 전하는 집이다. 후대에 수리가 있었던 듯 하며, 그 세부기법은 19세기 중엽의 건축양식을 보이고 있다. 노성산성이 있는 이 산의 산자락에 노성향교와 나란히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높은 기단 위에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의 사랑채가 있고, 왼쪽 1칸 뒤로 '一' 자형의 중문간채가 자리잡고 있다. 중문간채는 안채가 바로 보이지 않도록 1칸 돌아 들어가게 중문을 내었다. 중문을 들어서면 'ㄷ'자 모양의 안채가 있어서, 중문간채와 함께 튼 'ㅁ'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집 앞에는 넓은 바깥마당이 있고 그 앞에 인공연못을 파고 가운데에 원형의 섬을 만들어 정원을 꾸몄다. 또한 안채 뒷쪽에는 완만한 경사지를 이용하여 독특한 뒤뜰을 가꾸어, 우리나라 살림집의 아름다운 공간구조를 보이고 있다. 모든 건축부재의 마감이 치밀하면서 구조가 간결하고 보존상태도 양호한 조선의 양반주택으로 중요하다. 지정 당시 명칭은 '윤증선생고택(尹拯先生故宅)'이었으나, 조선 숙종 때의 이름난 유학자 명재 윤증(1629-1711)이 지었다고 전하는 가옥인 점을 반영하여 그의 호를 따라 ‘논산 명재 고택’으로 지정명칭을 변경(2007.1.29)하였다.

 

 [노성향교]

 노성향교가 이웃하고 있다. 입구가 잠겨 있어  담장 넘어 내부의 모습을 살펴본다.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노성향교는 본래 지금의 노성초등학교 자리에 세웠다고 하나 세운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 없고, 1700여 년경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세웠다. 단지 조선 인조 9년(1631)에 대성전을 보수하였다는 명륜당 현판의 기록으로 보아 오래된 건물임을 알 수 있다. 현재 대성전, 동재, 서재, 삼문 등이 남아 있다. 대성전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건물로 안쪽에는 공자를 중심으로 증자·맹자·안자·자사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동무에는 송나라 1현(賢)과 우리나라 9현을, 서무에는 송나라 1현과 우리나라 9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이곳에서는 해마다 음력 2월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주변에는 권리사와 노성산성이 있으며, 명재고택을 지나 노성산성으로 가는 길인 노성산설길은 언덕위의 애향공원에서 차로는 가지 못하고 걸어서 가도록 되어 있다. 

 

충남 논산에는 3개의 유명한 돌다리가 있다. 조선시대 충청도와 전라도를 연결했던 미내다리, 은진과 강경을 연결한 원목다리, 그리고 부여의 석성과 논산의 은진을 잇는 석성 수탕석교로이다. 앞서 미내다리와 원목다리는 반원형의 교각으로 방문한 경험이 있어  수탕석교를 찾아나선다.  넓은 성동 뜰로 농사일을 나가는 마을 사람들을 위해 축조다리가 수탕석교(水湯石橋,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83호)이다. 미내다리와 원목다리는 미적으로 완성도가 높고 접근성도 좋아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가 됐지만 수탕석교는 논산 사람들도 잘 모르는 듯하다. 

 

[석성 수탕석교]
[수탕석교 상판]
[수탕석교  교각과 기둥]
 [교각과 기둥 모양]
 [수탕석교]

성동면 원북리 석성 수탕석교로 향하는 길이 정비 되지 않고, 큰길에서 진입하는 곳은 흙길로 승용차로는 진입이 어려운듯 하고, 둑방에 올라서도 차를 돌리기도 힘들다. 한 100여 미터를  석정천 천변둑을 향해 걷는것이  좋다. 다리를 보며 이곳에 왜 이러한 것이 존재해야 했을까 궁금해 본다.  다리앞에 서있는  안내판을 통하여 이곳의 내력을 알아본다. 다리옆에는 중수비가 세개 존재한다 . 수탕석교 중수비에서 ‘석성 수탕석교’로 기록돼 있고, 1740년(건륭 5년 10월)에 다리를 보수한 사실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문화재이다.

상판이 커다란 돌로 되어 있고 다리의 교각 부분이 '표'자 구조로 되어 있다. 길보다 밑에서 존재하는 기둥과 교각을 살펴보려,  밑으로 내려 서니 다리 밑이라 습해서 바닥이 질다. 처음 보는  다리의 교각이 신기롭고 구조가 너무 멋지어 이곳 저곳을 살펴본다. 5개의 교각 위에 판석을 얹은 평교로, 다리 양옆은 자연석 교대를 쌓았으며, 양쪽의 강가에서 다리로 접근하는 계단을 쌓아 통행토록 하였다. 전체길이는 13.5미터, 폭은 1.15∼1.38m, 높이 약 3.2m라 한다.  『동국여지승람』 등의 조선시대 지리지에는 수탕석교, 수탕천교, 수탕교 등의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현지 주민들은 ‘주창다리’라 부른다고 한다.

