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쉰여덟번째 - 대전

세종해피뉴스 2022. 1. 6. 22:39

흐르는 세월에 새해를 맞는다. 오늘은 대전을 둘러보려 한다. 며칠전 내린 눈과 추위로 인해 나서기가 조심스럽기만 한 날이다. 늘 같은 일상을 보내는 자로서 새해에 의미를 부여해 보려해도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다. 뭔가 새로운 시작점으로 좋은 시점인데, 나의 일상은  큰 새로운 마음 다짐없이 전년과 동일한 일상을 시작한다. 나름 만족해서인가? 더이상 새로운 것을 도전할 여력이 없어서 인 것 같다. 새로운 일이 생기면 그때 되어 정하고 다짐하기로 하고, 금년도 늘 해왔던 일들 꾸준히 해보려는 마음 으로 길을 나선다. 

대전엔 보물로 지정된 문화제는 다수가 존재한다. 대다수가 서적류이지만, 이곳 대전에는 국립문화재 연구소와 산하 문화재 보전과학센터가 있어, 국보인 원주의 법천사지 지광국사탑이 5년여에 걸쳐 보존처리를 마치고 원주로의 귀향을 기다리고 있으나, 지광국사탑비에 대한 보수가 결정돼 불가피하게 늦어지게 되어 대전에 남아있다. 작년 이를 보려 이곳 문화재 연구소에 방문시, 출입이 제한 되어 접하지 못해 이번 여행은  방문을 포기한다.  이번에 보물로 지정된 동춘당을 찾아본다.  동춘당 건물 주변을 공원으로 조성 하여 인근 아파트 주민의 운동과 산책 코스로도 사용된다. 이곳 동춘당을 대전의 여행지의 시작점으로 한다.

 

[보물 제 29호 대전 동춘당]

동춘당은 보물 제209호로 조선 효종 때 대사헌, 이조판서, 병조판서를 지낸 동춘당(同春堂) 송준길(1606∼1672)선생의 별당(別堂)이다. 아버지가 처음 세웠던 건물을 옮겨지은 것이다. ‘늘 봄과 같아라’ 라는 뜻의 동춘당(同春堂)은 그의 호를 따서 지은 것으로 이곳에 걸린 현판은 송준길 선생이 돌아가신 6년 후 숙종 4년(1678)에 우암 송시열이 쓴 것이다. 이곳은 독서와 강학, 집회소의 기능을 하고, 송준길 선생은 독서와 교육을 겸하며,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이곳에 <회덕향약>을 만들기도 했다고 하니, 동춘당은 당시 많은 사람들의 교류의 장소였다. 조선시대 별당 건축의 한 유형으로, 구조는 비교적 간소하고 규모도 크지 않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평면으로는 총 6칸 중 오른쪽 4칸은 대청마루이고 왼쪽 2칸은 온돌방이다. 대청의 앞면·옆면·뒷면에는 쪽마루를 내었고 들어열개문을 달아 문을 모두 들어 열면 내부공간과 외부공간의 차별없이 자연과의 조화를 이룬다. 또한 대청과 온돌방 사이의 문도 들어 열 수 있게 하여 필요시에는 대청과 온돌방의 구분없이 별당채 전체를 하나의 큰 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건물의 받침은 4각형의 키가 높은 돌을 사용했는데, 조선 후기의 주택건물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양식이다. 동춘당은 굴뚝을 따로 세워 달지 않은 것이 특징인데, 왼쪽 온돌방 아래 초석과 같은 높이로 연기 구멍을 뚫어 놓아 유학자의 은둔적 사고를 잘 표현하고 있다. 즉, 따뜻한 온돌방에서 편히 쉬는 것도 부덕하게 여겼기 때문에 굴뚝을 보이지 않게 함으로써 유학적 덕목을 유지하려 했던 것이다.

2012~2013년 지붕 보수과정에서 종도리 하부면에서 1617년 상량과 1649년 이축 내용이, 또한 종도리 장여 상부면에서 1709년 중수상량과 경과 등의 기록이 발견되었다.

 

[동춘 선생 고택]

뒤편에는 동춘 선생 고택이 유형문화재 3호로 지정되어있다

대전 동춘당 종택은 조선 후기 기호학파의 대표적인 학자인 동춘당 송준길(宋浚吉, 1606~1672)의 5대조 송요년(宋遙年, 1429~1499)이 15세기 후반 건립하였다고 전해지며, 이후 몇차례 이전을 하여 현재는 1835년 보수할 때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이 고택은 임진왜란 이전 충청지역 살림집의 흔적을 유추해볼 수 있는 희소성이 있고, 상량문 등의 기록과 유적 등을 통해 변천과정을 명확히 알 수 있는 훌륭한 문화재이다. 안채는 충청지역에서는 드문 ‘ㄷ’자형 평면을 이루며, 6칸규모의 대청마루와 세로로 긴 안마당 구성은 이 지역 상류주택의 특성을 나타내며, 사랑채는 일자형으로 규모가 크고 큰사랑방과 작은사랑방이 별도의 마루를 갖고, 내외담을 통해 안채와의 절묘한 배치를 볼 수 있다. 또한 동춘당 송준길의 불천위와 기타 제례가 그대로 전승되고 있고, 문중에서 소장하고 있는 방대한 고문서 등은 조선 중기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집안의 생활사와 지역 향촌사회의 변화를 볼 수 있는 귀한 자료이다.

