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예순 아홉번째 - 익산(2)

세종해피뉴스 2022. 3. 8. 00:26

 보물 45호 연동리 석조여래 좌상이 모셔진 석불사로 향한다. 이 불상은 현존 백제 최대의 불상이다. 이 석불은 밀양의 표충비처럼 국가에 큰 중대사가 있을시 땀을 흘렸다고 한다. 대표적인 것이 6.25전쟁, 외환위기, 노태우 전 대통령 사망때 담을 흘렸다고 한다. 다만  몸체와 어울리지 않은 불두를 가지고 있어 당혹스러웠던 기억이 있던 불상이다. 사찰의 길 건너편의 주차장에 차를 멈추고 적지만 조경에 신경을 쓴 사찰로 향한다.

 

[석불사]
[석불사 ]
[석불사 대웅전]
[석조여래좌상 안내판]

이곳의 불상은 보수 중으로 법당출입이 금지 되어 있다. 공사명은 '익산 연동리 석조여래좌상 보존처리공사'로 공사기간이 2022년 2월 22일에서 4월 21일 까지 이다. 알아보지 않고 들르니  흔히 겪는 일이다. 2019년 방문 시 불상 앞에 나무불단으로 인해 불상의 완전한 모습을 볼 수 없어 안타가웠는데, 2020년 나무불단을 없애고 앞면과 옆면을 강화유리로 설치 불상의 전체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어 방문한 것인데, 다시금 찾아보니 공사 중 이라 한다. 마침 스님을 만나 공사 중이라 볼 수 없슴을 전해 듣고, 어울리지 않은 불두를 화제로 몇마디 담소를 나눈다. 이번에 공사하는데 마지막 말씀이 ‘불두는 문화재청에서 알아서 하겠지요‘ 라는 말을 스쳐 듣는다.

 

[보물 제 45호 연동리 석조여래 좌상]

사진은 일전 방문시 촬영 분으로 대신해 본다. 불좌상도 고쳐진 모습의 전체모습을  볼 수 있슴을 기대하며, 불상보다 천장이 높이가 낮아 불상의 큰 위용을 잘 볼 수 없으며 적은 전각으로 인한 조명도 그다지 좋지 못했던 기억이 바뀌길 바라는 마음으로 돌아선다. 

불상은 머리만 없어졌을 뿐 불신(佛身), 대좌(臺座), 광배(光背)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는 백제의 작품이다. 지금의 머리는 새로 만든 것이며, 불상의 현 신체 높이는 156㎝이다. 당당한 어깨, 균형 잡힌 몸매, 넓은 하체 등에서 서툰 듯 하면서도 탄력적이고 우아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자락은 길게 내려져서 사각형의 대좌를 덮고 있는데, 앞자락은 U자형, 좌우로는 Ω형의 주름이 대칭으로 2단씩 표현되어 있다. 왼손은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구부려 가슴에 대고 오른손은 세번째와 네번째 손가락을 구부려 다리에 올려놓은 특이한 손모양을 하고 있다. 광배의 중앙에는 둥근 머리 광배가 볼록 나와있고 그 안에 16개의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바깥에는 방사선으로 퍼진 특징이 있다. 몸광배도 볼록하게 나와있고 바깥부분에는 불꽃무늬를 배경으로 7구의 작은 부처가 새겨져 있다.

이 석조여래입상은 대좌의 모습과 광배에 새겨진 무늬를 볼 때 장중하면서도 세련된 특징을 보여주는 600년경의 희귀한 백제시대 불상으로 그 의의가 높다. (문화재청 자료)

 

공사중인 곳은 방해를 주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에 빠르게 벗어난다 . 오늘 아니면 다음에는 인연이 닿겠지 하며, 이제는 보고 싶던 박물관을 향해 길을 나선다.

 

[춘간공 박물관]

가는 길에 연안이씨 종중문적이라는 이정표를 발견한다. 그냥 지나치기가 어려워 이정표를 따른다. 

