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쉰아홉번째 - 공주

세종해피뉴스 2022. 1. 13. 00:10

오늘은 공주 마곡사로 향한다. 주말의 마곡사에 관람객이 봄날보다 그리 많지 않다. 마곡사 창건은 신라 선덕여왕 9년 (640) 자장율사가 세웠다는 설과 신라의 승려 무선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세웠다는 두 가지 설이 전한다.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는 1851년 쓰여진 태화산 마곡사 사적 입안에 따르면, 640년 신라의 자장율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는데 보다 뚜렷한 창건기록은 9세기 중반으로 보여진다.

사찰로 들어 서는 곳의 일주문이 보인다.

 

[마곡사 일주문]

마곡사는 신라말부터 고려 전기까지 폐사되었던 절로 고려 명종 2년(1172) 보조국사가 절을 다시 세웠으나, 임진왜란 뒤 60년 동안 다시 폐사되었다. 훗날 조선 효종 2년(1651)에 각순대사가 대웅전·영산전·대적광전 등을 고쳐 지었다고 한다. 

 

 

마곡사는 2018년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지정된 사찰이다.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은 주변 자연을 경계로 삼아 산 안쪽에 위치한 입지 특성을 갖고, 오늘날까지 불교 출가자와 신자의 수행과 신앙, 생활이 이루어지는 종합적인 승원이다. 마곡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지정된 사찰은, 통도사, 부석사, 봉정사, 법주사, 선암사, 대흥사 사찰이다. 7~9세기에 걸쳐 중국으로부터 대승불교의 다양한 종파를 수용하여 많은 사찰이 창건되었는데, 당시 사찰이 수도인 경주 등 도시에 위치한 것과 달리 등재된 7개 산사는 산지에 창건 되었다.

사찰로 들어서면  영산전이 있는 건물 군과 해탈문이 보인다. 마곡사는 개울을 사이에 두고 남원 (영산전영역, 수행공간), 북원(대웅보전영역, 예불공간) 두개의 원으로 구분된 특이한 가람구성을 갖고 있는데 영산전이 있는 곳이 남원이다.

 

 [해탈문]

해탈문은 마곡사의 정문으로 이 문을 지나면 속세를 벗어나 불교 세계에 들어가게 되고, 해탈을 하겠다는 마음을 갖게 된다고 한다. 중앙 통로 양쪽 편에 금강역사상과 문수동자상 등을 모시고 있다.

이곳을 지나면 거치게 되는 천왕문은 사천왕상이 계시는 곳인데 지금의 차앙막에 가리워져 보수 공사 중이다. 겨울에 많은 문화재가 가는 곳마다 보수 중 인것은  찾는 사람이 적어서 일까 생각해본다. 모습을 담을 수 없는 아쉬움을 가지고 옛 방문한 모습을 올려 보기로 한다.

 

[사천왕문  2018년도 사진] 

천왕문은 조선 후기에 세웠으며, 건물에 남아 있는 기록으로 보아 1910년에 고쳐 지었다고 한다. 절 입구에서 두번째 있는 문인 천왕문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천장은 지붕의 뼈대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연등천장으로 꾸몄고, 안쪽에는 동서남북 4지역을 지키는 사천왕상과 그림이 있다. 

 

해탈문의 왼편에 남원 (영산전영역, 수행공간)이 있다. 낮은 계단을 오르면 영산전과  매화당, 수선사 홍성루가 사각배치로 자리한다. 이곳은 스님의 수행공간이다.

 

[영산전 전면]
 [영산전 옆면, 매화당 , 홍성루]
 [ 영산전 내부]
[영산전 칠불좌상]

보물 제800호인  공주마곡사 영산전은 석가모니불과 일대기를 담은 팔상도를 모신 법당을 가리키는데, 이 건물은 천불(千佛)을 모시고 있어 천불전이라고도 부른다. 조선시대 각순대사가 절을 다시 일으키면서(1651) 고쳐 지은 것으로 마곡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며 해탈문 서쪽에 자리잡고 있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이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부분에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건물 앞쪽에 걸린 현판은 세조의 글씨라고 하며 안쪽은 천장 속을 가리고 있는 우물 정(井)자 모양의 천장으로 꾸몄다.

