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백 여섯번째 - 강진

세종해피뉴스 2023. 5. 1. 13:31

- 월남사지, 무위사

도갑사와 버금가는 사찰이 강진 무위사 일 것이다. 이 사찰도 눈을 즐겁게 하여 줄 많은 보물을 앉고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며 차를 옮긴다. 도갑사서 월출산을 넘으면 있을 법한 무위사를 산을 반바퀴 돌아 찾아 간다.  덕분에 만나는 멋진 전경들을 즐기면서. 

 

[유채꽃밭과 월출산]

월출산의 모습이 차가 지나칠 때 마다 변화 무쌍한 모습으로 나를 반긴다. 바위를 이고 있는 듯한 산의 모습이 변하는 것을  스쳐보며, 길을 가던 중,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머문 곳을 보게 된다. 유채꽃이 월출산을 배경으로 드넓게 피어서  멋진 볼거리를 주고 있기에, 그 들 틈에 끼어 잠시 머물다 길을 재촉한다.

 

[강진 월남사지]

무위사로 향하는 소로로 접어 들어 무위사에 거의 다다르면 인근의 월남마을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절터인 월남사지가 있다. 월남사는 고려시대에 진각국사(1178∼1234)가 세운 것으로 되어 있지만. 경내 3층석탑의 규모나 양식으로 그 이전 일 것으로 보고있다. 주변의 사찰이 정유재란때 소실 되어 ‘무위사’만 남았다는 기록이 있어, 이 때 소실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한다. 사지 에는 3층석탑과 진각국사비가 남아 있는데, 최근에 3층석탑 근처 민가에서 석탑의 지붕돌이 발견되고 , 주민들의 전언에도 원래는 2개의 석탑이 있었다고 도 하여, 이 월남사지에는 두탑이 존재했던 것으로 생각한다.  발견된 지붕돌의 세부 기법은 지금 보이는 백제계 양식인 3층석탑과는 다른 신라계 양식의 기법이어서, 한 절터에서 백제계 석탑과 신라계 양식의 석탑이 공존하는 것에 대한 조사도 필요하다고 한다. 현재 이곳에는 금당터 초석, 축대가 남아 있고, 옛 기와, 청자, 백자조각이 츨토 되고 있다고 한다. 전각을 새로이 짓는 것으로 보아 조만간 월남사지에서 월남사로 중창 될 것으로 보인다. 사지안에 있는 탑과 비, 사적지를 찾아본다.

 

[보물 제 298호 강진 월남사지 삼층석탑]

3층 석탑은 붕괴의 우려로 2020년 까지 3년간의 공사로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된 것으로 , 단층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바닥돌 위에 기둥 모양의 돌을 세우고, 판돌로 채운 뒤 넓적한 맨 윗돌을 얹고, 탑신부는 1층 몸돌이  높고,  2층 몸돌부터는 줄어 들고 있다. 백제의 옛 땅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상 기단 및 탑신의 각 층을 별도의 돌로 조성한 것이나, 1층의 지붕돌이 목탑에서 처럼 기단보다 넓게 시작하는 양식 등으로 백제 양식을 많이 따르고 있는데, 보기에 기단부가 좁고 다소 날신하고 긴 몸매에 지붕 돌이 커서 아랫 부분이 불안해 보이는 탑이라는 생각이 든다.   

 

 

예전의 사방 1칸의 누각에서 눈에 보이는 전각으로 자리하여 몸에 맞는 옷을 입은 느낌이며, 단청이 있는 것 보다는 옛스럼과 경건함을 더 해준다.  진각국사를 기리기 위해서 세운 진각국사비는 새로이 넓게 지어진 전각으로 보호되고 있다. 비석이 일반 사찰에서 다소 떨어져 있는 거리 정도이나 전각 옆으로 도로가 있어 일반사찰과는 다르게 쉽게 접할 수있다.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비석이 웅장 함을 느낀다.