연안이씨 종중 문적(延安李氏 宗中 文籍)은 익산시에 거주하는 연안 이씨 문중에서 소장하고 있는 유물들로, 보물로 지정된 것은 조선 세종 때부터 숙종 때까지 여러 유물이 있다고 한다.

토요일에는 전시시간이 오전 12시 까지 이고, 입장은 1시간 전이다. 시간이 맞지 않아 관람을 뒤로 미룬다. 위치를 확인 한 것만도 다행이다. 계획없이 나서다 발견하는 것도 즐거움중의 하나이다. 익산을 다시 방문하여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어난다.

 

미륵사지박물관 주차장에 도착한다. 앞으로는 미륵사지가 펼쳐져 있으나, 먼 발치서 훑어보고 이내 박물관으로 향한다.  

 

[미륵사지터 원경]

드디어 익산의 미륵사지터에 도착한다. 오늘의 목적은 이곳의 탐방이 아니다. 먼발치서 탑과 당간 지주를 본다. 이곳은 다음 여행지로 미루기로 한다.

미륵사(彌勒寺)는 백제 무왕 때 왕비인 사택왕후의 발원으로 지어진 사찰이다. 2009년 전라북도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해체 중 내부에서 발견된 금제사리봉안기에 따르면 639년에 미륵사를 창건한 것으로 기록되 있다.  만90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된 미륵사지는 백제의 최대 사찰이었다. 이곳의 여행은 다음으로 미룬다. 사지터 옆에 자리한 국립익산 박물관으로 향한다. 독특한 건물이 마음을 설레게 한다.

 

[익산국립박물관 입구]

이 박물관은 2020년 1월 증축 개관한 곳이다. 오늘은 이 박물관을 둘러보려 한 것이다.

익산 국립박물관이다. 마치 지하 요새로 들어가는 듯 한 느낌이 미륵사지의 경관을 헤치지 않으려 한 노력인지, 아니면 지하가 박물관으로 적합한 것이기 때문인지 독특하고, 윗부분은 잔디로 오를수 있게 되어있다.  건물의 위치가 180도 바뀌어 잔듸 끝으로 올라, 미륵사지를 내려다 볼 수 있었으면 어떠했을가 생각해 본다. 시간 당 120명 이상이면 사전 예약이 필요하나, 적은 인원 때문인지 그냥 입장이 가능하다.

매주 월요일은 휴관일 이다. 내리막길을 넘어질 듯 빠르게 걸어 박물관 입구로 향한다.

 

이곳은 4개의 전시실로 구분 된다. 익산백제실, 미륵사지실, 역사문하실, 3아이템의 상설전시실과 기획 전시실로 구성된다.

익산백제실은 사비 백제의 신도시인 익산의 왕궁리유적, 일탑이금당식 가람배치인 제석사지, 백제의 쌍릉 의 문화제가 주를 이룬다.

 

[국보 왕궁리유적 오층석탑금제 사리함과 사리병]

익산에서 찾은 백제 왕궁 왕궁리 유적은 백제 왕궁터로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하는 곳으로 그 곳의 남아있는 국보로 지정된 오층석탑에서 발견된 사리상자이다.

왕궁리 유적 오층 석탑 등이 대표적 유물이다.

 

[국보 제 123호 왕궁리 유적 오층석탑 부처]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 일괄 (5종 30점)은 국보로 지정된 문화재 이다. 왕궁리  마한의 왕궁이 있던 자리로 알려진 터에 있는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국보)을 보수하기 위해, 1965년 해체하면서 탑을 받치고 있던 기단부와 1층 지붕돌 윗면에서 발견된 유물들이다. 발견된 유물들은 백제에서 통일신라에 이르는 시기의 것들로 판단된다. 기단부 윗면에 品자형으로 뚫린 3개의 구멍 중 동쪽에서는 광배와 대좌를 갖추고 있는 금동여래입상 1구와 불교 의식 때 흔들어 소리를 내던 청동요령 1개가 나왔고, 북쪽구멍에서는 향류(香類)가, 또 다른 구멍은 이미 도굴된 상태였다. 