 

마곡사 영산전 칠불좌상은 1681년 수화승 단응을 중심으로 계천, 성환, 탁밀 등 20여명의 조각승이 함께 제작한 작품으로 현재 전하는 조선후기 불상 가운데 천불상의 주존불로 제작된 유일한 사례이다. 또한 단응이 수화승으로 독립해서 제작한 불상 중 가장 이른 사례이며, 특히 그의 활동 지역으로 알려진 경상도만이 아니라 충청남도에서도 활동하였음을 알려주는 사례이다. 불상의 특징 가운데 방형의 얼굴이 뚜렷한 이목구비라든가 배 부분에서 W형으로 접힌 대의와 편삼자락은 단응만의 특징적인 표현으로 알려져 있다.
2013년 칠불좌상에서 후령통과 발원문을 비롯해 경전 잔편 및 다리니 등 77건의 복장유물이 확인되었는데 그중에는 무량사판으로 추정되는 묘법연화경(1496년)과 흥복사판 묘법연화경(1586년) 등 서지학상 중요한 자료도 포함되어 있다. 마곡사 영산전 불상은 칠불로 구성된 예경대상으로 희귀한 사례이자 17세기 후반 충청남도에서 활동한 단응의 불상으로 미술사적 가치가 높다.

 

사천왕문을 따라 들어가면  냇가를 건너기 전에 명부전과 산신각이 있다.

 

[명부전과 산신각]

명부전은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에 명부시왕상을 모시고 있어 지장전·시왕전이라고도 한다. 지장보살은 모든 인간을 교화시키는 역할을 맡았으며, 시왕은 염라대왕을 비롯한 10명의 지옥 심판관이다.

명부전 뒤에 보이는 건물이 산신각이다.

 

 

극락교를 통해 개울을 건너 북원으로 향한다. 이제부터는 예불을 들이는 공간이다.

개울 건너면 지은지오래지 않은 범종각이 있다.

 

[범종각]

북원을 들어서면 눈에 들어오는 탑이 있다 . 형태가 여타의 석탑과는 어딘가 다른 형상이라 생각한다. 대광보전 앞에 자리한 오층석탑 주변은 많은 불자들이 소원을 적은 패찰이 탑을 두른다.

 

[ 보물 제 799호 공주 마곡사 오층석탑]
 [ 탑에 새겨진 문양]

공주 마곡사 오층석탑은 탑 전체의 무게를 받쳐주는 기단(基壇)을 2단으로 쌓고, 그 위로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후 머리장식을 올린 모습이다. 탑신의 몸돌에는 부처, 보살 등을 조각해 놓았고, 지붕돌은 네 귀퉁이마다 풍경을 달았던 흔적이 보이는데, 현재는 5층 지붕돌에만 1개의 풍경이 남아 있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이 탑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으로, 중국 원나라의 라마탑과 그 모습이 비슷하다. 길쭉한 감이 있어 안정감은 적으나 당당한 풍채로 버티고 서있다. 만들어진 시기는 머리장식의 독특한 모습으로 보아 원나라의 영향을 받았던 고려 후기 즈음으로 여겨진다. 즉 고려 후기 당시 원나라와의 문화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라마교 계통의 문화도 고려에 들어오게 되는데 이 탑은 그 문화의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탑 안의 보물들을 거의 도난당하였으나, 1972년 해체하여 수리하는 과정에서 동으로 만든 향로와 문고리가 발견되었다.

 

탑 뒤편에 자리한 대광보전이다. 현재는 단청이 오래되어 그 자체로도 멋스럽다. 문틀의 문양도 눈에 드는 전각이다. 하지만 이곳도 보수작업 중이다. 아마도 다음에 단청이 드리워진 모습을 보게 될 것 같다.

