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아흔일곱번째 - 고창

세종해피뉴스 2023. 3. 24. 19:34

- 선운사

호남으로  달린다. 오늘은 선운사로 간다. 노령 산맥의 끝자락  도솔산 도솔계곡과 선운계곡이 만나는 곳에 자리하는 사찰이다. 사찰의 입구에 자리한 너른 공원을 지나니 선운사의 일주문이 반가이 맞는다.

이곳의 창건 설화는 백제 위덕왕떄 검단스님에 의해 산문을 연이래 지금까지 내려온 다고 한다. 금단 스님은 소금 만드는 법을 이지역의 해적들에게 가르쳐 주어서 삶의 터전을 만들어 주고, 고마움에 이들이 선운사에 소금을 보시하게되어 이러한 소금을 보은염이라 칭한다고 전한다. 

선운사는 도솔산 북쪽 기슭에 있는 절로 신라 진흥왕이 세웠다는 설과 백제 고승 검단선사가 세웠다는 두가지 설이 전한다. 그러나 가장 오래된 조선 후기의 사료에는 진흥왕이 세우고 검단선사가 고쳐 세운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일주문]

너른 입구에 자리하지만 그위용은 당당하다. 일주문을 지나 선운사로 들어선다. 늘 그러 하듯 일주문을 통과하면서 마음을 가다듬게 된다.

 

[천왕문]

도솔천을 지나 선운사로 들어가는 정면에 자리한 선운사 천왕문은 건물 형태가 2층 누각이고, 현판도 2개이다. 2층 맛배지붕에 3칸의 2층 누각으로,  돌기둥 위에 나무기둥이 올려져 있다. 천왕문이라 글씨는 동국 진체를 완성한 원교 이광사의 글씨이며, 선운사는 일중 김충현의 예서라고  한다. 몇년 전 2층으로 되어있었고, 2층에는  범종이 있었는데, 범종은 새로 건립된 범종각으로 옮겨지고, 2층 바닥을 터서 사천왕상이 높아진 너른 공간에서 자신의 임무를 수행 할 수 있게 한다.

 

[사천왕상]

천장으로 눌린기세에 답답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사천왕들이 높은 천정 아래서 위엄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만세루]

2020년 최근에 보물 제 2065호로 지정 된, 스님들의 법회장소 이면서 강학 장소로 쓰이는 곳이다. 이즘의 만세루는 대부분 그역활을 다하지 못하고 신도나 관광객 같은 대중에 내어 주어 기념물 적인 건물로 쓰이는 듯하다. 원 주인이 사용하며 갈고 닦아야 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만세루 뒷부분]

 내부가 트여있는  정면 9칸 측면 2칸의 건물이다. 특이한 것은 기둥, 석가래등으로 쓰이는 목재가 다듬지 않고 껍질만을 벗긴 모양이다. 기둥에 사용한 목재는 어떤 것은 둘을 이어 붙이고, 일반 건물에 사용하기는  온전 하지 않은 재목을 사용 하였다. 

「고창 선운사 만세루」는 선운사에 전해지고 있는 「대양루열기」(1686년), 「만세루중수기」(1760년)에 따르면 1620년(광해군 12)에 대양루로 지어졌다가 화재로 소실된 것을 1752년(영조 28)에 다시 지은 건물이다. 정면 9칸 측면 2칸 규모의 익공계 단층건물이며 맞배지붕에 잘 남아 있다. 처음에는 중층 누각구조로 지었으나 재건하면서 현재와 같은 단층 건물로 바뀐 것으로 전해지며, 특징은 사찰 누각으로는 가장 큰 규모인 흔하지 않은 정면 9칸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만세루 내부]

 건물의 가운데 3칸은 앞뒤 평주 위에 대들보를 걸고 좌우 각 3칸은 가운데 고주를 세워 맞보를 거는 방식을 취했다. 이처럼 만세루는 하나의 건물 안에서 두가지 방식으로 보를 걸어 구조적 안전을 꾀하면서 누각의 중앙공간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어칸 고주 종보는 한쪽 끝이 두 갈래로 갈라진 자연재를 이용하였다. 이는 일부러 가공한 것이 아닌 자연에서 둘로 갈라진 나무를 의도적으로 사용하여 마치 건물 상부에서 보들이 춤을 추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이 건물의 또 하나의 특징이다. 이는 각자의 쓰임에 이용되고 남은 목재를 활용하여 지은 것이다. 정렬된 모습이 아닌 나름의 다양한 형태의 목재가 어울려 이루어 내는 모양이 눈을 끈다. 

