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예순두번째 - 김천

세종해피뉴스 2022. 1. 27. 00:03

오늘은  김천으로 길을 나선다. 대전과 대구의 사이에 있는 김천시는 동쪽으로 경상북도 구미시, 칠곡군, 성주군과 접하며 서쪽으로 충청북도 영동군, 전라북도 무주군과 접하고, 남쪽으로 경상남도 거창군과 접하며 북쪽으로 경상북도 상주시와 접한다. 김천에는 직지사, 청암사 등 보물을 많이 간직한 가람이 있으나, 후일 여행 하기로 하고, 오늘은 2019년 12월 누정으로 보물로 지정된 방초정을 찾아 나선다.

산천이 수려한 곳에 자리한 누정은 아니지만  사각의 연뭇을 만들고, 연못안에 둥근  두개의 동산을 만들어 놓았다. 사각연못에 둥근 동산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라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을 나타내는데, 이곳은 두개의 동산이 존재한다. 이러한 곳에 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2층 구조의 누정의 모습은 매력적이다.

 

 

김천 방초정은 중수기와 중건기 그리고 상량문 등에 담긴 내용으로 건립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건축 내력을 비교적 충실하게 추적할 수 있고,  후대 이루어진 보수공사를 통해 몇몇 부재들이 교체되기는 하였지만, 기둥 상부에 결구된 이익공 포작과 충량의 결구 및 가구형식 등 전체적인 건축 수법이 대체로 조선 후기의 양식을 따르고 있고, 1788년 정자가 중건될 당시 모습으로 보존상태도 양호하여 역사적, 예술적, 학술적 의미가 있다.

 

[방초정 정면]

마을내에 자리해서 인지, 주민의 생활모습, 가옥, 농기구가 같이 공존하는 풍경이 나름 이색적이다. 보물로 지정되자 마자 방문한 시기도 겨울 이었는데, 이곳의 마을 주민이 다가와 많은 관심과 자부심을 가지고 붙잡고 말을 걸어주던 일이 생각난다. 주민 몇분을 나름의 문화해설사로 지도 양성하여,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역사적인 사실이나 건물의 특성, 유래 그리고 내려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던 것도 기억난다. 방초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으로, 중앙에 온돌방을 두고 사방에 난간을 덧댄 마루를 낸 구조이다.

 

[방초정 측면]

방초정은 방초 이정복(1575~1637) 이 지은 누정으로, 1625년경에 처음으로 정자를 세우고, 후에 1689년 손자 이해 (李垓)가 고쳤다. 원래의 위치는 지금보다 김천 가까이 있었는데,  1736년 홍수로 없어졌다가 1788년 이정복의 5대손 이의조가 현재 위치로 옮겨 지었다. 건물 왼편에 2층을 오르는 계단이 있고 지금도 신발을 벗고 오를 수 있다.

 

[방초정 후면]

방초정이 있는 상원리 원터마을은 연안이씨 집성촌으로 정자는 선조를 추모하고 학문을 강론하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지금은 예전처럼 누각에 앉아 글을 외우고 학문을 논하지는 않으나 차가운 마루바닥에 잠시 앉아 상념에 잠겨본다.

 

[방초정 현판]

목재가 만들어 내는 다양한  빛깔이 고가옥 형태로 마치 수백년의 오래된 멋짐을 보여준다.  단청이 없는 누정도 그 독특한 선과 면 만으로 구성된 아름다움이 뽐내고 있다. 난간이 주는 안정감으로 빨리 오르고 싶은 충동이 느껴진다.

 

[온돌방]

1층에는 난방을 위한 아궁이가 있고 2층에는 도배가 잘된 온돌방이 있다. 돌을 쌓아 만든 아궁이는 돌의 문양이 각각 다르면서도 전체적으로 조화있게 만들고, 사이를 회로 하얗게 칠하여 다듬지 않은 자연목재의 기둥과 조화를 이룬다. 아궁이는 옛스러움 보다는 추상의 그림 벽화 같다는 느낌이 든다. 불을 지피면 따스함이 번질 것 같은 구둘벽은 황토색이 아닌 흰색으로 인해 서양풍이라는 느낌도 갖게 한다.

