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일흔 세번째 - 금산

세종해피뉴스 2022. 3. 31. 22:42

금산으로 향한다. 금산시내의 금산 역사문화 박물관의 넓은 주차시설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다. 

금산은 보석사가 사찰로서 자리하나 그간 이곳의 커다란 은행 나무를 보려 들른 적이 많아, 오늘은 새로운 사찰을 경험하여 보려고 한다. 금산에는 소개할 만한 보물이 임진왜란 당시 충청도 의병장으로 왜군과 싸우다 순사한 중봉 조헌의 유품이 7종 보물로 지정되어 금산의 칠백의 총에 자리한다.  다음 기회에 이들을 여행 하려한다.

보석사와 필백의 총은 가을 단풍이 물드는 시기에 오는 것이 나름 의미가 있다 생각한다.

 

[유형문화재  용석]

금산에는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용호석이 금산의 명물로 자리한다. 금산의 용호석을 찾아 본다. 금산군 천내리에 자리한 용호석은 용석과 호석이 서로 떨어져 있다.

금산에서 금갈로를 따라 제원대교를 건너자 마자 거의 180도로 회전하여 마을 길로 내려서야 하여, 처음 방문시는 긴장감을 갖게 한다.  길아래로 조금 들어서면  밭자락의 전각을 볼 수 있다. 이곳에 자리한 것은 용석이다.  천내리 서쪽을 흐르는 천내강의  재원대교 인근 천변에 자리한  고려시대말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이다. 용석은 제원대교 북쪽 50 미터 지점에 있고, 그곳에서 230미터 떨어진 곳에 호석이 있다. 

 

[유형문화재  호석]

이들 용석이 이곳에 자리한 연유가 궁금하다. 용호석과 관련하여서는  고려 공민왕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고려말 홍건적의 난때, 안동으로 내려온 공민왕이 지관에게 자신의 능묘를 정하라 명하였다한다. 지관은 금산 동쪽20리 지점 태백산 지락에 평사낙안부사도강의 명당이 있다고 하여, 이에 공민왕은 필요한 석물을 준비하게 한다. 그러나 공민왕이 개경으로 환도한 후로  이 석물이 방치되었다고 한다. 하여 다른 석물이 존재할 지 알 수 없고 원래 떨어져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현재 각각의 보호각을 건립하여 보호하고 있다.

   

[용석의 자태]

용석은 70 X 80cm가량 되는 부정형 대석위에 조각되어 있으며, 소용돌이 모양의 돌기사이에 꿈틀거리는 용의 몸체를 조각하였고, 여의주를 물고 있는 입 양쪽으로 아가미와 수염이 세밀하게 조각되어 있다.

용의 형상을 잘 모르지만 입석형태를 취하다 보니 몸이 많이 꼬여 있어 조형미가 크게 돋보이지는 않다는 생각이다. 길게 몸을 펼친 용의 형태에 익숙해선지, 이렇듯 또아리 튼 듯한 형태를 만들기 위해 석공은 구상을 여러번 했을 것이란 생각을 해본다.  

용석을 둘어보고 천변을 올라서서 차량으로 이동한다. 용석이 있는 전각은 용석의 전각의 뒤에 자리하여 쉽게 찾을 수 있다.  다만 이곳은 길이 좁고 주차공간이 거의 없어 용석을 본 후 도보로 이동하는 것이 편리하다. 

 

[호석의 자태]

같은 모양의 전각에 자리한 호석은 조금 큰 듯한 느낌이고, 호석은 110 x 80cm의 네모난 받침돌 위에 앞발을 세우고 앉아있는 호랑이 모습으로, 두툼하게 융기된 곡선과 원형을 교대로 조각하여 털무늬를 표현하였고, 몸은 서쪽, 머리는 북쪽을 향하였으며, 입을 벌리고 있는 모습이다. 이 모습은 마치  민화 호랑이와 까치의 호랑이와 닮았다. 조각수법이 퇴화하여 호랑이나 용의 특징이 생동감 있게 묘사되지는 못하였다. 이로 인해 고려후기의 것으로 추정 된다. 고려 공민왕 시대라는 전설이 있으니 그때의 호랑이 문양으로 기억한다.

 

길옆에 자리한 용석이나 조금 떨어진 농로 옆에 자리한 호석은 보호각으로 잘 보존되고 있으나, 왠지 썰렁하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원래도 떨어져 있었을까? 얼마나 큰 묘지 터 이길래 이렇듯 멀리 떨어져 놓았는지, 지금은 왜 떨어져 있을까, 그 당시는 능묘의 석물에 용석과 호석이 사용 되던 시기일까?  문인석, 장명 등 말이나 양등은 본 듯한데 호랑이와 용을 가지고 묘의 석물을 사용한 것이 맞을 까?