 

[보물 제 313호 강진 월남사지 진각국사비]

월남사 터에 서 있는 이 비는 절을 창건한 진각국사를 추모하기 위한 비이다. 진각국사의 24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어머니의 죽음으로 출가를 하게 된다. 출가 후 보조선사 밑에서 수도를 하고, 고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자 대선사(大禪師)가 되었으며, 고종 21년(1234)에 57세로 입적하였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에 비몸을 올린 형태이다.  비몸은 원래 매우 컸다고 하나 윗부분이 떨어져 나가고 아랫부분만 남아 있으며, 표면이 심하게 마모되어 비문은 잘 보이지 않는다. 비문은 이규보가 지은 것으로 전해지며, 비는 고려 고종 때로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월남사지를 눈에 담고 무위사로 향한다. 무위사를 보고 찾아보려 하였는데 이동 간에 먼저 맞이해 주어 고맙고 즐거운 기분이 든다.

무위사는 신라 진평왕 39년(617)에 원효대사가 관음사라는 이름으로 처음 지은 절로, 여러 차례에 걸쳐 보수공사가 진행되면서 이름도 무위사로 바뀌었다 한다.

 

[무위사의 일주문]

두분으로 인해 일주문의 크기를 가름해 볼 수 있겟다는 생각을 해본다. 무위사는 전라남도 강진의 월출산 동남 쪽에 있는 사찰이다. 신라의 명승 원효(元曉)가 창건하여 ‘관음사’라 하였고, 명종 5년(1550) 태감(太甘)이 4번째로 세우면서 무위사라 하였다. 

 

[ 보제루]

너무 새것이라 눈에 들지 않는 보제루를 지난다. 

 

[국보 제 13호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

국보다 !! 

보제루로 인해 가려진 이 절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극락보전은 세종 12년(1430)에 지었으며, 앞면 3칸·옆면 3칸 이며,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과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한 공포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간결하고 세련된 기법이다. 첫눈에도 보물스러움을 느끼게 되는 모습이다.

 

[극락보전의 측면]

 안동의 봉정사의 전각에서 느끼던 색감이다. 대충 국보에 대한 느낌으로 받아 들인다. 건물의  기둥과 대들보 종보의 기하학적 배치가 보여주는 구조가 독특하게 보이면서, 노란색의 색감이 주는 느낌이 밝아 따로 단청이 드러나지 않아도 돋보이는 전각이다. 옆의 쪽문이 작게 자리한 모습이 노란색과 어울려 전각이 크게 보이는 느낌을 주며, 안에는 무엇이 있는지 호기심을 느끼게 한다.

 

[국보 313호 강진 무위사 극락전 아미타여래삼존벽화]

극락보전안으로 들어 서면 후불벽 앞면에 그려져 있는 아미타여래삼존불 벽화를 접한다. 건물의 외벽이 노란계열이더니 내부 벽화 바탕 빛도 노란계열로 보인다. 녹색과 붉은 색이 주 색상이지만, 바탕이 노랗게 보이는 것은 금색을 대신 한 것인지, 벽화는 앉아 있는 아미타불의 곁을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이 협시불로 자리하여 서있고, 위부분에는 구름을 배경으로 좌우에 각각 3인씩 6인의 나한상이 그려지고, 그 위에는 작은 화불이 4구가 그려져 있다. 아미타극락회도 장면인 이 벽화는 앞에 모셔진 아미타 삼존불상과도 매우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중앙의 본존불은 비교적 높은 연꽃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모습으로 양어깨를 모두 감싼 옷을 입고 있으며 뒤로는 키 모양의 광배가 표현되어 있고, 왼쪽에 서있는 관음보살은 머리칼이 어깨 위에 흘러내린 모습에 얇고 투명한 겉옷을 입고 있으며, 오른쪽의 지장보살은 오른손으로 석장을 짚고 왼손에는 보주를 들고 있는 모습이다. 조선 성종 7년(1476)에 화원 대선사 해련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벽화는 색채나 신체의 표현 등 고려시대의 특징적 요소, 간결한 무늬나  기타 인물 표현 등 조선 초기 불화의 새로운 특징의 요소를 나타내고 있어 고려식 조선 초기 불화연구에 중요한 자료라고 한다.