 

[대광보전 정면]
[보물 제 802호 대광보전 옆면] 
[대광보전 측면: 오른쪽]
[대광보전 내부]

대광보전은 마곡사의 중심 법당으로 해탈문·천왕문과 일직선으로 놓여 있다. 진리를 상징하는 비로자나불을 모신 건물로 처음 지은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불에 타버렸던 것을 조선 순조 13년(1813)에 다시 지은 것이다. 지금은 단청불사를 하고 있어 내부가 다소 산만하지만, 불자님들은 가득한 불심으로 비로자나불에 참배하고 있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앞면 5칸에는 3짝씩 문을 달았는데 문살은 꽃 모양을 섞은 조각으로 장식하였고 가운데 칸 기둥 위로 용 머리를 조각해 놓았다.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꾸몄고, 불단은 서쪽으로 마련하였는데 불단 위에는 불상을 더욱 엄숙하게 꾸미는 닫집을 정교하게 꾸며 달았다. 안팎으로 구성과 장식이 풍부하고 건축 수법이 독특한 건물로 조선 후기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곳의 비로자나불의 뒤편에는 백의 관음상이 보수를 기다리고 있다. 복원을 통한 멋진 모습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위쪽의 대웅보전으로 오르는 계단길은 둥글게 아치를 조성하여 연꽃 등을 달고 있다.

 

 [보물 제 801호 대웅보전 전면]
[공주 마곡사 대웅보전 옆면]

오른 쪽의 연등 터널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대광보전 뒤의 대웅보전을 맞이한다. 이층 건물같아 보이는 보물 제 801호 인 대웅보전의 위용은 가히 보물로의 가치를 가지고 있어 보인다. 대웅보전은 석가모니불을 모신 법당을 가리키는데 이 법당은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약사여래불·아미타불을 모시고 있다. 조선시대 각순대사가 절을 다시 일으킬 때(1651) 고쳐 지은 것이라고 한다. 규모는 1층이 앞면 5칸·옆면 4칸, 2층이 앞면 3칸·옆면 3칸이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다. 이를 다포 양식이라 하는데 밖으로 뻗쳐 나온 부재 위에 연꽃을 조각해 놓아 조선 중기 이후의 장식적 특징을 보이고 있다. 건물 2층에 걸려 있는 현판은 신라 명필 김생의 글씨라고 한다. 건물 안쪽은 우물 정(井)자 형태로 천장 속을 가리고 있는 천장을 2층 대들보와 연결하여 만들었고 마루도 널찍해 공간구성이 시원해 보인다. 조선 중기 2층 건물로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높고 큰 건물안에는 목조 삼세 불상이 모셔져 있다. 

 

 [대웅보전 목조삼세불상]

중앙에 위치한 석가불은 항마촉지인의 수인에 왼손은 무릎에서 수평으로 뉘어 2지와 3지를 거의 직각에 가깝게 구부렸다. 아미타여래상은 중품하생인, 약사불은 반대의 중품하생인의 수인을 하였으나 약함은 놓여 있지 않다. 석가불은 오른쪽 어깨를 둥글게 덮은 변형식의 편단우견을 입었으며, 양쪽의 여래상들은 속에 편삼을 입은 모습이다. 세 여래상은 착의법과 수인형식을 제외하면 거의 비슷한 형상인데 전체적으로 얼굴이 작고 신체의 비례가 짧은 작고 단정한 모습이다. 양 어깨에서 흘러내린 옷주름들이 한 번씩 반전되어 접혀져 내려오면서 대의의 끝단을 둥글게 처리한 점이나 양 무릎 밑으로 흘러내린 옷주름들이 가파른 속도감을 보이면서 양측으로 접혀져 흘러내린 모습, 왼쪽 무릎에 유난히 크게 표현된 소매자락 등이 특징적이다. 

