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예순번째 - 완주 안심사 금강계단, 화암사 우화루, 화암사 극락전

세종해피뉴스 2022. 1. 20. 22:22

완주로 길을 나선다 . 찬 냉기가 옷깃을 여미게 한다. 완주는 전주시를 감싸 안은  남북으로 길게 자리한 군이다. 그리고 전북에서 가장 큰 군이다. 완주(完州)'란 이름 자체가 전주의 옛 이름인 '완산주(完山州)'에서 따온 이름이고, 한자로도 '전(全)'과 '완(完)'은 뜻이 같다고 한다. 이곳은  전주와의 통폐합 이슈가 있는 지역이다. 우선 논산과 인접한 운주면에 자리한 안심사에 있는 보물인 금강계단을 찾아 대둔산 도립공원 안으로 들어 선다. 대둔산을 마치 병풍 두르듯 뒤로 하고 자리한 이 사찰로 향하는 길은  넓지 않은 길을  3키로 이상 들어가야 한다. 그리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길을 따라가면 사찰의 입구인 일주문을 만난다.

 

[안심사 일주문] 

이곳을 지나 대둔산을 향하여 조금 더 들어가면 안심사  주차장에 도착 계단을 오르며는 법당있는 마당에 당도한다.

 

[안심사 전경]

대둔산 안심사는 신라 선덕여왕 7년 (서시 638년)에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기록이 있고, 그 뒤 헌강왕 7년 (서기 875년 )에 도선국사에 의해, 신라말기엔 조구 화상에 의해, 조선 선조 34년(서기 1601년)수천화상에 의해, 숙종 39년에 (서기 1710년) 신열선백에 의해 다섯번의 중창이 있었다 한다.  6.25 이전까지 30여채의 전각과 13개의 암자가 있었던 사찰이, 전쟁 당시 아군에 의해 불 타버린 후  현재는 당시의 그 모습을 찿아볼 수가 없고, 다만 부처님 진신사리와 치아사리를 모신 적멸보궁 사리탑과 안심사의 역사를 말해주는 안심사 사적비가 전한다.

 

[완주 안심사 적광전]

원래 대웅보전이 존재하였는데 당시 복원이 어려워 우선 적광전을 먼저 신축했다. 대적광전이라 명하지 않고 적광전이라 한것은 추후 대웅보전의 복원을 염두에 두고 ' 대'字를 뺀것이 아닌지, 

 

[적광전 내 비로자나부처님] 
[대웅보전]

한국 전쟁 당시 국군이 철수하며 소각한 자리에  대웅보전을 복원한 것으로, 2층 구조로 2층에는 한글언해본 대장경판이 보존되어 있었는데 이때 소각되었다고 한다 .

 

[안심사 대웅전 삼존불]
[안심사 동종]

고산 대둔산 안심사라는 명문이  또렷한 이 동종은 크게 세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종의 맨위에는 용뉴 (꼭대기장식)와 음통이 명확하게 남아있는데, 특히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과 음토 끝 장식은 조선 시대에 주조한 종 가운데 신라적 전툥을 잘 유지 하고 있다.  상대에는 범어가 새겨져 있고 가운데는 보살상 4구가 부조되어 있다. 유곽도 4군데가 완벽하게 남아있다. 하대에는 종의 주조연대와 관련 시주자의 성명이 남아 있다. 주목할 것은 동종이 처음 주조된 것이 아니라 개주 된 것이다. 1759년 안심사 사적비를 세우고 나서 기존의 동종을 보수하여 다시 주조한 것이다.  

이 동종은 안심사 법당 내에 봉안되어 있었으나 6․25전쟁때 외부로 유출되어, 충남 금산 보석사에 봉안하고 있다가 2004년에 안심사로 반환되었다.