 

동춘당에서 걸음을 옮겨 소대헌과 호연재고택으로 향한다. 고택앞에는 금암이 자리한다 

 

[ 금암]

금암 송몽인이 거문고를 연주했다고 전해지는 바위 금암이 글이라는 설과 동춘의 글이라는 설이 있다.

 

[대전 소대헌과 호연재고택]

나즈막한 언덕에 자리한 대전 소대헌·호연재 고택은 조선 후기 기호학파의 대표적인 학자인 동춘당 송준길(宋浚吉, 1606~1672)의 둘째 손자인 송병하(宋炳夏, 1646~1697)가 1674년 분가하여 건립한 고택으로, 송병하의 아들 소대헌 송요화(宋堯和, 1682~1764)가 1714년 옮겨 지었다. 소대헌 송요화의 부인 안동 김씨(1681~1722)는 조선후기 여류문학을 대표하는 시인으로서 호가 호연재(浩然齋)로 경서와 사서에도 능통하였다 하며 한시 134수를 남겼다. 고택은 조선 중기 대전지역의 살림집을 이해할 수 있는 건축적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충청지역에서는 보기 드물게 큰사랑채와 작은사랑채를 동시에 갖추고 대청을 한 쪽에 두는 방식이나 안채의 마루방과 툇마루 등이 전면 뿐 아니라 사방에 다양한 크기로 배치하는 양식은 지역적 특색을 나타내고 있다. 큰집 격인 동춘당 종택과 함께 한 집안의 가계 계승, 충청지역의 명문가 후손 집안으로서의 면모를 찾을 수 있으며, 비교적 조선 중기의 원형이 잘 남아 있고, 대전지역에서는 살림집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지역적 특색을 알 수 있는 희소성이 있는 등 민속적 자료로서 가치가 높다.  

 

차를 몰고 매봉산  산길로 접어들면 비래사가 있다. 이곳으로 가는 길은 좁아서 차 한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길이어서 산입구의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걸어 오르는 것이 오가는 사람들에게도 불편을 안주고 마음이 덜 불편하게 느껴진다. 어머니 찬스로 법당 앞까지 내쳐 올라 본다. 

 

[비래사]

중간 중간 녹지 않은 눈이 가파른 길에 위협적으로 남아 있다. 대웅전 앞은 보온 차원의 비닐 덮개집이 설치되어 있다. 법당 안에 모셔진 비로자나불좌상이 보물이다. 적은 크기의 절이 가파른 언덕을 치고 오르는 길목에 자리한다. 이곳에 보물인 목조비로자나불 좌상이 자리한다.

 

[보물 제 1829 호 비래사 목조비로 자나불좌상]

2014년 보물로 지정된 ‘대전 비래사 목조비로자나불좌상(大田飛來寺木造毘盧遮那佛坐像)’은 등신대(等身大)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불상으로, 전체적으로 차분하고 단정한 조형감을 보여준다. 육계와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은 머리는 나발이 촘촘하고, 반구형 정상계주와 반달 모양의 중앙계주가 표현되어 있다. 편단우견(偏袒右肩)의 대의(大衣)는 오른쪽 어깨에서 팔꿈치를 지나 왼쪽 어깨 뒤로 넘어가면서 가슴에 넓은 U자형의 곡선을 이루고, 드러난 내의(內衣)는 수평을 이룬다. 두 손을 가슴 앞으로 모아서 오른손 검지 위에 왼손 검지를 올린 지권인(智拳印)의 손모양을 하고 길상좌(吉祥坐)의 자세로 앉은 모습이다.  

또한 이 상은 밑면에 기록된 묵서를 통해 1651년(효종 2)의 정확한 제작시기와 조각가가 무염(無染)임을 알 수 있어 17세기 불교조각 연구에 기준자료가 된다. 균형이 잘 잡힌 안정적인 신체에 옷주름의 표현도 섬세하고 우아하여, 17세기 전중반기에 크게 활약한 조각승 무염의 대표작으로 평가할 수 있다.

 

 

매봉산 의 비래사 입구에는 옥류각이라는 누정이 있다. 계곡물이 흘러내려 가는 계곡의 중간에 기둥을 세우고 누정을 지어 , 마루에 앉으면 계곡을 타고 오르내리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계곡물 내려가는 모습과 소리를 들을 수있게 지어져 있다.

