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예순 여덟번째

세종해피뉴스 2022. 3. 3. 20:42

익산으로 길을 나선다. 최근 여행 간에 수시로 통과한 지역으로 오늘은 익산을  목적지로 찾아본다. 오늘의 관심사는 미륵사지 출토 유물을 관리하기 위한 미륵사지 터에 자리한 익산 국립 박물관이다. 가는 중간에 여산의 동헌이라는 안내판이 눈에 들어온다. 많이 보아온 안내판이다. 궁금하여 길을 빠져 나와 여산의 동헌을 찾아간다. 갈색 안내판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일종의 버릇이다. 참새, 방앗간 단어 생각에 웃음짓는다.

 

[전북 유형 문화재 제 93 호 여산 동헌]

조선시대 여산부 고을의 수령이 업무를 보던 관아건물로, 개조하여 여산 우체국으로 이용하다가 현재에는 경로당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여산면사무소 앞에 자리한 여산 동헌은 번호키를 이용 문이 잠겨 있고, 방문을 희망하는 분은 연락하라는 전화번호 메모가 달려 있다. 아마도 전화하면 번호키의 번호를 일러주려나 생각해본다. 낮은 담장으로 인하여 안이 들여다 보여 주어 폐 끼치지 않고 조용히 들러본다.

건물은 3단의 계단식 건물 터 제일 상단부에 있고 조선 말기에 건축한 것으로 보인다. 벽체와 창호는 모두 유리창으로 개조되어 원형을 잃고 있다고 한다. 비교적 원형이 잘 보전되고, 추녀와 대청 텃마루에서 한식 목조건물의 전형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앞면 5칸·옆면 3칸의 규모의 지붕 옆선이 여덟 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집으로, 낮은 기단 위에 앞면과 왼쪽에는 약 90㎝ 높이의 둥근 주춧돌을 놓고, 뒷면과 오른쪽은 경사지를 이용하여 낮은 주춧돌을 놓았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공포를 짜지 않고 소박한 민도리로 처리하고, 앞뒤에 퇴칸을 둔다. 오른쪽 2칸은 온돌방, 나머지는 대청마루이다. 온돌방이 있는 부분은 주춧돌이 높아 마루바닥에서 불을 땔 수 있도록 하였다. (나만의 문화유산 참조)

 

[백시사터 성지]

여산 동헌의 담장 바로 아래에는 여산 백지사(白紙死)터 성지가 자리한다. 대원군 집정 때인 1866년부터 6년간 진행된 병인 박해인 천주교 탄압시절, 대학살이 감행되는 동안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한 곳이다. 얼굴에 물을 뿜고 백지 붙이기를 여러 번 거듭하여 질식사시키는 방법으로 일명“도모지사( 途貌紙死 )라고도 하며, 쇄국정책의 분노와 증오로 양심과 신앙의 자유가 질식한 곳이다. 동헌 뜰에는 박해 사실을 증명하듯 대원군의 척하비가 있다.

장소가 주는 숙연함과 백지를 사용한 학살에, 인간사 속의 어쩔 수 없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의 역할을 생각해 본다. 이곳서 느낀 감정을 가지고 지나던 길의 다른 성지를 떠올린다.

 

[여산 숲정이순교성지]

길을 다시 돌아가는 곳에 여산 숲정의 순교성지가 있다. 커다란 입석이 그 장소에 대한 유래를 안내한 내용은 ”1866년 병인 박해에 금산 진산 고산에서 잡혀온 신자들이 순교한 곳으로 기록으로만 22명이고, 그 외에도 많은 신자가 순교한 곳이라 한다". 이곳에서 순교하신 분들의 무덤은 천호산 기슭에 있고, 이곳은 공원으로 조성 되어 있다.

박해자의 측면에서 순교자들은 임금의 명을 거역한 역적이다. 그러므로 죽어서도 얼굴을 바르게 세워 하늘을 바라볼 수 없도록 했나보다. 1983년 5월 10일 (여산 순교자들의) 유해를 천호산에서 발굴하였을 때 순교자들의 두개골은 한결같이 얼굴 쪽이 땅에 엎어져 있었다 한다.