새로 지어진 지장보살님을 모신 지장보궁을 찾는다. 

 

[ 보물 제 279호 선운사 금동 지장 보살 좌상]

사연있는 지장 보살상은 일제 강점기인 1936년 일본인 2명, 조선인 1명이 공모하여, 보살상을 훔쳐 팔아서 일본으로 건너간다. 이때부터 지장보상상이 영이를 나타내기 시작하여 소장자의 꿈에 수시로 나타나서 도솔산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한다. 이를 무시한 소장자는 우환이 끝이지 않고, 이어진 다른 소장자들도 같은 현상이 반복되어, 마지막 소장자가 고창 경찰서에 신고하여 모셔 갈 것을 부탁한다. 그리하여 1938년 2년 여만에 다시 모시게 되는 데 이 사실을 기념하는 사진과 내용이 지장 보전옆에 안내되어 있다. 

 

[금동지장보살 좌상]

청동 표면에 도금한 것으로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보살상으로 추정된다. 머리에 두건을 쓰고 있으며, 이마에 두른 굵은 띠는 귀를 덮고 배에까지 내려오고 있다. 선운사 도솔암에 있는 선운사지장보살좌상(보물)과 같은 형태의 불상이다.  넉넉한 얼굴에 눈·코·입이 작게 묘사되고, 삼도의 목은 짧고 굵은 얼굴을 바쳐주는 느낌을 준다.  오른손은 어깨까지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댈 듯 굽혔고, 왼손은 배에 붙여서 엄지와 중지를 약간 구부린 모습이다.

 

[보물 제 290호 대웅보전]

 대웅보전은 지금은 보수 중이다. 앞면 5칸·옆면 3칸의 규모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만든 기둥위의 장식구조가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옆면에는 높은 기둥 두 개가 있다. 전체적으로 기둥 사이의 간격이 넓고 건물의 앞뒤 너비는 좁아 옆으로 길면서도 안정된 외형을 지니고 있다. 건물 뒤쪽의 처마는 간략하게 처리되어 앞 뒤 처마의 모습이 다르며, 벽은 나무판으로 이루어진 널빤지벽이다. 수리가 완료시 다시금 방문이 필요한 건물이다.

 

[대웅보전]

이곳이 공사 중이라 몇곳 만 둘러본다. 현판은 이광사의 글이다. 창살무늬는 빗살 창호가 눈길을 끈다. 조선 중기의 건축답게 섬세하고 장식적인 구성의 화려한 건물이다.  안쪽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을 한 우물천장을 설치하였고 단청벽화가 매우 아름답다.

 

[선운사 소조 비로 자나불상 좌상]

보물 제 1752호인  소조 비로자나불 좌상은 가운데 비로 자나불, 좌우에 아미타불과 약사불이 모셔져 있다. 일반적으로 비로자나불이 주불이면 대적광전이라 하는데 이곳은 대웅 보전이라 이름 하여 일반적이지 않다.  후불 벽하는 각각의 불상과 일치시켜 1840년 11명의 화공이 그렸다고 한다. 이는 후불벽화가 조선후기에도 그려졌음을 알려 준다. 중앙의 비로자나불회도 좌우는 아미타회상도, 약사히상도가 자리한다. 고창 선운사 소조비로자나불좌상의 형태는 넓고 당당한 어깨, 긴 허리, 넓고 낮은 무릎으로 인하여 장대하고 웅장한 형태미를 보여준다. 이러한 장대하고 웅장한 형태미를 갖춘 대형 소조상들은 법주사, 귀신사, 완주 송광사 17세기 전반기 각지의 대표적인 사찰에서 조성되는데,  대형의 소조불상의 조성 목적은 불교계의 위상을 드러내고, 전란으로 소실된 불상을 재건하려는 의지가 담겨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마도 양대 전란 이후 재건불사 과정에서 달라진 시대적 분위기를 직·간접적으로 대변해 주는듯 하다.  대좌의 밑면에 기록한 묵서명에서 불상의 조성과정을 상세히 기록되어 있고, 비로자나, 약사, 아미타라는 삼불상의 존명을 분명히 적시하여 비로자나 삼불상의 도상 연구에 기준이 되며, 1633년의 제작시기와 17세기 전반기의 조각승 무염과 그 문하승(門下僧)으로 조성주체가 밝혀져 있다. 대형의 상임에도 불구하고 조각적·종교적 완성도가 높은 우수한 작품이다.