1층 지붕돌 윗면 중앙에 뚫려있는 2개의 구멍에서는 각각 연꽃 봉오리모양의 마개가 덮여있는 녹색의 유리사리병과 금강경의 내용을 19장의 금판에 새겨 책처럼 2개의 금줄로 묶은 은제도금금강경판이 있었다. 이 유물들은 모두 2중으로 된 금동제 합 안에 봉안되어 있었다. 바깥쪽의 외합은 단순히 내합과 유물들을 보호하기 위한 기능으로 장식도 없고 칠도 벗겨져 있었다. 녹색의 사리병이 들어 있었던 내합은 뚜껑 윗면에 반쯤 핀 연꽃 봉오리와 주변에는 구슬무늬를 새겨 넣었고, 금강경판이 들어있던 내합은 뚜껑 윗면에 손잡이로 금고리를 달고 국화 문양을 새긴 것으로 모두 도금 상태가 완전하였다. (문화재청 자료)

 

[대왕릉의 나무널]

쌍릉 가운데 하나인 대왕릉의 나무널이 전시되어 있다. 백제 무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1400여년 전의 유물이다

 

미륵사지실은 7세기 왕실의 안녕과 중생의 불도를 기원하며 창건된 미륵사의 창건과 번영을 알 수 있고, 입구의 치미와 각종 수막새 와 기와 그리고 보물로는 금제사리봉영기, 사리호와 금제사리내호와 금동제사리회호, 금동 향로와 청동제 보살손 그리고 미륵사 모형이 있다. 

보물 제 1991호 ‘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장엄구’는 2009년 익산 미륵사지 서탑 심주석(心柱石)의 사리공(舍利孔) 및 기단부에서 출토된 유물로서, 639년(무왕 40) 절대연대를 기록한 금제사리봉영기(金製舍利奉迎記)와 함께 금동제 사리외호(金銅製舍利外壺), 금제사리내호(金製舍利內壺)를 비롯해 각종 구슬 및 공양품을 담은 청동합 6점으로 구성되었다.

 

[금동제 사리외호]
[금제사리 내호]

‘금동제 사리외호 및 금제사리내호’는 모두 동체의 허리 부분을 돌려 여는 구조로서, 이러한 구조는 동아시아 사리기 중에서 유사한 사례를 찾기 어려운 독창적인 구조로서 주목된다. 전체적으로 선의 흐름이 유려하고 볼륨감과 문양의 생동감이 뛰어나 기형(器形)의 안정성과 함께 세련된 멋이 한껏 드러나 있다.

 

[청동합]

‘청동합’은 구리와 주석 성분의 합금으로 크기가 각기 다른 6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청동합 중 하나에 새겨진 백제 2품 ‘달솔 목근(達率目近)’이라는 명문을 통해 시주자의 신분이 최상층이고 그가 시주한 공양품의 품목을 알 수 있어 사료적 가치와 백제 최상품 그릇으로서 희귀성이 높다.

 

[금제 사리봉영기]

‘금제사리봉영기’는 얇은 금판으로 만들어 앞·뒷면에 각각 11줄 총 193자가 음각되었다. 내용은 좌평(佐平)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인 백제 왕후가 재물을 희사해 사찰을 창건하고 기해년(己亥年, 639)에 사리를 봉안해 왕실의 안녕을 기원한다는 내용이다. 이 봉영기는 그동안『삼국유사』를 통해 전해진 미륵사 창건설화에서 구체적으로 나아가 조성 연대와 주체에 대한 새로운 역사적 사실이 밝혀지게 된 계기가 되어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높다.                                                                                               

이처럼 ‘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장엄구’는 백제 왕실에서 발원하여 제작한 것으로 석탑 사리공에서 봉안 당시의 모습 그대로 완전한 형태로 발견되어 고대 동아시아 사리장엄 연구에 있어서 절대적 사료이자 기준이 된다. 제작 기술면에 있어서도 최고급 금속재료를 사용하여 완전한 형태와 섬세한 표현을 구현하여 백제 금속공예 기술사를 증명해주는 자료로서 학술적․예술적 가치가 매우 크다.