 

마음을 달래며 익산으로 향한다. 먼저 신라 무염대사가 처음 지었다는 익산의 심곡사로 향한다. 이전 가보지 못한 사찰이기에 이곳을 찾는다. 이 사찰에는 익산 심곡사 칠층석탑출토 금동불갑 및 금동아미타여래칠존좌상이 있다. 이 보물을 친견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 안한다. 이런 귀하고 적은 유물은 박물관의 전시나 외부에 노출되지 않게 보관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다만 이것이 출토 된 사찰과 탑을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언젠가는 박물관 전시회장에서 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다.

 

[심곡사]

[대웅전]

[소조불상]

이곳 대웅전 안에 모셔진 3불상은 일상 봐왔던 모습과는 달리 특색이 있다.

 

[심곡사 칠층석탑]

이곳 심곡사 칠층석탑과 심곡사 명부전 지장 보살좌상 및 권속은 유형문화재이다.

대웅전 앞마당에 자리한 칠층석탑은 원래는 사찰에서 200m 정도 떨어진 곳에서 이곳으로 옮겨진 것이다. 1층의 받침돌 위에 7층의 지붕돌을 올리고, 작은 연꽃봉우리 모양의 머리 장식을 얹은 형상이다. 바닥돌 위 받침돌에는 엎어 놓은 모습의 연꽃문양과 위를 향한 모습의 연꽃문양이 아래 위로 새겨져 있고. 탑몸돌과 지붕돌이 1매의 돌로 되어 있으며, 탑몸돌에 기둥 모양이 없다. 지붕돌 받침무늬는 3단이며, 처마끝은 모서리에 가서 살짝 들어 올려져 백제탑의 전통을 이어오는 듯 하다. 탑 일부가 고쳐진 흔적이 있고, 받침과 탑몸 부분이 서로 부조화 하지만 고려시대 말∼조선시대 초기 석탑의 양식을 보여준다. 받침부분은 고려시대 탑의 양식, 지붕돌 받침은 조선시대 탑의 양식, 지붕돌은 백제탑 양식을 모두 간직하여 익산 지역에서 석탑 변화과정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백자항아리와 치아사리]

이곳 중대석의 사리공에서 발견된 백자 항아리 안에는 별도의 사리병이나 용기 없이 곱은옥 형태의 치아사리와 향목,그리고 금동불상이 있었고, 2012년 6월 석탑의 해체 수리시, 지대석 윗면에 마련된 사각형의 홈(25.0×24.0cm, 깊이 18.0cm)에서 보물인 익산 심곡사 칠층석탑 출토 금동불감 및 금동아미타여래칠존좌상이 발견된다. 

 

불감은 밑판, 좌우측면판, 뒤판, 뚜껑 등이 각각 1판으로 제작되었고 문비만 2판으로 제작되었다. 뚜껑은 지붕의 네 면의 모를 죽인 녹정형(盝頂形)으로 정상에는 2개의 고리가 달려 있다. 감실의 내면 중앙벽면에는 타출기법으로 아미타여래설법도를 나타내었고, 문비에는 역동적인 금강역사를 배치하였다.

7구의 불상은 불감의 앞쪽에서 아미타여래와 관음·대세지보살상이, 뒤쪽에서 2구의 여래와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이 있었다. 이들 불상은 높은 육계, 큼직한 연봉모양의 정상계주, 잘록한 허리와 육감적인 신체표현과 감각적인 세부 표현, 삼각형 모양으로 앙·복련(·覆蓮)이 맞닿은 연화좌, 원반모양의 귀고리, U자형으로 두껍게 늘어진 목걸이 등을 보이고 있다. 이 시기에 크게 유행했던 (원·명대)元․明代 라마불교의 영향을 받아 제작된 여말선초기 소형 금동불상들과 양식적으로 상통하는 요소이다.

7구의 불상은 2개의 양식군으로 분류되는데, 라마불상양식을 강하게 반영한 아미타여래삼존상과 이들 양식을 수용하여 어느 정도 우리식으로 변모시킨 4구의 불·보살상으로 구분된다. 따라서 이들 불상을 통해 여말선초기 원․명대 외래 양식의 전래와 수용 과정을 살필 수 있어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며, 또한 분명한 출토지에 7구의 불상이 모두 한 불감 내 온전한 형태로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지정가치가 크다. (나만의 문화유산 해설사 발췌)

심곡사에서는 치아사리를 위한 적멸보궁 불사를 진행중이다. 아울러 보물 제 1890호 인 익산 심곡사 칠층석탑 출토 금동 불감 및 금동 아미타여래 칠존좌상은 박물관 기획전에 전시물로 등장하기도 한다. 앞으로 관심을 가지고 다시 접할 기회를 갖고저 한다.

