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일흔 두번째 - 청양

세종해피뉴스 2022. 3. 24. 21:58

청양으로 향한다. 정하고 나서지 않아 택해 본 길이다. 청양하면 생각나는 장곡사를 마음에만 담고 다른 보물을 찾아 나선다. 오늘은 일기도 그리 좋지 않아 볼거리가 많은 장곡사 보다는 알려지지 않은 보물을 찾아 나선다. 먼저 청양읍내에 자리하며 보물로 지정된 삼존불을 찾아본다.  청양읍사무소를 따라 오르면 야산에 산책길이 잘 정비된 길을 따라 조금만 오르면 청양 읍내리 석조여래 삼존입상이 자리한 전각을 만난다.

 

[석조불 전각]

 전각 앞에서는 아래 동네와 지천 생태공원이 내려다보이는 탁 트인  전경을 볼 수 있다.

 

[보물  제 197호 청양 읍내리 석조여래 삼존불 입상]
[ 삼존불 ]
[석조여래 삼존불 입상]

청양 읍내리 불상은 고려시대 불상 양식에 따라 만들어진 불상이다. 본래 읍내리 1구에 있었던 것을, 1961년 용암사로 옮겨왔고, 1981년에 보호각을 짓고 모셨다 한다.  가운데에 있는 본존불과 좌우에 있는 협시불은 각각 머리 뒤의 후광을 표현한 광배와 네모난 대좌가 따로 있다. 본존불의 얼굴은 마모되어 윤곽만 남아 있지만 소박한 미소를 띄고 있는 모습이다. 귀는 턱까지 내려 왔으며, 목에는 수행의 단계를 상징하는 삼도가 표현 되어 있다.  당당한 체구의 불상으로 머리에는 큼직한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있고, 직사각형에 가까운 얼굴에서는 강인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어깨는 넓고 당당하며 군데군데 옷 사이로 드러난 신체 역시 당당하고 강인한 느낌을 준다.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은 가슴에서 발목 부분까지 U자형의 주름을 이루면서 내려오고 있으며, 다리 사이에는 바지 자락이 표현되어 있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는 배(舟) 모양으로 불상과 같은 돌로 만들었는데, 파손이 심해서 세부표현을 확인하기 어렵다. 대좌는 앞면에 3개 옆면에 2개식 코기리의 눈을 닮은 안상을 새겼는데 이는 고려시대의 방식으로 보인다. 좌우 협시불의 조각방식은 거의 같고 몸을 약간 틀어 본존불 쪽을 향하고 있다. 왼쪽의 협시불은 왼쪽 어깨에서부터 오른쪽 허리까지 부러진 것을 복원하여 놓은 것이다. 섬세한 옷자락 사이로 목걸이 장식이 보이고, 옷자락은 3가닥식 T자형으로 늘어져 있다. 오른 쪽의 협시불은 모든 면에서 왼쪽과 같으나 윤곽이 둥글고 앳된 모습이 다르다.  왼손이 무릎까지 내려와 있다. 

 

 

삼불상 아래 자리한 삼층석탑이다. 오랜 문화재 여행 중 자리에 서서 발아래 탑을 바로 내려다 본 것은 이곳이 처음이라는 생각이다. 노반과 양화를 위에서 보는 색다른 즐거움을 맞본 곳이다.

이탑은 고려시대에 세원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청양 읍내리 석조여래 삼존 입상과 함게 읍내의 '일명사' 라는 옛 절터에 있던 것을 군청 뒤뜰로 옮겼다가 1961년 현재의 용암사 지금의 장소로 다시 옮겼다. 탑의 기초가 되는 지대석은 넓은 판석 4매로 되어 있고 둥대석의 각면에는 탑의 모퉁이 기둥을 뜻하는 우주와 탑의  가운데 기둥을 뜻하는 맹주가 있다. 1층 몸돌 중앙에는 문고리가 장식되어 있고, 지붕돌 받침은 1. 2층이 3단, 3층이 2단으로 되어 있다. 상륜부에는 네모난 지붕 모양의 노반과 꽃모양의 양화가 남아 있으며, 상륜부의 각부재를 지탱하는 기둥인 찰주가 있다 지붕돌의 높이는 낮고, 추녀의 폭이 몸돌에 비해 넓은 고려시대 석탑의 기법을 엿 볼 수 있다. 