종의 몸체 하단에 양각되어 있는 주성기(鑄成記)에 의하면 이 종은 1760년(건륭 25)에 고산 대둔사 안심사에서 조성되었으며, 무게는 370근 이고 백홍진, 유도용 등 장인에 의해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종은 전고(全高) 97cm, 용뉴(龍鈕) 17.5cm, 음통(音筒) 20.5cm, 직경(直徑) 63cm의 아담한 규모이다. 종 윗부분에는 s자형으로 몸을 휘어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 한 마리가 마치 앞으로 나아가듯 역동적인 모습으로 조각되었다. 용은 머리를 약간 치켜들고 큼직한 발을 힘차게 뻗어 내딛고 있으며 입은 크게 벌려 안에는 혀를 말아 구슬을 움켜지고 있는데 꼬리로 음통을 휘감고 있는 모습이 긴장감 있으면서도 탄력적으로 느껴진다. 용두의 뒤쪽으로는 원통형의 음통이 붙어있는데 몸체에는 초화문대가 조각되어 있으며 윗부분에는 화려하게 피어난 연꽃송이로 마감하였다. 종신(鐘身)의 형태는 입구가 약간 벌려진 듯 하나 전체적으로 아담하면서도 균형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천판과 종신이 만나는 부분은 가는 조선(條線)으로 구분하였으며 그 아래 상대에는 2줄의 범자문원권대(梵字文圓圈帶)로 장식하였다. 이처럼 범자문으로 상대를 장식하는 기법은 조선후기에 보이는 특징으로 중국종에서 상대에 범자문을 배치한 것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상대 아래에는 약간의 간격을 두고 사다리꼴 모양의 유곽대(乳廓帶)와 보살상을 교대로 배치하였다. 유곽의 둘레는 당초 줄기 안에 국화문같은 화문을 장식하였는데 사실적인 꽃모양이 돋보이며 내부에는 9개의 유두(乳頭)를 배치하였다. 12엽의 연꽃 위에 봉긋하게 솟아있는 유두는 도톰하게 묘사하여 부피감이 느껴진다. 유곽과 유곽 사이에는 왼쪽으로 몸을 틀고 우아하게 서 있는 보살입상이 4구 주조되었는데, 원형의 두광을 지니고 연꽃대좌 위에 서 있는 보살상은 화려한 보관을 쓰고 두 손을 모아 합장한 모습이 조선후기 불화의 보살상 양식과 흡사하다. 이 종의 하단부는 2조의 돌기선이 둘러져 있고 그 사이에 문양대가 양각으로 새겨져 있다. 명문은 종신 하단에서 약 13.5cm 정도 떨어진 곳에 돌려가며 주조되었다.

 

대웅보전이 오른쪽 뒷편에는 보물인 금강제단이 자리한다.

 

[금강계단과 부속물들]
[보물 제 1343호 완주 안심사 금강계단]
[금강계단, 참배건물과 대웅보전]

완주 인심사 금강계단은 조선 영조35년 (1759) 이전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금강계단은 출가자가 부처님이 정한 계율에 따를 것을 서약하는 수계의식이 이루어 지는 곳이다.

완주 안심사 금강계단은 부처의 치아사리(齒牙舍利)와 의습(衣襲)을 봉안한 불사리탑으로, 중앙의 불사리탑(높이 176㎝)이나 네 구의 신장상(높이 110㎝∼133㎝), 그리고 넓은 기단을 형성한 방단의 석조 조형물들은 그 조형 수법이 매우 뛰어나다.

안심사의 금강계단은 축대를 쌓고 그위에 연꽃무늬와 격자문양 등으로 장식한 기단으로 조성되다. 이 기단의 네모서리에는 갑옷 차림에 투구를 쓰고 칼로 무장한 장군 형상을 한 신장상이 계단을 지키고 있다. 북동쪽의 신장상 가까이에는 크고 네모난 돌이 놓여져 있는데  이것은 부처님게 절을 올리는 배례석으로 추정된다.

기단 중앙부에는 팔각형의 받침돌을 두고 그위에 종모양의 사리탑을 설치하여, 이 사리탑은 부처님이 늘 이곳에 계신다는 것을 상징한다. 완주 안심사 금강계단은 인근에 위치한 안심사 사적비(전라북도 유형문화재)에 그 조성 기록이 남아 있으며, 전라북도 유형문화재(1984지정) “안심사계단 및 승탑군”에서 “안심사계단”만 분리되어 보물로 승격되었다. 

 

전쟁으로 인한 문화재의 손실을 느낄 수 있는 장소로 2010년 이전에는 대웅보전이 건설되기 이전에는 금강계단과 대웅보전 터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한다

지금도 이 사찰은 예전의 모습을 회복하고저 노력하고 있는 모습이 보이고 있다. 특히 금강계단을 향한 기도처는 아직도 가건물로 지어져 있어 반듯한 전각을 하루 빨리 갖게 되기를 기원해 본다.