 

[심곡사 명부전 지장보살좌상 및 권속]

심곡사의 명부전 안에 모셔진 26구의 불상으로 지장보살과 시왕 및 그 권속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그 양옆에 도명존자, 무독귀왕이 자리하고 있으며 주위에 시왕상 각 3구씩 6구와 동자상 3구가 있다. 또한 명부전의 북쪽편에는 시왕상 2구, 사자상 3구, 동자상 1구가 있으며 남쪽편에는 시왕상 2구, 사자상 2구, 동자상 2구가 자리하고, 가운데 출입문 좌우에는 금강역사 2구가 자리하고 있다. 26구 모두 흙으로 만든 소조상으로서 지장보살과 시왕상은 앉은 모습이며, 사자상, 금강역사, 동자상은 서 있다.  

지장보살좌상은 스님과 같은 머리 모양을 하고 있다. 양어깨를 모두 감싼 옷을 입고 있는데 그 표현이 매우 두터운 편이다. 아래로 흘러 내린 옷주름은 결가부좌한 다리를 감싸고 있다. 두 손은 각각 엄지와 중지를 맞대어 오른손은 무릎에, 왼손은 오른발 위에 올려 놓고 있는데, 이 두 손은 몸체와 구분하여 따로 만들어 끼운 것이다.

 

[나한전]

야외에 신개념으로 모셔진 나한상, 아마도 추후는 나한전을 지어 모시려는지 궁금하다.

 

[마애불]

나한전 위로 조금 걸으면 바위에 모셔진 마애 좌불 이곳도 예불 올리는 전각이 가건물로 지어져 있어 앞으로 많은 불사가 요구 되는 사찰이라는 느낌을 갖는다.

사찰을 둘러본다. 근간에 조성한 여래불이 있으며, 사찰 뒤편으로 요사체를 새로이 증축하고 있다.

사찰의 중흥을 바라며 벗어나, 미륵산을 바라보며 익산 박물관으로 가다보니 태봉사가 눈에 들어온다. 이곳에도 도유형문화제인 태봉사 삼존석불이 있어 찾아들어가 본다.

 

안내 글귀에 사찰의 창건에 대한 문헌자료는 전혀 알 수 없으나, 태봉사 창건 주지의 생모인 청송심씨 묘연화가 3대 독자인 아들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산신기도 중 산신의 현몽으로 삼존불상(三尊佛像)을 발견하였고 이를 계기로 불당을 짓고 절을 세웠다고 전한다. 오래지 않은 사찰의 전각인 대웅전으로 들어선다.

 

                                                                               [태봉사 전경]                                                                                            
[대웅전 내부]

가운데 석조 삼존불상을 중심에 두고 왼쪽에 지장보살 오른족에 소조 삼존불상이 함게 자리한다.

 

[태봉사 삼존석불]

백제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이 석불은 부채꼴의 거대한 한 장의 광배(光背)에 부조기법으로 새긴 삼존불상(三尊佛像)으로, 태봉산 동쪽 기슭에 파손된 채 방치되던 것을, 이곳에 태봉사를 건립하여 보존하고 있다. 세 부처를 새긴 삼존불상은 왼쪽의 정병을 들고 합장한 모습의 보살과 오른쪽의 연꽃가지를 들고 있는 동자승 형태의 보살이 좌우에 서서 본존불을 모시고 있는 모습이다. 사각형 대좌 위에 책상다리(결가부좌)를 하고 앉아있는 본존불은 왼손은 내려 배에 대고 오른손은 들어 가슴에 댄 특이한 손 모양을 하고 있으며, 단정한 인상을 준다.

 

 

 

정작 보고자 했던 보물 제1890호 익산 심곡사 칠층석탑 출토 금동불감 및 금동아미타여래칠존좌상는 문화재청 자료로 그모습을 알아본다.

길을 나서 다음 여행지로 향한다.

 

如一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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