머리의 육계는 밋밋하며 중간계주와 정상계주는 따로 만들어 끼워 넣었다. 얼굴은 둥글고 작으며 거의 일자에 가깝게 처리된 얇은 입술이나 구부린 손가락의 표현 등은 같은 시기 다른 불상에 비해 부드러우면서도 사실적이다. 이 불상과 관련된 복장물은 아직 조사된 바 없어 정확한 조성연대는 알 수 없다. 다만 불상이 안치된 대웅보전은 각순(覺淳)대사와 공주목사 이주연(李奏淵)이 1651년에 중창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 비슷한 시기에 제작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또한 이 시기인 1650~1659년 사이에 마곡사 주지를 지낸 운혜(雲惠)는 당시 유명한 조각장인으로 「사적기」에는 그가 편수를 맡았다는 기록도 있어 이 불사에 총책임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삼세불상은 17세기 중엽에 조성된 작품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공주 마곡사 대웅보전 목조삼세불상은 17세기의 시대적 특징을 보이면서도 둥글고 작은 얼굴에 짧은 비례라든지 주름의 폭이 넓으면서 그 끝단을 부드럽게 둥글게 처리한 점, 그리고 왼쪽 무릎 위에 유난히 크게 표현된 소매자락 등은 같은 시기 다른 불상과는 다른 점이다. 17세기 삼세불상을 대표하는 목조삼세불상 가운데 하나로 조형적으로 우수하고 연구가치도 높다.

 

또한 이곳에 우리가 평소에는 볼 수 없는 보물이 있다. 이곳의 또다른 보물은 석가모니불 괘불탱이다. 야외의 큰법회나 의식에 사용 되기에 볼 수는 없어 사진을 가져 온다.

 

                                                                                            

[보물 제 1260호 마곡사 석가모니불 괘불탱]

보물 제1260호인 마곡사 괘불은 1687년 5월, 120여 명이 넘는 인원이 참여해 완성했다고 전해진다. 이 괘불탱은 중앙의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6대 보살, 10대 제자, 제석천과 범천, 사천왕, 천자, 아수라, 용왕 등이 좌우 대칭으로 화면 가득히 그려진 모습이다. 석가모니불은 용화수가지를 양 손에 받쳐 들고 있는 모습으로 손이 다른 신체 부분에 비해 크게 그려져 있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光背)는 둥근 머리광배와 배(舟) 모양의 몸광배로 구분되는데 머리광배에는 작은 부처 여러 구를 그려 넣었다. 석가모니불을 좌우에서 협시하고 있는 제화갈라보살을 비롯한 6대 보살은 관음·대세지·문수·보현보살로 구성되었으며 10대 제자상과 보향·명월천자가 상단 좌우 끝에 그리고 아수라 가루라 용왕들이 배치되어 있다. 남아 있는 글로 보아 시주자를 비롯한 여러 승려와 일반인들이 제작에 참여하였으며 석가탄신일 외에도 수륙재와 49재에 쓰였던 그림임을 알 수 있다. 대형화면에 나타난 중후한 형태·화려한 색채 등 17세기 전반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 작품으로 본존불을 중앙에 크게 묘사하고 다른 무리들을 주위에 작게 배치하여 석가모니가 일반 대중들을 압도하는 듯한 인상을 전달하고 있다. 삼신불 가운데 석가불을 노사나불과 동일하게 보살형으로 형상화한 독특한 형태의 그림이며 ‘천백억화신석가모니불’이란 석가의 존명과 함께 각 상들의 명칭도 기록되어 있어 불화 연구에 더욱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작품이다.

이따금 괘불탱을 모아 전시회를 가지는 것으로 안다.  통도사의 박물관이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이루어 지는 행사인데 꼭 한번 참석 실물을 보고 싶다.

 

대웅보전을 돌아 내려오면 김구 선생을 만나게 된다. 이전에 마당에 내려서서 촬영에 응해 주셨는데 오늘은 날이 추워인지 툇마루에 서 계신다. 