혼자 이 생각 저 생각을 해봐도 알 수가 없다. 전문가들이 연구하겠지 ? 그시대의 석물로는 특이하고 멋짐이 느껴진다.

 

원래있던 자리와 유래에 관하여 잘 고증되어 많은 이에게 알려 주어  함께 하는 방안을 검토하기  바랄 뿐이다.

 

[금산의 신안사]

길을 돌아 제원대교를  다시 건너 오던 곳으로 조금 향하다 길을 오른쪽으로 접어들면 금산의 신안사로 향한다. 길 옆에 자리한 심안사 사찰의 입구 축대가 보인다.    

금산 제원면 신음산에 자리한 신안사는 신라 진평왕 5년(583)에 무염선사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고 한다. 651년 자장이 창건, 신안사라는 절의 이름은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충북 영동군의 영국사에서 수학할때 이 절에도 가끔 들려 유숙하였는데, "주위 산수의 경치가 아름답고 조용하여 몸과 마음이 아울러 편안하다"고 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일제시재는 보석사의 말사 이었다가 한국 전쟁시 퇴락, 곧 이어 중건 되었다  지금은 마곡사의 말사이다. 

잠시 경순왕을 검색해 본다.

후배제 견훤이 신라의 수도 금성을 급습하여 포석정에서 연회 중 이었던 경애왕을 사로 잡아 자살하게 하고, 이종 사촌 동생인  김부를 왕위로 세우는 데 그 가 경순왕이다. 국운이 쇠하여 국가의 유지가 어려워지자 난폭한 후백제 견훤을 피해, 935년  항복을 청하는 국서를 고려 왕건에 바쳐 본인은 고려의 신하로 부와 권력을 누리고 살았으나 천년의 신라를 멸망을 가져온 왕이다. 

신라 경주와 고려의 개성 사이를 내왕 했는데  이곳 영국사에는 어찌 머물렀는지 알 수는 없다. 영동 여행시 좀 더 알아보려 한다.

 

[신안사 부도탑]

너른 주차장 옆에는 부도들이 자리한다. 계단을 타고 절 마당에 오르니 큰나무 옆에 작은 사진과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신안사의 마스코트인 “심안이”라는 고양이의 소개글이 자리한다. 사진으로 글을 대신 한다.

 

[심안이 소개글]

 

[극락전 앞 심안이]

마당에  올라서니 마치 내가 그 주인공 이라는 듯 전각 앞을 지나는  심안이 고양이가 보인다. 신기롭게 바라보다 탑으로 눈울 가져간다.

 

[신안사 칠층석탑]

이곳에 유래를 알수 없는 석탑이 있다.  옥개석을 새로이 올리며 위치가 바뀐 것 같다는 생각인데 지극히 개인 적인 생각이다. 모습이 날렵하나 왠지 불안하다. 그래도 세월의 흐름을 느끼게 하여 주어 마음에 안정을 가져다 준다.

 

원래 신안사에는 대광전·극락전·진향각·요묵당 등이 있었으나, 현재는 대광전·극락전만 남아 있다. 극락전의 정확한 건립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영조 14년(1756)과 헌종 11년(1845)에 각각 중수하였다는 상량문이 발견되어 17세기 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신안사 극락전]
[극락전 옆면]
[극락전 후면]
[극락전 내부]

신안사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내에는 아미타불이 봉안되어 있다.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영조 14년 (1756년)과 헌종11년(1845 년)에 중수하였다는 상량문에 의거 17세기 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유형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유형 문화재 신안사 아미타삼존불상]

신안사 아미타삼존불좌상은 충남 유형 문화재 제 187호 이다.  아미타여래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음보살상과 지장보살상이 자리한 아미타 삼존불이다. 나무 위에 흙과 삼베를 입히고 개금을 입힌 불상으로 전형적인 여말선초의 불상기법을 보이고 있다. 전체 크기가 장대한 삼존불로 조각 및 예술적 가치가 뛰어나다. 특히 좌우협시보살상은 전체적으로 영락과 장식이 절제된, 번잡한 장식이 배제되고 매우 사실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신안사 아미타삼존불상]

사찰은 안내문에는 대체로 고려말의 불상은 본존불만 있는데, 신안사에는 본존불과 함께 좌우에 보살상이 있다. 더욱이 본존불은 앉아있는데, 보살상은 합장한 채로 서 있는 형태로 이는 매우 드문 예이다 라고 설명한다 

