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백 열아홉번째 - 안동

세종해피뉴스 2023. 7. 6. 00:49

- 탈박물관, 예안 이씨 충효당

 안동의 하회마을은 윗대 묘소의 벌초 관리를 위하여 자주 들르는 편이나, 이곳에서 공연되는 하회 별신굿 공연은 이상하리 만큼 진중하게 볼 기회를 갖지 못한다. 언젠가는 볼 수 있다는 생각때문 일 것이라 생각한다. 

 1월 ~ 2월 : 매주 토·일요일 14:00~15:00 (1시간)
 3월 ~ 12월 : 매주 수· 금· 토· 일요일 14:00~15:00 (1시간) 상설 공연이 있다고 하는데 공연장을 늘 그냥 스쳐 지나게 된다. 오늘은 오래전 한번 방문하여 보았던 탈 박물관에 스치 듯 들려본다. 이전의 모습과는 다른 전시장을 보며 감탄을 자아냈고, 하회탈만이 아닌 여러지방의 탈들도 함께 전시되어 있어 볼거리가 많다고 느껴진다. 다음의 목표한 여행지가 있어 서둘러 구경한다.  

국보 제121호 하회탈 및 병산탈은 안동시 성곡동의 안동시립민속박물관에 자리한다고 하니 이곳에서는 내부를 둘러 잠시 둘러 본다.

 

[하회탈 및 병산탈}

탈로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탈놀이 가면인 하회탈로는 11개가 전해지는데 주지 2개, 각시, 중, 양반, 선비, 초랭이, 이매, 부네, 백정, 할미 탈이 있다. 병산탈은 총각, 별채, 떡다리 탈이 있었다고 하나 분실되어 현재 2개가 남아 있다고 한다. 한국의 가면은 대개 바가지나 종이로 만든 것이 많아서 오래 보존된 예가 드물며, 그 해 탈놀이가 끝난 후 태워버리는 것이 일반적이나, 하회탈과 병산탈은 드물게 보이는 목조 탈이며, 해마다 정월 대보름의 별신굿에 쓰이던 것으로, 제작에는 금기나 제약이 매우 엄격했다고 한. 탈의 재료는 오리나무로 옻칠을 두겹 세겹 칠하고, 턱은 따로 조각하여 노끈으로 달아, 말하는 것처럼 움직임으로 생동감을 준다. 이 탈들의 제작자와 정확한 제작연대는 없으나 허도령이 만들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하회마을에 살았던 사람에 대한 기록으로 허씨가 살았고, 이후 안씨 집안 후, 유씨가 조선 전기에 살았다고 기록이 있어 대체로 고려 후기 쯤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양주 별산대 탈]
[송파산대놀이 탈]
[동래 아류탈]

탈박물관에서 시원한 빙수로 더위를 식히고는 보물 답사를 나서 본다. 하회마을에서 차로 멀지 않은 인근 풍산면 우렁길에 자리한 안동 예안 이씨 충효당으로 향한다. 진입로를 찾아 들어가는 길이 쉽지 않은 소로 이나 도착하니 주차장도 있고 보존도 잘 된 가옥을 발견한다.  

이 집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다가 순국한 이홍인 부자의 충과 효가 얽혀있는 유서 깊은 집으로 공의 후손들이 사는 집이다. 명종 6년(1551)에 지은 것으로 보아 조선 중기 건축으로 추정되며 ‘충효당’이라 부른다.

 

[주차장 에서 본 충효당 입구]
[보물 제 553호 충효당]

안채와 사랑채가 맞붙어 있는 안동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ㅁ자형 으로 내부의 중앙은 뜰로 꾸민  집으로, 남쪽과 서쪽에 바깥으로 통하는 대문이 있다. 대문은 남문이지만 지금은 서문을 대문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이 집은 부분적으로 수리를 하고 변형도 되었으나 나직한 야산을 배경으로 하고 풍산평야를 바라보며 자리잡고 있다.

  

[ 앞면]

예전에 이용된 대문이 있는 방향으로 목재로 잘 짜여진 문짝과 창문이 눈길을 잡는다. 사랑채 툇마루에는 충효당이라는 현판이 자리한다.

 

[옆면]

요즈음 안채로 들어가는 문으로 사용되는 측면  ㅁ자 건물에 유독 밖으로 향하는 문짝이 다수 존재한다.

 

[옆면]

동쪽에 자리한 측면에도 밖으로 향하는 문이 있어 세 방향에서 출입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다.

 

[뒷면]

나즈막 하지만 경사로 오르기 쉽지 않은 뒷산은 집터 앞까지 커다란 암반이 산을 받치고 있다. 

 

[안채]

문을 통하여 들어서면 보이는 안마당과 안채의 모습이다.

 

[안채]

 잘 정돈되어있는 선비 가의 안 살림을 훔쳐 본다. 흰벽과 각각의  목재가 발산하는 다양한 색상이 잘 어울리는 모습이다.

 

[안채]

 오후의 따가운 긴 해를 가리기 위한 가림막인듯 한 흰천이 말려 있어,  가지런히 정돈된 안채에 찾아 든 환한 햇볕을 그대로 통과시키고 있다. 

서쪽에는 一자형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을 가진 ‘쌍수당’이라는 별당이 있다.

 

 

'쌍수당’이란 충과 효를 한 집안에서 다 갖추었다는 의미로, 이홍인이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나서 왜적과 싸우다 장렬하게 순국한 충의를 기리고 그 후손 한오의 지극한 효를 기리는 것이다.

ㅁ자 가옥의 앞에 탁트인 별채을 지어, 풍산벌을 바라보는 나름의 폐쇄적이지 않은 여유로움을 즐긴 모습을 옅볼 수 있다.

 

[옆면]

별채의 아랫단에 쌓아놓은 장작을 통해 퐁요로움을 느끼게 된다.

 

 

충효당의 방문을 통하여 1971년 지정된 보물인데도 그간 방문하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 마저 드는 것은, 나름 많은 전국의 보물을 찾아 발걸음을 한다고 하는데 이렇듯 발길이 잦은 곳에 이웃하고 있는 곳의 보물도 몰라 본 것에 대한 게으름과 아쉬움이 함게 한 것이기 때문이다.  요즘의 삶에 큰 비중을 차지 하는 것이 정보라고 생각한다. 많은 것의 승부가 이것에 의해 달라지는 것이다. 향후는 무작정 보다는 보다 많은 정보를 가지고 알차게 더 많은 문화제를 보는 여행을 즐기리라 다짐해 본다. 

 

如一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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