 

 [마곡사 백범당]

마곡사는 구한말에는 독립운동가 김구선생과도 인연이 깊었던 사찰이다. 김구선생은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했던 일본인 장교를 죽인후 인천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다가 탈옥하여, 이 절에 숨어서 승려로 지냈는데, 지금도 대광보전 앞쪽에는 김구가 심었다는 향나무가 자라고 있다. 주변의 기록물을 둘러보며 김구 선생을 글로소 알아간다.

 

이 사찰의 부속 건물을 살펴 본다.

마곡사는 충남지방의 모든 사찰을 통괄했던 큰 사찰로 신라 때 자장율사가 창건하고 고려시대 보조국사가 재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세조(재위 1455∼1468)가 이곳에 와서 `영산전´이라는 편액을 직접 써서 내렸고 잡역을 면제하는 교지를 내렸는데 모두 임진왜란(1592) 때 불에 타 없어졌다. 효종 1년(1650)부터 주지스님인 주순의 노력으로 절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는데, 정조 6년(1782)에 다시 큰 불이 일어나 대광보전을 비롯한 1,050칸이 모두 불에 탔다. 

 

[마곡사 심검당 및 고당]

마곡사 심검당은 대광보전 5층 석탑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는 스님들의 거처인 요사채이며, 고방은 창고건물이다. 심검당이 언제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정조 21년(1797)에 보수공사가 이루어진 기록과 편액에 적힌 글에 의하면 철종 7년(1856)에 고치고 1909년에 기와를 다시 올렸다고 한다. ㄷ자 평면에 자연석을 쌓아 1층의 기단을 형성하고 주춧돌을 놓은 위에 둥글고 네모난 기둥을 혼합하여 세웠다. 고방은 앞면 4칸·옆면 1칸 규모의 남향집이다.

 

[조사전]
[조사전 내부]

조사전은 절을 세운 이나, 훌륭한 스님들의 영정을 모신 곳으로, 승려들에게 국사(國師)라는 최고의 승려가 되기까지 많은 수행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일깨워주기 위해 세운 것이다. 조사전·조사당·국사전 이라고도 한다.

 

[응진전]
[응진전 내부]

응진전은 철종 3년(1852)에 새로 보수한 것으로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짜올렸다. 안쪽에는 부처님을 중심으로 좌우에 부처님의 제자인 16나한상을 모시고 있다.

이들도 사실 지정되지 않았을 뿐 보물같이 중요한 문화제 이고 언젠가는 보물로 지정될 것이라 생각한다.

 

사찰을 돌아나오면 보이는 풍경들이다. 

 

 

이름있고 큰사찰은 늦가을 이나 겨울에 찾게 된다. 주변 경치나 단풍과 어을리는 모습을  보는 즐거움 대신 문화재를 편히 대하는 여행을 하게 된다. 적은 사찰이나 그리 알려지지 않은 사찰은 그 나마 계절에 관계없이 자신만이 좋아하는 즐거움을 얻을 수 있으나, 이름이 알려진 사찰은 상춘, 휴일 관광철에는 혼잡으로 인해 이 를 즐길 수 없어 애타하던 기억이 많아, 시기와 방문장소를 정하는 나름의 법칙이 생겨 났다. 

방문한 지방에 하루 묶으면서 저녁이나 새벽의 한적함을 누리기엔 , 하루 당일 치기라는 여행을 하는 입장에서는 무리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겨울에 이름난 산사를 찾는다. 문화재는 계절을 달리하지 않고 늘 같은 모습을 보여 준다고 생각한다. 이 겨울 여러 문화재가 새단장을 하는 현장을 보며,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지정된 이곳 마곡사가 더욱 많은 이야기를 담아내고 멋진  큰 사찰로 거듭나기를 바라며 여행을 마친다. 문화재는 접하면 접할수록 모르는게 많고 경의롭다는 상념으로 집으로 향한다.

 

如一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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