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예순세번째 - 김천(2)

세종해피뉴스 2022. 1. 29. 01:18

고방사에서 길을 나서 갈항사로 향한다 . 다소 좁은 갈항마을의 갈항길을 따라 중부내륙고속도로를 넘어  들어서면 눈앞에 금오산이 보인다. 

 

 

[금오산]

구미에서 보면 반대편인 김천의 금오산 입구에 자리한 갈항사지가 있다. 갈항사는 남면 오봉리 금오산 자락에 있던 사찰로 임진왜란때 소실되었다 한다. 

692년 (통일신라 효소왕) 승전대사에 의해 창건되고, 이는 삼국유사에 "승전이 개령군에 절을 짓고 돌맹이 80여개를 모아놓고 화엄경을 강연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신 갈항사 ]

산밑에 과수원을 끼고 새로이 움튼 갈항사를 들어가는 초입에 전각이 보안다. 

 

 

 

갈항사지 석조여래좌상이 있는 전각이다.

 

[보물 제 245 호 갈항사지 서고여래좌상]

갈항사지 석조여래좌상은  갈항사(葛項寺) 터에 있는 높이 1.22m의 불상으로, 보물 제 245 호이었으며,  다른 명칭은 오봉리 석조석가여래좌상이다.  이 불상은 신라시대 처음 건립된 갈황사의 금당뒤에 있던 여래불상이다.  군데군데 파손이 심한 상태이다. 

둥근 얼굴에 신비스런 미소를 띠고 있으며, 눈·코·입의 표현이 사실적이다. 가슴이 당당하고 허리가 잘록하며, 왼쪽 어깨를 감싼 옷은 굴곡있는 신체에 밀착되어 부드러운 옷주름 선을 나타내고 있다. 오른손은 손바닥을 무릎에 대고 아래를 가리키고 있지만, 오른 손목과 손등 뿐이며 왼손도 일부 깨졌다. 양손과 하반신 일부가 손상되었지만 형태는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불상의 받침대는 위로향한 연꽃이 새겨진 상대석만 남아있고, 중 하대석과 불상뒤 원광인 광배는 유실되었다. 전반적으로 온화하면서 세련미가 있는 8세기 중엽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불상이 만들어진 시기는 불탑과 같이있던  갈항사 3층석탑의 기잔부에 신라 경덕왕 15년(758)이라는 조성 연대가 새겨져 있어 불상 역시 동시대의 것으로 추정한다. 

 

 

[갈항사지터]

갈항사지터는 과수원으로 이용되고 있고  국보인 갈항사 삼층석탑은 전각 앞의 과수원에 위치하였었다. 탑은 국보 제 99호로 동탑이 4.3m, 서탑은 4m이다. 원래 금당앞에 세워져 있던 삼층석탑은 1916년 일본인들에 의해 서울 총독부 박물관으로 이전 되었다가, 지금은 국립중앙 박물관에 있다. 동탑의 기단부에 새겨진 금석문으로 인해 확실한 조성연대가 밝혀져 있는데 " 경덕왕 17년 (758년)원성왕의 생모인 박씨와 원성왕의 이모 그리고 외삼춘 3인의 발원으로 탑을 세웠다."라고 기록되어있다. 

갈항사터(경상북도 김천시 남면 오봉동 소재)에 동·서로 세워져 있던 두 탑으로,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반출될 위기에 처하자 1916년 경복궁으로 옮겨지고,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 놓았다.

통일신라세대 초기의 석탑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으며 균형적인 비례가 안정된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동탑은 상륜부, 서탑은 지붕돌과 상륜부가 사라지고 없다. 이두문의 명문으로 조성연대가 새겨진 유일한 사례로서 김천지방에 신라왕실의 지원을 받은 원찰(願刹)이 있었음이 입증되는 귀중한 사료로 평가된다.

 

[국보 제 99호 갈항사지 동.서탑] 출처 국립문화재연구소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일반적인 모습이며, 서로 규모와 구조가 같다. 기단의 네 모서리와 각 면의 가운데에 기둥모양을 본떠 새겼는데, 특히 가운데 기둥은 두 개씩을 두었다.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구성하고 있는 탑신부는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을 조각하였으며, 지붕돌의 밑면에 5단씩의 받침을 마련하였다. 동탑의 기단에 통일신라 경덕왕 17년(758)에 언적법사 3남매가 건립하였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어 만들어진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으며, 이두문을 사용하고 있어 더욱 특이할 만하다. 두 탑 모두 꼭대기의 머리장식만 없어졌을 뿐 전체적으로 온전하게 잘 남아있다. 두 탑의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각 부분의 비례가 조화를 이루고, 위아래층 기단에 가운데 기둥을 두 개씩 새겨 놓고 있어 당시의 석탑양식이 잘 담겨져 있는 탑이다. 

 

[갈항사 동서탑 위치석]

지금은 탑이 있던 자리에 비를 세워 이곳에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오던 길을 돌아 나오려니 겨울 이어서 인지 삭막함을 느낀다.