 

[보물 제 미륵사지 금동 향로]

2012년 보물로 지정된 미륵사지 금동향로의 조형에 대해서는 국내의 자료가 전무하여 중국과 일본 수각형 향로를 중심으로 살펴볼 수밖에 없다. 우선 중국 수각형 향로 가운데 미륵사지 향로와 비교되는 당대(唐代)의 작품이 여러 점 확인된다. 그 중에서도 6개의 다리와 6수면(獸面)을 지닌 741년의 경산사지(慶山寺址)출토의 향로가 미륵사지 향로의 조형과 유사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당대에 만들 어진 중국 수각형 향로의 조형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고식의 연판 모습과 감은사지 사리감과 유사한 수면(獸面)과 고리에서 볼 수 있듯이 통일신라 초에 이루어진 여러 요소를 복합적으로 반영하여 한국적으로 수용한 작품으로 보인다. 백제 금동향로와 동일한 금·구리 아말감 도금법을 사용한 점 역시 이 향로의 제작시기를 올려보는 근거가 된다. 따라서 앞으로 보다 많은 자료와 세밀한 비교 검토가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이 향로의 제작시기에 관해서는 불교미술과 함께 금속공예에 있어 완숙한 단계에 이르렀던 8세기 전반에서 중엽을 넘어서지 않는 시기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미륵사지 발굴조사를 토대로 다른 동반 유물과의 비교를 통해 이 향로가 858년 이전에 매납(埋納)되었다는 견해는 이러한 편년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해 준다. 이 작품은 출토 경위가 확실하며 완벽한 보존 상태를 지닌 작품인 동시에 우리나라에서 첫 예가되는 통일신라의 금동 수각형 향로라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문화재청 자료}

 

역사문화실에는 익산과 군산의 역사와 삶 그리고 옛사람이 남긴 흔적을 알수 있는 곳으로, 볼만한 전시물로 주요 전시물은 각종 토기와 금동 신발 금동 모관, 세발 달린대형토기, 각종 동기가 있다.

 

[전시장에서의 행사}

 

이곳에서 인상적인 것을 보게 된다. 바로 석불의 미소 되찾기 이다. 전시실 한 편에 연동리 석조여래 불상의 몸체와 광배를 만들어 놓고 머리부분을 3가지 안으로 빔프로젝트를 활용 불두 부분을 바꾸어 가며 비쳐 보여 주며,  불상에 맞는 백제의 미소를 간직한 불두의 모양을 찾고 있는 듯 하다.

언제 부터 시작했는 지 알수는 없으나 석불사 방문시, 스님도 알 수 없다는 말씀의 뜻을 알 듯하다. 그만큼 호기심가지게 비밀로 수행하나 보다. 어느 것으로 보수 되는게 좋은 지는 혼자 만 정해본다. 맞으면 다행이고 안 맞아도 이전 의 불두 보다는 3가지 다 좋은 것 같다. 

불상을 만들고 3가지 안을 차례로 얹어 보이는 퍼포먼스이지만 일반인은 잘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 같다. 잠시 짬을 내어 관람자에게 취지를 설명 해주는 해설사가 되어 본다. 모르고 보던 이 들의 찬사에 으쓱해본다. 3안 모두 미소가 아름 답지만 좌불의 근엄함이 다소는 있는 것이 낳지 않을까하는 생각과 이러한 퍼포먼스는 나름 고고학 적인 고증과 영상기술이 결합되어진  멋진 아이디어라 생각한다. 연등리의 석조불이 온전한  불두로 교체 되기를 기대하며, 석탑사를 다시 찾아 어느것으로 결정되었는지, 완전체의 석조여래좌상은 어떤 모습인지 궁금해진다. 