 

원래의 자리는 아니지만 지금 자리한 곳은 삼존불과 탑이 원래 있던 곳으로 생각하여도 손색이 없다. 원래의 자리들은 아니지만 주변이 공원으로 꾸며져 잘 보존된 것 같다. 이곳에서 내려다 보인는 경관이 마음을 평안하게 한다.  이곳에 앉아 잠시 사색에 잠기고 개와 함게 산책하는 이들과 눈인사를 나누며 자리를 뜬다.

  

[삼존불과 삼층석탑]

길을 돌아내려와 화정사로 향한다. 이곳에는 유형 문화재인 화정사 범종과 목조 보살좌상이 있다고 하여 찾아 본다. 좁은 길에 중간 중간 비포장을 지나 화정사로 들어선다. 날도 축축한데 이곳의 분위기는 약간 썰렁하기 까지 하다.  왼쪽으로는 작은 연못이 있고, 확인 되지 않는 물새소리가 요란하다. 사찰은 정리되지 않은 느낌이다.

 

[화정사 전경]
[화엄사 대웅전]

왠지 임시 건물처럼 보이는 대웅전이 자리한다. 절터에는 탑과 석조불이 자리한다. 연륜이 깊지 않은 듯하여 대웅전으로 들어 선다. 이곳의 보살님이 경계 하며 맞아준다. 이곳의 모습의 외부 알려짐이 어색해서 일까, 코로나로 인하여 외부인 접촉을 꺼려서 인지, 먼 발치 거리를 두면서 대웅전 내부 촬영을 하지 말라 하시고 이내 자리를 비운다. 내부에 모셔진 부처님이나 관세음 보살은 내가 찾던 모습이 아니다. 다소 당혹감으로 이내 물러난다. 이절의 역사는 오래인데 아마도 화재로 인해 지금의 모습으로 있는 것 같다.

 

[대웅전 내에 모셔져 있는 본존불과 관음상]

두 불상만 촬영하고 내부 모습은 눈에만 담아본다

불상과 동종의 행방을 듣지 못한다. 이곳의 문화재를 외부의 침입으로 분실 할 뻔 한 일이 있었다 한다. 아마도 이후에 사찰의 증축이나 불사가 이루어지면 모습을 나타낼 것이라 생각한다.

아마도 이곳이 불상과 동종의 도난을 방지하려고 별도 보관 중인 듯 하다.

 

[화정사 목조보살좌상,  화정사 범종]

청양 화정사 목조보살좌상은 높이 900mm, 무릎폭 545mm이다. 17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세밀한 조각 상태 및 개금상태는 양호하다. 목조보살좌상은 신체비례감이 정확하고,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상호가 단아하며 수려한 보관장식과 유혀한 의습표현등은 17세기 목조보살좌상의 정현적인 조형양식을 보여준다.

 

화정사에 소장된 범종으로 고려후기 범종의 전형적인 조형양식을 따르고 있다. 크기는 높이265mm, 구경150mm로 소형범종이다. 종신은 고려후기종의 독특한 조형요소인 입상대를 갖추었으며 그 아래로 상대, 유곽, 종뉴, 보살상, 당좌, 하대 등을 빠짐없이 갖추고 있다. 화정사 범종은 소형종임에도 불구하고 용뉴의 모습이 생동적이고, 입상대장식이 아름답다.

 

눈으로 보지 못한 아쉬움이 자리한다. 다시금 보살님을 뵙고 보여 주시기를 청하려 해보다 마음을 접는다. 