새로이 지어진 전각들과 자리를 함께 한 보물인 금강계단을 뒤로 하고 인근의 화암사로 발길을 돌린다.

 

흔하지 않은 국보로 지정된 법당을 가지고 있는 화암사는 주차장 으로 부터 15분의 거리를 도보로 올라 가도록 되어 있다.  

화암사는 불명산 시루봉 남쪽에 있는 절로 본사인 금산사에 딸린 절이다. 절을 지을 당시의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원효와 의상이 유학하고 돌아와 수도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신라 문무왕 이전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1981년 해체·수리 때 발견한 기록으로 조선 숙종 37년(1711)까지 여러번에 걸쳐 수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화암사 전경]
[ 우화루 옆면 ]
[사찰안에서 본 우화루]
[우화루 내부]
[우화루의 목어]

이 건물은 극락전의 정문과 같은 성격의 누문형식인데 정면만을 누문형식으로하고 후면은 단층건물로 한 반루각식으로 되어 있다. 
우화루는 화암사 경내에 있는 극락전 정문과 같은 성격의 루이다. 지금 있는 건물은 조선 광해군 3년(1611)에 세운 것으로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수리한 건물이지만 크게 변형되지는 않은 건물이다.
정면 지층의 기둥은 4칸이나 2층에서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되어 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안과 밖이 모두 3돌출목향식으로 기둥 위 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집 양식이다. 공포 부재의 조각솜씨는 조선초기 양식이 가미된 듯하다. 내부는 남쪽 중앙에 고주 2개를 세워 대들보를 그위에 얹고 한쪽으로 이어진 퇴량은 평주위 공포에 얹게 한다. 천장은 연등 천장이며 대들보와 고주위에는 화반형식의 포작을 짜서 동자기둥의 기능을 하도록 하고 있다. 1층은 기둥을 세워서 바깥과 통하게 하고, 뒤쪽에는 2층 마룻바닥을 땅과 거의 같게 놓아 건물 앞쪽에서는 2층이지만 안쪽에서는 1층집으로 보이게 한 건물이다.

 

우화루 뒷편에 극락전이 자리한다. 사찰은 크지 않게 모여 있다.

극각전은 1980년 6월 11일 보물 제663호로 지정되었다가, 2011년 11월 28일 국보 제316호로 승격된다. 완주 화암사 극락전은 중국 남조시대의 건축양식인 하앙식 건물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여 국보로 지정된 듯 하다.

 

[극락전] 
[국보 제 316호 완주 화암사 극락전]
 [극락전 아미타삼존불상 (내부 촬영금지로  예전 자료)]
[극락전  공포와 하앙식 구조]
[극락전 건물]
[극락전 뒷면]
[극락전  옆면]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극락전은 1981년 해체·수리 때 발견한 기록에 따르면, 조선 선조 38년(1605)에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앞면 3칸·옆면 3칸 크기에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며 소박하고 작은 규모를 보이고 있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부분에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건물 안쪽 가운데칸 뒤쪽에는 관세음보살상을 모셨으며, 그 위에 지붕 모형의 닫집을 만들어 용을 조각하였다. 화암사 극락전은 우리나라에 단 하나뿐인 하앙식(下昻式) 구조이다. 하앙식 구조란 바깥에서 처마 무게를 받치는 부재를 하나 더 설치하여 지렛대의 원리로 일반 구조보다 처마를 훨씬 길게 내밀 수 있게 한 구조이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근세까지도 많이 볼 수 있는 구조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것으로 목조건축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현대에 복원된 사찰과 오랜간 보전되어 온 건축물을 가진 사찰을 한번에 경험한 오늘, 나에게는 새로운 단청을 가진 신생 사찰보다도 고즈녁하고 산중에  깊이 자리하여, 사람의 발길이 드문 도량이 더 매력적인 것 같다.  현재가 시간이 가면 과거가 되는 시간의 흐름 속에,  지금이라도  새로이 옛것을 복원하려는 사찰이나,  오래간 유지 관리되어온 사찰  모두 미래에는 그 시대를 반영하는 문화재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해본다. 오래되고 새로운 것이 긴역사속에는 큰차이가 없을 것 같다. 내가 하는 여행이 시간여행 이라는 생각으로 , 또 다른 과거의 흔적인 보물을 찾아 발길을 완주의 남쪽으로 향한다.  

 

如一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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