 

[옥류각]

옥류각은 동춘당 송준길(1606~1672) 선생이 강학하던 곳을 기념하여, 제월당 송규렴(霽月堂 宋奎濂, 1630~1709) 등 동춘당 송준길 선생의 제자와 문인들이 1693년(숙종 19)에 세운 누각이다. 옥류각이라는 명칭은 동춘당이 읊은 시 가운데 "골짜기에 물방울 지며 흘러내리는 옥 같은 물방울[層巖飛玉溜]에서 따온 이름으로 계곡의 아름다움을 따서 건물 이름으로 삼은 것이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계곡 사이의 바위를 의지하여 서로 다른 높이의 기둥을 세우고 마루를 짠 특이한 하부구조를 가지고 있다. 앞면이 계곡쪽으로 향하기 때문에 옆면으로 출입하도록 하였으며, 입구쪽부터 2칸은 마루, 1칸은 온돌방이다. 건물 위쪽에는 비래암이 있고, 왼쪽에는 ‘초연물외(超然物外)’를 새긴 바위가 있는데 선생이 직접 쓴 글씨로 알려져 있다. 건물의 ‘옥류각’현판은 곡운 김수증 선생의 글씨이다.

 

비래사를 조심스러이 내려와 우암사적공원을 찾는다.

 

 

동춘당에서 비례사 그리고 우암동원이 멀지 않은 곳에  인접하여 이동 거리도 짧고 이어서 방문하기 불편하지 않다. 너른 공간에 많은 건물을 가지고 있는 우암사적공원은 산책겸 관광에 좋을 듯하다. 이곳을 둘러보기가 힘들어 포기 하고 입구의 남간정사와 귀국정만 둘러본다.

겨울의 설렁함에도 햇볕을 받고 있는 누정을 보며 추위를 견뎌본다.  앞에 연못를 만들어 산에서 내려오는 시냇물을 가두었다 보내고 있으며,  한가운데 동산엔 고목이 자리한다. 이곳은 연못과 귀국정사이에 붉은 꽃을 피운 모습 배롱나무가 연못과 정사와 만들어 내는  풍경이 가장 인상적이라 할 수 있다. 주변에 연못의 고목과 대나무 그리고 건물을 향하여 머리숙인 고목 으로 인해 고풍스러운 멋을  간직한 곳이다. 

 

[남간정사]

낮은 야산 기슭 숲이 우거진 골짜기에 자리하고 있는 남간정사는 조선 중기의 대학자인 우암 송시열(1607∼1689)이 지은 것이다. 우암은 소제동에 살 때 서재를 짓고 능인암이라 하여 학문을 연마하였다. 숙종 9년(1683) 능인암 아래에 이 건물을 지었는데, 많은 제자를 기르고 그의 학문을 대성한 유서깊은 곳이다.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2칸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왼편은 앞뒤 통칸의 온돌방을 들였다. 오른편 뒷쪽 1칸은 방으로 하고 앞쪽 1칸은 마루보다 높은 누를 만들어 아래에 아궁이를 설치하였다. 계곡의 샘에서 내려오는 물이 대청 밑을 통하여 연못으로 흘러가도록 하였는데, 이는 우리나라 조경사에서도 매우 중요하고 독특한 양식이다. 건물 앞에는 잘 가꾸어진 넓은 연못이 있어 운치를 더하고 있다. 남간정사 오른쪽에는 일제시대에 소제동에서 옮겨 지은 기국정이, 뒷편 언덕에는 후대에 지은 사당인 남간사가 있다. 또한 송시열의 문집인 『송자대전』 목판을 보관한 장판각이 맞은편 언덕에 있다. 송시열과 관련된 건물이 한 곳에 모여 있어 조선시대 건축 연구에도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기국정]

대전 가양동의 우암사적공원내 기국정은 우암 송시열 선생이 머물렀던 한옥으로 남간정사 옆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원래는 소제동 소제 방죽을 쌓고 그 연못가에 있던 것을 지금의 자리로 이건했다고 합니다. 원래는 초가지붕 건물이었지만 후손이 기와지붕으로 수리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고 전해집니다. 이 건물은 우암 송시열 선생 집의 별당입니다. 그 당시 기국정 주변에는 구기자와 국화가 무성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집의 이름을 '기'자와 '국'자를 합해서 기국정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네요. 기국정을 살펴보면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을 띄고 있습니다.

기국정이 현재 위치로 옮겨지게 된 배경을 찾아보니까, 일제강점기에 대전역을 건설하면서 소제 연못을 메우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1926년에 이곳으로 이전을 했다는 기록을 찾았습니다.

 

도심속에 공존하는 대전의 문화재는 접근도 쉽고 관람이 용이하게 관리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도 가지고 있는 많은 문화재들을 잘 유지 관리하여 보다 많은 보물이 지정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따스한 집으로 귀가한다.

 

如一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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