문화재청 자료에는 1998년 논산시 성동면 원북리 주민이 매장된 다리를 확인하기 위한 퇴적토 제거작업을 포크레인으로 거칠게 하면서 석교의 부재들이 큰 손상을 입었으며, 논산시에서 이러한 정황을 알고 서둘러서 충남대학교 박물관에 발굴조사를 실시토록 하여 석부를 수습·정리하여 ‘계백장군묘역’에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이 다리는 원래의 자리에 새워져야 한다는 의견으로 '계백 장군묘역'에 추진되었던 복원계획이, 당시 논산시 문화담당관과 계장( 이연형)과 주민들의 ' 문화재 는 발굴된 위치에 복원해야 된다'는 신념으로 이곳에 복원되었다고 한다. 이다리는 2004년에 복원된다. 이곳에 있게 한 분들게 감사하다.

 

[원목다리] 
 [원목다리]
[원목다리 용머리]

 원목다리의 진입로도 그리고 주변의 주차공간도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다.  주변에 차를 새우고 볼 수 있는 곳이 없어 하천의 뚝방에 서 내려다 보아야 한다.

조선시대에 만든 3칸 규모의 돌다리로, 양끝을 처지게 하고 가운데는 무지개처럼 둥글고 높게 만들었다. 고종 광무 4년(1900)에 홍수로 파괴된 다리를 민간인과 승려들이 돈을 모아서 다시 놓았다고 한다.

현재는 사용하지 않으며, 전라도와 충청도의 경계역할을 하던 다리이다.  논산-강경 국도변에서 동남쪽으로 방축천의 제방을 따라 1km떨어진 호남선 철도변에 동서방향으로 가설되어 있는 석교로 미내다리와 같은 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원목(한자어로는 院項)이라는 이름은 간이 역원과 길목의 뜻이 합쳐져 나그네의 휴게소 겸 주막을 이르는 말이다. 따라서 이 다리 어귀에 그런 시설이 있었고 거기에서 따온 이름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기차가 다리옆을 지난다. 

강경 미내다리로 향한다.

 

[미내다리]
[미내다리 용머리]
[미내다리 상판]
 [강경의 미내다리]

앞선 두곳보다는 진입이 다소 낳은 편이다. 강경천의 채운교가 있는 강둑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면 시멘트로 만들어진 다리가 놓여 있고, 그 옆으로 작은 미내다리가 설치되어 있다. 전국 교역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는 강경포구가 있던 곳으로, 이 강을 ‘미내(渼奈)’라고 부른 것에서 유래하여 ‘미내다리’라고 부른다. 긴돌을 가지런히 쌓아 3칸의 무지개모양를 만들고, 그 사이마다 정교하게 다듬은 돌을 가지런히 쌓아 올렸다. 다리의 강둑 쪽 중간쯤에는 형태를 정확히 알 수 없는 동물의 얼굴이 조각되어 있는데, 눈은 마치 장승의 눈과 같고, 코는 뭉툭하며, 얼굴 양옆으로 귀모양과 갈기가 있다. 나의 생각으로는 용머리 아닐까?  다리 옆에 놓여 있던 ‘은진미교비’는 국립부여박물관에 보관 중인데, 비문에 의하면, 조선 영조 7년(1731) 주민의 필요에 따라 강경촌 사람인 송만운이 주도하여 이 다리를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수로정비에 따라 물길이 바뀌어 현재는 제방 제내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1998년 완전해체하여 2003년 보수정비 하였다.

미내다리는 하천명이 미내천이라는 데서 붙은 이름으로 당시 이 다리가 있는 곳은 큰 시내로 바닷물과 통했다고 전해져 조수가 왕래하였음을 보여준다. 지난해 원형을 복원하여 다리 전체 모습을 갖추게 됐다.

 

다리하나 보고 즐겁게 귀가한다.  우리는 살면서 무언가를 수집하는 사람들을 알게 된다. 그러한 취미를 가진 분들의 특징이 어쩌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무한히 많아도 자기가 모은 것 중에 없는 것을 가지려는 집착하는 것이아닌지 생각해 본다. 모으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의 내가 비슷한 심리로 지내는 것 같다.  모든 것을 접할 수 있을 지 모르겠으나, 접하지 못한 문화재를 보고 싶다. 그것은 나만의 즐거움이다. 찾아가는 길의 호기심과 돌아오는 길의 만족감, 이러한 일이 나의 일상이 된다. 다른 지역의 돌다리는 또 어디에 있을까. 다른 동굴 법당은 어디일까 혼자만의 다음 여행지의 게획을 세우면서 귀가한다.  

 

如一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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