 

[용화사]

 

[용화사 관음전 ]

갈항사에서  다시 김천을 통과하며 집으로 향하는 길에 김천 덕천리 석조관음보살입상을 보기 위해 용화사로 향한다.  이곳 용화사의 관음전 안에 석보불인 관음보살상이 있다.

 

[경북 유형문화재 제 250호 김천 덕천리 석조관음보살입상]

이 불상은 덕천리 용화사의 관음전에 있는 관음보살상이다. 높이가 2.73m에 달하는 거대한 불상으로, 원래 인근 골짜기에 방치되었던 것을 옮겨 온 것이라 한다. 양쪽에는 손에 약항아리를 들고 있는 동자상을 배치한 특이한 형식이다. 광배는 가장자리 불꽃무늬를 새기고 안쪽에는 꽃무늬를 장식하였다. 머리에는 보관을 쓰고 있고, 둥그스름한 얼굴에 눈은 가늘게 뜨고 초생달 모양의 눈썹은 짧은 코의 윤곽선과 이어지고 있다. 입은 비교적 작게 표현 되었고, 두 귀는 길게 늘어져 어깨에 닿아있다. 머리에 비해 어깨 폭이 좁고, 가습도 부피감이 없다. 의복의 선은 두텁게 처리하여 중후한 모습이다. 조각양식은 양식적 대비를 찾을 수 없어 연대가 설정이 어려운 토속적 석불이다. 

부군의 다른 석불을 찾아나선다 . 큰길 건너편으로 조금들어가 태화리로 접어들면 산기슭에 자리한 작은 불상인 김천 태화리 석조 보살입상이 있다.

 

동네 가옥 옆에 전각을 지어 보호하는 이 불상은 봉산면 태화리 야산 중턱에 자리한다.

 

[경북분화재자료 제 286호 김천 태화리 석조보살 입상]

이곳의 주민들에 의해 문수보살로 불리고 있다. 하지만 이 불상은 여래상에 가깝게 조각되어 있어 보살상인지 여래상인지 확실하지 않다.

머리에 상투를 틀고 뒤 귓가에 꽃무늬 장식 흔적이 있다. 얼굴은 사각형에 가깝고, 신체에 비해 크게 풍만하게 표현되어 있다. 눈과 코는 심하게 마멸되어 형태파악이 어렵고, 토툼한 입술에 미소를 머금고 있다. 신체는 전반적으로 볼륨감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비만형이고, 하반신은 무릎아래로 땅에 묻혀 있으며, 두손은 파손되어 정확한 형태를 알 수 없다. 신체의 비례나 전반적인 조각수법으로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갈항사지 석불]

산골 깊이 외롭게 자리한 불상과 모습은 없이 과수원 한 가운데 탑이 존재한 자리에 대한 기념비를 세워 놓은 갈황사지는, 예전의 모습에서 탑이 있던 자리에 기념비를 세운 것이 발전이라면 발전이다. 또한  야외에 자리한 석불은 이번에 무슨 이유인지 철책을 둘러 보관하고 있다. 모두 나름의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 웬지 모습이 안타깝고  황망스럽다.  진입로가 마을 담장사이, 집앞의 골목길이 대신하고 있고, 사지는 개인 소유의 과수원으로 경작되고 있어, 주차 공간도 없다. 산정의 바위산과 숲이  어울어진 명산 금오산을 두르고 있는 이곳이  다른 사지처럼 발굴 조사나 복원은 쉽지 않을 것으로 생각이 든다. 그렇더라도 다음번에 찾을 때는 뭔가 바뀐 모습을 불수 있었으면 하고 기대해 본다. 오늘 여행지인 갈황사지와  용화사를 비교하면, 용화사는 새로운 큰 법당에 석조불을 잘 모시고 있어 보물은 아니더라도 불상이 가지고 있는 독창적인 모습으로 많은 방문이 기대된다. 이에 비해 갈항사지는 국보와 보물을 간직한 곳이지만 찾는 이가 거의 없다. 문화재에 대한 많은 사람의 방문을 위해서는 사찰의 현대적인 모습도 중요하지만, 접근성, 교통편, 특히 주차장과 화장실이 비치되어야 하는 것 이  중요함을 바로 느낀다. 찾아 보려하는 문화재가 국보 또는 보물이라도 접근이 어려우면 소외되는 것이다. 또한 그 간의 여행에 보물로 지정된 석조불을 보전하기 위한 전각이  산기슭이나 외진 곳에  외로이 서있고, 그 전각안에 홀로 자리하고 있는 석불을 많이 보아왔다. 을씨년 스럽기도 하다. 전각이 자그마하게 초라해 보이는 것은 차지하더라도, 적어도 그 앞에서 삼배정도는 할 수 있는 공간을  가진 전각으로 늘렸으면 한다.  물론 전각 주변에 소나무로 어우러진 멋진 조경을 한다면 더욱 바람직하다는 생각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해보며 귀가한다. [나만의 문화유산 해설사 참조]

 

如一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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