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예순한번째 - 완주(2)

세종해피뉴스 2022. 1. 20. 22:31

완주에 있는  완주 송광사로 향하여 길을 나선다. 가는 길목은 대야저수지를 끼고 돌면 겨울 풍경을 만끽할 수 있는 멋진 풍광을 보여준다. 대야저수지를 끼고 돌아 동상저수지를 오른편으로 길을 접어들어 위봉산성으로 향하면  위봉 폭포를 만나게 된다. 추위로  폭포 가까이 가지는 못하고 길 한편의 전망대에서 얼음 사이로 실가닥 처럼 떨어지는 폭포를 내려다 본다. 폭포는 크게 이단으로 길게 이어지며 떨어지는데, 겨울이라 수량이 많지 않게 느껴지나 계곡을 굽이 굽이 내려오는 모습이 길게 이어지고, 폭포의 접근이 다른 어느것 보다 어렵지 않아 볼거리라 생각한다. 위봉산성의 동문쪽에 자리한 이 폭포는 높이가 60m로 폭포주변의 바위들과 수목으로 인하여 완산 8경 중의 하나이다. 여름날 장마후의 폭포를 연상하며 고개를 넘는다.

 

[이전의 폭포 전경, 방문시의 폭포전경]

이 폭포의 상단을 지나 오른쪽 길로 접어들면 위봉사가 자리한다. 위봉 산성의 안에 자리한 이절의 법당도 보물로 지정되어 있어 위봉사로 향한다. 너른 주차장과 잘 지어진 너른 절마당 그리고 큰 소나무가 기억되는 위봉사는 언제 찾아도 밝고 깔금한 사찰이다.  

주즐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위봉사는 백제 무왕 5년(604)에 서암대사가 지었다는 설과 신라말에 최용각이라는 사람이 절터에서 세 마리 봉황새가 노는 것을 보고 위봉사(圍鳳寺)라 이름 지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처음 지어진 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고려 공민왕 8년(1358) 나옹화상이 절을 크게 넓혀 지었고 조선 세조 12년(1466) 석잠대사가 수리하였다고 한다. 조선 고종 5년(1868) 포련선사가 60여 칸의 건물을 지을 당시만 해도 큰 규모의 사찰이었으나, 여러 번의 화재로 인해 지금은 그 규모가 매우 축소되었다. 위봉사에는 『묘법연화경판』과 『동국여지승람목각판』이 보관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동국대학교박물관과 전주시립박물관에 30여 쪽이 보관되어 있다.

 

[일주문]
[일주문 옆면]
[사천왕문]
[사천왕상]
[봉서루]

이곳을 지나면 경내로 들어서게 된다.

 

[위봉사 경내]

 

[보물 제 608 호 완주 위봉사 보광명전]

 

[보광명전 옆면]
[보광명전 옆면]
[보광병전 뒷면]
[보광명전 삼존불상]
[보광명전 내부주악비천도]

보광명전은 정유재란에 피해를 입어 17세기경에 다시 지어졌으며, 조선 후기에도 여러차례 정비 한 것으로보인다. 보광면전 불단에는 본존불인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양옆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상이 모셔져 있으며 용과 여의주를 장식한 닷집이 설치되어 있다. 불단 뒷편에 좌우벽체에는 흰옷을 입은 백의관음도 1점과 부처님께 음악으로 공양을 올리는 것 같은 주악비천도 6점이 있다. 

위봉사 보광명전은 건축 수법으로 보아 17세기경에 지은 건물로 추정하며 ‘보광명전(普光明殿)’이라 적힌 현판은 조선 순조 28년(1828)에 쓴 것이라고 한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부분에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건물 안쪽은 천장 속을 가리고 있는 우물 정(井)자 모양의 우물천장으로 꾸몄다. 불단 위쪽으로 운룡(雲龍)과 여의주 모양의 구슬을 장식한 닫집을 만들어 놓아 불상에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비교적 채색이 잘 보존된 금단청은 차분하고 아늑한 법당 안의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우수한 옛 채색 기법과 조선시대 목조 불전건축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는 문화재로 평가 받고 있다. (문화재청 참조)

경내에 있는 전각을 둘러본다.

 

[관음전]
[극락전]

요사는 스님들이 생활하는 공간을 말하는데, 위봉사의 요사채는 앞면은 극락전으로 뒷면은 요사로 사용되는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범종각]
[위봉사]
[지장전]
[위봉사 전경]

위봉사에서 송광사로 이동하는 길가에 노출된 위봉산성을 찾아본다, 조선 후기 변란을 대비하여 주민들을 대피 시켜 보호할 목적으로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숙종 원년(1675)~숙종 8년(1682)에 쌓은 포곡식 산성이다. 순조 8년 고쳐 지었다. 성벽 둘레는 약 8,539m, 성벽 높이는 1.8~2.6m 이고 관련 시설물로는 성문 4개소, 암문지 6개소, 장대 2개소, 포루지 13개소, 추정 건물지 15개소, 수구지 1개소가 확인되었다.

일부 성벽을 제외 하고는 성벽 및 성문, 포루, 여장, 총안, 암문 등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다른 산성과는 달리 군사적 목적 뿐만이 아니라, 유사시 태조 이성계의 어진과 전주이씨의 시조인 이한공의 위패를 옮겨서 보호하려는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 산성안에 행궁을 함께 만들었으며 이외에도 위봉사, 내성장, 장대, 위봉진, 장교청, 군기고 등 을 설치, 영정을 모시기 위한 행궁을 성 내부에 두는 등 조선 후기 성곽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실제로 전주가 동학 농민군에 함락되자 태조 어진과 위폐를 이곳에 모셔왔다가 행궁이 오래되어 모시기 마땅하지 않아 일시적으로 위봉사 대웅전으로 모셨다고 한다. 

 

[위봉산성]

태조암까지는 발길을 옮기지 못하고 아쉬움으로 간직하고,  송광사의 여행을 다음으로 미루며 다시 완주를 찾을 것을 다짐해본다. 하루 사찰여행은 안심사, 화암사, 위봉사로 마치려 한다. 송광사는 나름 규모가 크며,  많은 문화재로 인하여 다음에 기회를 보아 다시 방문하여 다른 보물 들과 함께 찾아보려 한다.

추운 겨울이래도 사찰 입구까지 차로 이동 할 수 있슴을 감사하며 다녀간 사찰마다의 특이점을 비교 상기하며 집으로 향한다. 

 

如一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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