 

[보물 제 1312호 강진 무위사 아미타여래 삼존불상]

 극락보전 불단 위에 모셔져 있는 아미타여래삼존좌상이다. 가운데 아미타불상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관음보살상, 오른쪽에 지장보살상이 자리하고 있다.
연꽃 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본존불은 얼굴은 다소 크게 느껴지나, 건장한 체구에 무릎이 넓어 안정감 있는 신체비례를 가지며, 약간 앞으로 구부린 자세이다. 아미타불상과 거의 같은 양식의 관음보살상은 왼다리를 대좌 아래로 내려 놓고 있고, 화려한 보관과 간단한 모양의 가슴장식이 있으며, 양어깨로 흐른 곱슬한 머리칼이 벽화와 같은 모습으로 손에는 보병을 들고 있다. 오른쪽의 지장보살상은 크기가 비교적 작고, 머리에는 두건을 쓰고 석장을 들고 있으며, 오른쪽 다리를 대좌 아래로 내려놓고 있다. 지장보살과 관음보살의 앞쪽 옷주름은 불상이 아닌 대좌에 표현된 것이다. 이 삼존불좌상은 고려 후기에서 조선 초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작품으로, 조선 중기 불상의 초기 시원적인 작품으로서 그 중요성이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150㎝ 정도의 장대한 크기의 불상임에도 불구하고 보존 상태가 매우 좋은 편이라 한다.  

 

[보물 1314호 무의사 극락전 백의 관음도] 그리고 미륵전 석불, 산신각

극락보전 후불벽화인 아미타후불벽화(보물)의 뒷면 그림으로, 삼존불 뒤의 벽에 그려진  파도 위에 연잎을 타고 서 있는 백의관음보살이 그려진 벽화이다. 하얀 옷을 입고 있어 백의관음보살이라 불리며, 흰 옷자락을 휘날리며, 오른쪽으로 몸을 약간 돌린 채 오른손엔 버들가지를, 왼손엔 정병을 들고 서 있는 형상이다. 간략한 옷주름과 화려하지 않은 장식 때문인지, 뒷편의 어두컴컴 한 곳에서 보아서 인지, 옷자락 날리는 모습은 눈에 들어오나 밑에서 올려다 보는 보살님의 인상에서 여느 화사한 모습의 관음 보살 인상은 받지 못한다. 관음보살의 뒤쪽으로는 해 모양의 붉은색 원이 그려져 있고, 앞쪽 위에는 먹으로 5언율시가 씌어져 있다고 한다. 조선 성종 7년(1476)경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극락보전을 나와 주위를 살피니 탑과 탑비가 자리한다.

 

[무형문화재 강진 무위사 삼층석탑]

 무위사 극락전 옆에 자리한 탑으로, 기단(基壇)을 2층으로 두고, 3층의 탑신(塔身)을 올려놓은 모습이다. 기단은 4면마다 기둥 모양이 있는데, 아래층은 면의 모서리외에 가운데, 위층은 모서리에만 두었다. 아래층에는 안상(眼象)을 새겨 장식하고,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분리된 각각  돌로 이루어져 있고, 몸돌의 모서리에도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다. 지붕돌은 4단씩의 받침을 두었으며, 처마는 끝부분이 가볍게 위로 들려 있고, 꼭대기에는 네모난 받침돌 위로 세 개의 머리장식이 있다.  만든 시기는 뒤에 서있는 선각대사편광탑비 (945년)와 같은 때이거나 그 보다 뒤인 고려시대 전기일 것으로 추측한다.