 

[온돌방 내부구조]

계단을 타고 이 층으로 오르면 많은 글귀의 편액이 자리하고, 가운데 덩그러니 있는 온돌방은 여름에 사방의 문은 접어 위로 올리면 탁트인 마루와 연장되어, 2층 전체가 트인 공간이 되며, 겨을은 자그마한 덧문이 앞뒤로 존재하여  통풍과 밖을 내다 보도록 활용되는 듯하다.

 

[2층 누각에서 본 최씨담]

정자에서 내려다 보면 정자 앞에는 최씨담이라 부르는 사각의 연뭇이 보인다.  멋스럼을 간직한 이 연못은 이정복씨의 부인 화순 최씨와 몸종 석이의  슬픈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다. 

17세의 나이로 이정복과 혼인한 최씨는 시댁에 들어가기도 전에 임진왜란을 겪는다. 죽더라도 시가에서 죽겠다 결심한 최씨는 피난을 떠난 시댁 식구를 찾아 나서다 왜구에 쫓기게 되고 정절을 지키기 위해 연못에 몸을 던지고, 최씨를 따르던 석이 역시 뒤를 잇는다.

전쟁이 긑나고 이정복은 부인을 그리워 하며 몸을 던진 연못을 지금의 모습으로 정비한 후,  이곳에 정자를 짓고 자신의 이름을 따 방초정이라 하였다. 이곳 연못의 동산이 두개인 것은 아마도  하나는 최씨 부인을 위한것이고, 다른 하나는 최씨를 따르던 석이를 후손이 귀히 여겨 동산을 만들어 준 것 같다. 집안에서 세워 준 노비 석이(石伊)의 비석이 근례 못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연못과 방초정]

이 최씨담은 현재 알려진 연못 중 방지쌍원도(方池䉶圓島)의 전형을 간직한 정원 유구라 한다. 또한  마을과 김천 사이에 놓여 마을의 오수나 유출수를 재처리 여과 하는 수질 정화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생태기능도 있어 학술적 가치도 높다. 

이 곳 연못에 자리한 고목이 방초정과 어울리는 풍경을 만들어 낸다. 사각 연못을 둘러 산책하며 연못과 어울리는 방초정의 모습을 보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이리라.  두번의 방문이 모두 겨울이라 보지 못한 고목에 푸른 잎을 달고 서있는 모습을 그리면서 방초정을 나선다.

 

[정절을 기려 1632년 조정에서 하사한 정려각]

방초정을 뒤로하고 보물을 간직하고 있는 고방사로 향한다. 스산한 겨울 풍경속으로 산을 조금 오르니 백마산 고방사라는 일주문을 맞이한다. 이 곳 앞에 주차장이 있고 계곡을 따라 오르면 고방사가 자리한다. 우리는 스님이 이용하시는 길을 이용하여 사찰 앞으로 차로 오른다.

 

차로 오른 주차장에서 보는 고방사 전경이다.

기록에 의한 고방사는 신라 눌지왕 2년(418년) 아도화상에 의해 창건되었다. 현판 기문에 의하면 1636년 (인조 14년)옥청 선인이 적묵당을 중건하였고, 현철 상인이 설선당을 그리고 1656년 (효종 7년)에는 학능 성인이 청원루를 신건하였다 한다.   

 

  

사찰입구에 사천왕상이 그림으로 영옆에서 귀신의 출입을 막고 있으며,

 

계단을 따라 오르면 절터 마당에 당도한다.

 

 

지금의 절은 1719년 (숙종 45년)에 계현, 수천대사가 중창하였다 한다.  주변은  환경을 재 정비 하는 듯 한데 인적이 드물어서 인지, 두마리의 개가 나의 출입을 알리는듯 짖어된다. 스님이 요사체를 나서 누군가하고 관심을 가진다. 이어 혼자 경내를 둘러본다. 탑은 언제 것인지 소상이 알 수는 없으나, 돌탑이 무척이나 가는듯 한  모습과 다소 자유로운 듯한 모습이 여지껏  보아 왔던 텁보다 다소 현대화 된 탑이라는 느낌이 온다. 장식이 없이 탑의 상륜부가 온전한 모습이다. 설명이 없어 다른 짐작을 할 수 없었고, 보광 명전의 양 옆의 석등도 그 모습이 찹과 세트 처럼 유사한 양식을 따라 날씬한 세련미가 있어 보인다. 절이 증축된  시기 지어져 이러한 형상을 가진 것으로 생각해 본다. 

 

 

다듬어지지 않은 절터의 보광명전으로 향한다. 