요즈음의 사찰은 번듯하고 화려하기 까지 한데 이곳은 예전의 명성은 차제하고 라도 환경이 너무 열악 하였다. 그래도 부처님 앞에 밝혀진 촛불속에 어렴풋이 보이는 법당 안은 정성을 다하여 수행하는 장소 인것 같아 다시금  반듯한 대웅전을 갖추고 관음상이 모셔진 관음전을 가진 사찰로 거듭나기를 바라며 사찰을 뒤로 한다.

  

 

집으로 향하는 길에 청양하면 들려 보아야 할 탑을 찾아나선다.  쉽게 볼 수 없는 구층 석탑이다. 공주에서 청양쪽으로 23㎞ 떨어진 벌판 가운데에 서 있는 탑으로, 부근에 고려시대 백곡사(白谷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전해지나, 주위에 기와조각 등이 흩어져 있을 뿐 다른 유물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한다.

 

[보물 제 18호 청양 서정리 구층 석탑]

큰길에서도 보이는 이곳은 주차장과 주변 정리가 잘 되어 있다. 

탑은 2단의 기단 위에 9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에는 안상(眼象)을 돌려 새겼는데, 바닥선이 꽃모양으로 솟아올라 있어 고려시대의 양식상 특징을 드러낸다. 윗층 기단에는 네 모서리와 면의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겼으며, 그 위로 알맞은 두께의 돌을 덮어 안정된 모양새를 띠고 있다. 탑신 1층이 큰 점이 특징적인데, 2층부터는 높이가 뚜렷하게 줄어들지만 넓이는 크게 좁아지지 않아 우아한 느낌이다. 지붕돌은 아랫면에 1층은 5단, 나머지 층은 3단씩의 받침을 두었으며, 네 귀퉁이가 약간씩 치켜올라가 있다. 전체적으로 신라시대부터 이어져 온 석탑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으나 9층이나 되는 층수로 인해 형태가 매우 높아져 안정감이 부족하다. 각 부분의 세부적 조각양식이나 기단의 안상을 새긴 수법으로 보아 고려 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탑의 기단의 안상무늬]

 

탑 주변은 백련 밭이다.  400년 역사가 있는 '청양백련'은 조선 선조 20년 (1587년)  송담 송남수 선생이 정산현감으로 재임할 때 정산현( 지금의 정산면사무소) 좌측에 연못을 만들고, 만량정이란 정자를 세우면서 심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청양백련지를 400년간 지켜오다 지난 2000년 정산면사무소 보수공사와 만향정 복원 당시 잠시 백련을 옮겼는데 이식이 불가하다는 속설처럼 서서이 자취를 감추었다. 이후 청양백련을 되살려 토종 작물로서의 귀중한 자원확보와 연꽃의 아름다움을 알리고 관광상품개발과 환경및 생태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망향정과 서정리 9층탑 주변, 고택 주변에 복원 하였다고 한다 

 

세월속에 많은 연유로 사찰이 생겨나고 없어지고 했다. 오늘날도 화재로 인한 소실로 인하여 귀중한 문화재가 사라지고 있다. 많은 국보와  보물이 불교 문화제 인 것은 그만큼 역사속에서, 불교가 우리곁에서 함게 자리해서 인 것 같다. 그래도 오랜간 자리하고 우리에게 그 흔적을 알려주는 것은 많은 석조물 들이었다. 석탑, 석불과 기와 들이 그것이다. 모든 것이 늘 같은 자리에 존재하지 않으리라, 새로운 것이 자리하고, 우리는 편리나 개선이라는 것을 통하여 이전하고 없애고 또 새로이 만들고 한다. 이러하듯 세상은 변화하는데, 우리내 지금의 삶의 흔적도 먼 훗날에는 나름의 역사의 기록이 되는 것인데, 무엇인가 문화재급의 유물을 남기기 어려운 나같은 범인은, 그 나마 조상이 남겨준 유물과 문화재에 관심을 가지는 것으로 대신 한다. 알고 보던 것을 다시와 보니 새로운 것이 더 보이고, 모르는 곳을 찾아 새로운 지식을 얻고, 길 나서서 뭔가를 얻은 듯 한 기분을 가지고 돌아온다. 

 

如一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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