궁금하여 알아보니 소조아미타삼존불좌상은 아미타·관음·지장보살로 구성된 점, 아미타불상의 상체가 긴 장대한 신체와 낮은 무릎의 비례감, 보살상들의 장식이 배제된 간결미, 보발이 생략된 관음보살상의 머리 표현 등은 임진왜란 이전인 16세기의 불상 요소들이다. 즉 신안사 아미타삼존불좌상은 조선 전기인 16세기 작품으로 추정되며 목심 위에 흙으로 마무리한 제작 기법, 개성적인 얼굴 표현, 합장인의 손 모습 그리고 독창적인 조형성이 특징이다. 소조불 사례가 적은 조선 전기의 작품으로서 조선 후기 소조불상의 기법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는 작품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금산 신안사 아미타삼존불좌상(錦山身安寺阿彌陀三尊佛坐像))]과 신안사 아미타삼존불좌상은 나무 위에 흙과 삼베를 입히고 개금을 입힌 불상으로 전형적인 여말선초의 불상기법을 보이고 있다. 전체 크기가 장대한 삼존불로 조각 및 예술적 가치가 뛰어나다. 특히 좌우협시보살상은 번잡한 장식이 배제되고 매우 사실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고려말기의 불상은 대체로 독존으로 전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반하여 삼존이 모두 구비되어 있는 신안사 아미타삼존불좌상의 경우는 매우 드물다. (국가 문화유산 포탈)이라고 소개되어 고려불과 조선불에 대한 구별에 관한 안목을 키워야 하나 고민해 본다.

 

 

[신안사 대광전]

        

[대광전 옆면과 요사채]

대광전이 있는 신안사는 주변에 국사봉과 연신봉 등 여러 산봉우리가 어우러져 마치 연꽃이 만개한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하여 연화 도량이라고 한다. 대광전은 서향 건물인데  조선 후기에 만들어 졌다한다. 기단은 자연석을 쌓아 만들어져 있고 정면이 5칸이라 건물이 길고 시원스러워 보인다.

 

[대광전 내부]
[대광전 불단 후면]

내부에는 석가모니가 설법한 진리를 형상화한 비로자나불을 본존으로 노사나불과 석가여래불이 모셔져 있다.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로, 내부의 3칸에는 부처를 모신 불단과 불단 뒤쪽의 후불 벽이 있다. 바닥에는 마루를 깔고 외부에도 쪽마루를 깔았다. 후불벽에는 여러 불화가 자리한다.

 

   

사찰을 나서 오던 길이 아닌 반대편으로 길을 접어든다. 가보지 않은 미지의  길을 가보는것 또한 여행의 매력이다. 일단 길을 접어들고  나중에 온 길을 찾아보는 것도 나만의 습관이다 . 요즘은 네비게이션으로 인해 길을 잃을 염려도 없다. 목적지를 집으로 설정하면 설령 다른 길을 접어들어도 언제나 가장 빠른 길을 안내해 주기 때문이다. 지도를 들고 안내판을 보며 다니던 때가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고개길을 돌다 보니 눈이 군데군데 녹지 않고 산위를 하얗게 덮고 있다. 가다보니 군북면 표지 판이 보인다.  

 

고속도로로 접어들며 오늘의 여행지를 되새겨 본다. 신안사는 독특한 소조불상과 대광전이 인상적이다. 5칸의 옆으로 긴 불당과 후사면의 불화들이 인상적이었다. 심안이 라는 고양이의 스토리텔링은 인상적이며 나름 정감을 불러 이르켰다.

금산에 명물인 듯한 용호석은  입구와 문화재 주변의 접근이 개선 되었으면 한다. 원래 있던 자리가 그 곳들이 아니면 모아 놓는 것은 어떨지 생각해본다. 공민왕의 묘터와 깊은 연관이 없이 발견된 곳에 세웠다면 옯겨서  모아 놓는 것이 좋아 보일 듯하다.  유사한 용호석의 설치 방법이나 그와 비슷한 것을 찾아 내어 함께 전시하는 것이다.

몇번인가 생각해 보지만  묘비나 기념비를 보관하던 전각이 예부터 내려 오던 것이라면 그대로 보관하지만, 석조불이나 석조물을 보관하기 위한 것이라면 전각을 짓는 것 보다 익산 왕궁리의 후원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 같은 투명한 재질의 현재적인 설치물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다만 빛에 의한 내부보기가 어려운 것은 개선 되도록 설치물의 구조를 연구가 필요하리라 본다.

시설물이 우리의 눈높이에서 전체를 볼 수 있게 하였으면 한다. 오늘도 별스러운 아이디어 하나 생각한 기특함을 자축하며 집으로 향한다.

 

如一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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