 

미륵사지의 관람을 뒤로 하고 제석사지로 향한다. 박물관내에 모형으로 만들어져 있는 제석사지를 보고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는 원자리의 제석사지를 찾아보는 것도 의미 있다고 생각하여 길을 나선다.

 

[제석사지 안내판]
[박물관내의 제석사지 모형도]
[제석사지 ]
[제석사지]

길에서 궁평마을의 두어채 집을 지나니 너른 공터가 나온다. 입구에 제단이 뫂이 쌓인 곳을 보면 일반적으로 정비된 사지의 모습이다. 발굴 조사로 인하여 터를 닦아 놓은 곳이 예전의 큰가람 이었음을 잘 나타내어 주고 있다.

제석사는 백제 무왕이 수도를 왕궁평으로 옮기려고 지은 궁궐 근처에 불교의 수호신인 제석천을 중심 불상으로 모신 절이 있던 자리이다. 기록에 의하면 무왕 40년(639)에 벼락으로 절이 모조리 불에 탔을 때 탑 아래 넣어 두었던 동판에 새긴 금강반야경과 불사리만은 보존되어 다시 절을 지은 후 보관하였다고 한다. 탑터로 생각되는 지역에서 제석사라고 적힌 기와조각이 발견됨으로써 절의 이름이 밝혀졌다. 주목되는 점은 1965년 백제 무왕의 궁터라고 전하는 왕궁평 성안의 석탑에서 발견한 유물과 이곳에서 발견된 유물이 비슷하다는 점이다. 몇 안되는 백제 절터로서 문헌기록에서 절을 지은 시기와 폐허가 된 연대를 알 수 있다는 점, 무왕대의 왕궁평 유적과의 관련성, 백제 유적으로는 처음으로 암막새가 나왔다는 사실로 백제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길을 나서며 주변의 보물을 찾아 가본다. 

 

[보물 제 46호 고도리 석조여래 입상 건너편  불상]
[건너편에서 입구쪽을 본 전경]
[보물 제 46호 고도리 석조여래 입상 입구쪽 불상]

이번엔 보물 제 46호 고도리 석조여래 입상을 찾는다.  미륵사지 근처 길 건너 어디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 찾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고도리 불상은 다리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는 두 불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불상은 각각  높은 단위에 자리하고, 주위는 잘 정비되어 있으며 주변에 비닐하우스가 자리하여 주민의 바쁜 움직임사이로 불상을 대한다.

높은 단위에 자리하여 우러러 보아서인지, 돌기둥에 엷게 새겨진 문양과 함께 그리 멋짐은 없어 보인다. 올려다 보는 형상으로 발의 모습을 또한  잘 볼 수 없음이 다소 안타깝다.

깔금하게 정리된 느낌이나, 수석도 앉음세, 봄세 등 맵씨를 보는데, 이 두불상도 원래 이곳이 아닌 곳에  쓰러져 있던 것을 익산 군수가 현재의 위치에 세웠다 한다.  이 불상에 얽힌 전설에 의하면 음력 12월에 두 불상이 만나 1년 동안의 회포를 풀고 새벽닭 우는 소리를 듣고 제자리로 돌아가는 남녀상이라고 한다.  

 

불상의 외형은 상당히 투박하다. 처음 이 불상을 대하였을 때 어떻게 보물로 가치를 인정 받았지 하고 의심하여 본다. 유형문화재 중 이보다 준수한 모양의 불상도 있던데 하며 반문하였던 기억이 있다. 지금도 의심은 그치지 않는다. 그것이 지정일이 1963년 초기 지정시에는 나름 가치가 있다고 보았나 보다. 시대적으로 예술적으로, 아님 기록이 왠지 이 불상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나의 안목에는 보물로서의 느낌이 오늘도 들지 않는다.  