[보물 제 507호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

이 탑비는 선각대사 형미(逈微)를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고려 정종 원년(946)에 건립되고, 선각대사는 신라 말의 명승으로 당나라에 건너가서 14년만에 돌아와 무위사에 8년간 머물고, 고려 태조 원년(918)에 54세의 나이로 입적하자 고려 태조가 ‘선각’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이름을 ‘편광영탑’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 비는 대사가 입적한 지 28년 만에 세워진 것으로. 비 받침과 비 몸돌, 머릿돌을 모두 갖춘 완전한 모습으로, 몸은 거북이나, 머리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형상이며, 비좌(碑座)에는 구름무늬와 둥근형태의 조각이 새겨져 있다. 비 몸에는 선각대사에 관한 기록과, 최언위가 비문을 짓고 유훈율이 해서로 썼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머릿돌은 밑면에 연꽃무늬를 새긴 3단의 받침이 있고, 중앙에는 비의 이름을 새겼던 네모진 공간이 있으나 마멸되어 글씨를 알아볼 수 없고, 주위로 구름속 용의 모습을 조각되어 있다. 무위사선각대사편광탑비(보물 제507호, 높이 235 ㎝ x  너비 112 ㎝, 고려시대 탑비)

 

[보물 제 1315호  극락전 내벽사면 벽화] 국가 문화유산 포탈

정보의 부재로 방문하여 극락보전의 벽화를 보관 중인 성보 박물관을 지나쳐 벽화를 관람못 한 아쉬움을 가지게 된다. 극락보전 안쪽 벽에 그려진 벽화로  지금은 모두 해체되어 보존각에 보관ㆍ진열되어 있다는 것을 인지 하지 못하여 관람을  못하고 만다. 극락보전에서 본 그림은 복제품이고 진품은 성보박물관에 있다고 하니, 추후로는 성보 박물관 유무 먼저 알아보고 여행 목적을 달성하여야 할 것 같다.  벽화는 삼존불화, 아미타래영도, 오불도 2점, 관음보살도를 비롯한 보살도 5점, 주악비천도 6점, 연화당초향로도 7점, 보상모란문도 5점, 당초문도 1점, 입불도 1점 등으로 극락보전 안쪽벽을 장식하고 있었다고 한다. 자세함은 한번 더 방문할때 보려고 한다. 

 

[강진 무위사 대적광전]

마침 이날 오전 대적광전 점안 및 낙성 법회가 있었다. 법회에 참석은 못하였으나 뜻깊은 행사 날 방문했다는 새로운 추억을 만든다. 대적광전은 진리의 법을 상징하는 비로자나 부처님이 계셔서 ‘비로전’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비로자나 부처님은 슬기롭고 지혜로운 마음으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만물이 움직이는 이치, 곧 진리를 의미 하고, 비로자나 부처님은 오른손으로 왼손의 검지를 감싼 지권인의 손 모양을 하는데, 지권인은 중생들의 고통을 감싸 안고 중생과 부처가 하나라는 것을 의미한다. 

 

[대적광전 삼존불]

새로이 모셔진 삼존불은 세월이 흐르면 언젠가는 보물이 될 지도, 모셔진 불상의 수인이  비로자나불의 지권인과 다소 다른  두손을 모은 자세의 수인이 내눈에는 독특하게 느껴진다. 과거의 조상들의 유물 유적도 보전 하며, 새로이 무언가를 덧 붙여 가는 것이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필요와 욕망에 의한 것이라면, 변화 없이 영원히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없으리라 생각된다. 예전과 오늘을 조화롭게 발전 시키려는 노력 들을 이번 남도 여행을 통해 느껴 본다. 화사하게 피던 꽃들을 녹색의 잎이 대신 메꾸어 나가는 것을 보니 세월은 슬그머니 가고 있다. 이내 기울어 가는 해를 느끼며 많은 것을 내게 내어준 영암과 강진을 떠나 밤의 잠자리를 위해 집으로 향한다.

 

如一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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