 

[보광명전 외부 모습]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467호인 고방사 목조아미타 삼존불상]

三尊佛像(삼존불상)은 아미타불좌상을 본존으로 하고 그 좌우에 관세음보살상과 대세제보살상이 사각형의 수미단 위에 나란히 모셔져 있다.

主尊(주존)인 아미타불좌상은 협시보살상보다 10cm 정도 더 크고 전체적으로 당당하다. 肉髻가 들어나지 않는 머리에는 원통형의 오똑한 정상계주와반달형의 중앙계주를 표현하였으며, 둥글면서도 약간 길쭉한 얼굴에는 반쯤 뜬 눈, 오똑한 코, 선명한 인중과 작은 입 등 엄정하고 원만한 상호를 하고 있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고 어깨가 넓고 허리가 길며, 앉은 자세를 앞으로 넉넉히 내었고 무릎너비가 어깨너비보다 넓어 안정된 신체비례를 하고 있다. 가슴과 배를 비롯한 다른 신체부위가 굴곡이 적어 다소 경직된 느낌이 든다. 法衣는 上衣의 앞을 U자형으로 깊고 넓게 트고 그 안에 수평으로 가로지르는 內衣가 있으며, 양쪽 어깨를 덮은 通肩이다. 手印은 일반적으로 가슴부근까지 올려졌던 오른손이 무릎에 내려진 형식을 하고 있는 阿彌陀下品中生印을 결하고 있는데, 이는 1630년대 이후부터 나타나는 수인형식을 따르고 있다.

관세음보살상과 대세지보살상은 머리에 金銅寶冠을 쓰고 寶髮을 어깨위로 느려뜨렸으며, 상호는 아미타불처럼 경직되기는 하였으나 온화한 편에 속한다. 두 보살상에서 가장 주목되는 점은 손모양인데, 한 손은 무릎위에 올려놓고 다른 손은 팔꿈치를 굽혀 어깨높이로 들어 올린 일반적인 모습이지만 관세음보살상의 오른손에는 작은 淨甁이, 대세지보살상의 왼손에는 經冊으로 추정되는 직사각형의 상자가 올려진 점이다. 

 

                                            

보물 제 1854호 김천 고방사 아미타여래설법도

김천 고방사 아미타여래설법도 1688년에 조성된 고방사의 후불화로서, 敏圓을 수화승으로 하여 竹䕺, 竟粲, 覺林 등 총 4명의 화승이 그렸다. 수화승 민원은 17세기 후반에 활약한 화승으로 알려져 있으나 현전하는 작품은 이 작품이 유일하여 작품의 가치를 한 층 높여준다. 보조화원 각림은 1656년에 조각승 무염과 더불어 완주 송광사 소조석가여래삼존좌상 및 오백나한상을 조성하였다. 정사각형에 가까운 화면에 아미타불과 8대보살, 용왕과 용녀, 10대제자 중 6제자, 사천왕, 팔부중 일부 등을 배치한 간단한 구성을 보여준다. 본존의 키형 광배를 비롯하여 높은 육계표현, 천공 바탕에 표현된 花紋, 채운의 끝부분에 흰색을 칠해 강조하는 기법, 불보살을 제외한 존상 얼굴에 바림을 이용한 음영법 등 17세기 후반 불화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나만의 문화유산해설사 >

 

이 보물은  지금 이곳에 존재하지 않고 직지사 성보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영구 전시 인지 순회 전시 인지 는 모르겠으나 후일 직지사를 찾을때 친견할 수가 있을듯하다.

 

고방사는 1981년 주지로부임한 법전화상에 의해 중흥되는 데 감로당, 관음전, 삼성각, 향로실, 사천완문, 범종각, 청원루등을 신축하였다.

 

고방사를 나서며 직지사로 향하여야 하는지 잠시 고민하다가, 많은 사람의 발길이 닿는 직지사 사찰보다는 사람들의 발길이 잘 미치지 않은, 그러나 국보와 보물의 발자취를 알아 볼 수 있는 오봉라의 갈항사지로 향한다. 남면 오봉리는 금오산 자락에 속한다. 다소간의 이동 후 금오산의 다른 모습을 보게 된다. 이곳에는 국보 갈항사 동서탑이 있던 자리로 현재는 보물인 석불이 자리하고, 절터는 과수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如一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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