다시 찾은 석불상 2기 서로 마주보고 서있는 두불상의 거리는 200미터 정도 오늘은 두 불상의 차이가 뭔지 눈에 새기고 가겠다고 마음 먹는다. 마주 서 있는 2구의 석상은 사다리꼴 모양의 돌기둥에 얼굴, 손, 대좌 등이 표현되어 있다. 머리에는 4각형의 높은 관(冠) 위에 다시 4각형의 갓을 쓰고 있다. 4각형의 얼굴에는 가는 눈, 짧은 코, 작은 입이 간신히 표현되어 있는데, 토속적인 수호신의 표정이다. 목은 무척 짧게 표현되어서 어깨와 얼굴이 거의 붙어 있는 셈이다. 몸은 사다리꼴의 돌기둥으로 굴곡이 없으며, 팔은 표현되지 않고 손이 간신히 배에 나타내었다. 도포자락 같은 옷은 특별한 무늬없이 몇 줄의 선으로 표현하였다. 대좌(臺座)와 불상을 같은 돌에 새겼는데, 앞면을 약간 깍아 대좌같은 모양을 만들고 있다. 사다리꼴의 돌기둥 같은 신체나 비사실적인 조각수법이 마치 분묘(墳墓)의 석인상(石人像)과 비슷하다. 고려시대에 이르면 신체표현이 지극히 절제된 거대한 석상이 많이 만들어지는데 이 불상 역시 그러한 작품 중의 하나로 보인다.

나름의 구분 법을 찾아보고 길을 나선다.

 

효심으로 세운 망모당을 찾는다. 선조(재위 1567∼1608) 때의 문인 표옹 송영구가 은거하던 곳의 후원에 있는 누각이다. 선조 40년(1607)에 부친 상을 당한 뒤에 집 뒤쪽 언덕에 이 집을 짓고, 동쪽 우산에 모셔져 있는 조상들을 추모하였다고 한다.

 

[망모당 정면]
[망모당 옆면]

앞면 3칸·옆면 3칸의 정사각형 건물로,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의 화려한 팔작지붕집이다. 앞면에 있는 4개의 주춧돌은 1m 정도의 높이로 마치 돌기둥 같고, 뒷면은 지반을 계단식으로 다져 얕게 세웠다. ‘망모당’이란 현판은 인연이 있던 중국 사신 주지번이 직접 쓴 것을 새긴 것으로, 왜란이 발발하여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있을시, 허드레 일을 하는 아이의 글 읽는 소리를 듣고 도움을 주었는데, 명나라의 그 아이가 이 망모당을 짓고 은거할 때, 명나라 사신이 되어 찾아와 선친을 그리워하며 세운 망모당에 어려운 이를 궁휼이 여기는 어진 마음과 사제의 의리를 현판으로로 남겼다 한다

 

이제는 집으로 길을 재촉한다. 천주교 성지와 여산동헌, 사라져간 국가 백제의 번성기의 흔적인 제석사지, 미륵사지, 그리고 망보당의 사연으로,  저 마다 사연을 담고 존재하는 문화재를 대하며, 오늘은 참 바쁘게 많은 보고 느낀다고 생각해본다. 시대적, 공간적으로 처해 있는 상황에서, 요구 되는 인간의 가치는 서로 다르고, 어울려 지내는 인간사에도 가해자와 피해자가 늘 공존하여 왔다. 이번의 여행은 남아 있는 것을 보며 옛 사건을 되새겨 보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어차피 모든 것이 내것이 아닌데 , 지금 나의 것도 언제인가는 다른 이의 것이기에, 내가 사는 동안  갖지 못하고 이용 못하면 無라, 나는 오늘도 나의 것이 될 有를 얻기 위한 삶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나 현실적인 생각을 하며 집으로 향한다.

 

如一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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