 

[불단 후면 벽화]

불단의 후면에는 보살과 금강역사의 벽화가 자리한다. 올려다 보는 벽화는 원래의 모습을 볼수 없음이, 뒷편의 좁은 공간과 함께 답답함을 느낀다.   

 

[6층석탑]

 대웅보전 앞의 탑을 마주한다. 얇고 길다는 느낌과 몇층인가 하는 의문과 지대석은 왜 저리 작은가하는 생각을 갖게된다. 화강암 재질의 이탑은 지금은 6층 탑의 형상으로 서있는 데 본래는 9층 석탑으로 본다고 한다. 고려 시대의 탑으로 추정하는데, 보개 등은 신라장식의 모습이다. 일반 적으로 탑의 층수는 홀수, 기단은 짝수로 음양의 조화를 가지고 건립하는 데 지금의 모습은 6층 형태이다.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는 서로 다른 석재로 되어 있어  훼손과 잦은 보수작업 중건이 있었던것 같다. 성종시대는 탑이 9층 이었다는 대웅전 앞마당에 자리하고 있는 고려시대의 석탑이다.

사적기에는 조선 경종때  행오선사가 홀로 우뚝 솟은 9층 석탑을 보고 사찰의 중창을 도모한 것으로 적고있고, 현재의 탑은 성종이후 유실된것으로 추측한다. 기단(基壇)을 1층, 그 위로 6층의 탑신(塔身)을 올려 놓았다. 기단의 네 면과 탑신부의 각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새기고 얇아 보이는 지붕돌은 밑면에 5단씩의 받침을, 처마는 양끝에서 가볍게 들려있다. 머리장식은 대체로 잘 남아 있다.

[영산전]

 고창 선운사 영산전은 대웅전과 함께 선운사를 대표하는 불전으로서 1713년에 2층 각황전으로 창건, 1821년 단층으로 재건하는 등 연혁과 관련된 기록이 명확하다. 건축물의 형식은 19세기 초 부불전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1고주 7량가 양식을 적용하면서 다른 사찰의 영산전 건물과 다른 형식의 구조, 공포, 평면구성을 보여주고 있어 건축적 독창성과 희소성을 가지고 있다. 건물 내부 벽면에는 1821년 재건 당시의 벽화가 조성되어 있어 미술사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는 등 건립 당시의 원형을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어 가치가 높다. 영산전 처음 누각은 2층 전각이었는데 정유재란에 소실되어 다시 지으며 일층으로 지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안에 모셔진 큰 불상이 꽉차 보이며, 영산전은  대웅전 보다 한단이 높게 자리한다. 

 

영산전  삼존불상은 원래는 장육전에 모셨던 불상으로  지금의 건물과는 맞지 않는다. 이에 청담스님이 옮기려 할때 불상에서 빛이 나와 옮기지 않았다고 한다.  석가여래좌상과 아난·가섭의 협시보살입상으로 모셔지고 향나무로 만들어진 16나한이 웃음띄며 자리한다. 가운데 있는 여래좌상은 머리가 크며, 얼굴은 사각형에 가깝다. 목 아래에는 3개의 주름이 좁게 표현되었고, 옷은 양 어깨를 덮고 있으며 옷주름은 간략화되었다. 가슴은 넓으며 가슴 밑에 아랫도리 윗자락이 직선으로 표현되었다. 16각의 난간을 두른 나무로 된 연꽃무늬 대좌(臺座)에 모셔져 있다. 양쪽의 협시보살은 화려하게 장식된 관(冠)을 쓰고, 손에는 연꽃을 들고 있는 목조불 이다.

 

[팔상전]

 1597년 정유재란에 불탄 것을  1706년 에 중수 보수중건,  그 당시 것은 소실되고, 팔상탱화는 없어진다. 새로이 1900년 조성하였다. 

 

[동백나무숲]

 천연기념물 제 184 호인 통백나무 숲을 대한다. 팔상전 뒤편에 자리하며 수령이 약 500백년이나 된 동백나무는 꽃이 피는 시기가 가장 늦어 춘백이 떨어지는 4월 중순에 꽃을 피운다고 한다. 이곳이 동백의 최북단 자생지이며 크기는 16,000평이다.  미당 서정주가 고향의 사찰인 선운사의 동백으로 쓴 시  " 선운사 골짜기로  선운사 동백 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했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 만 상기도 남았습니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니다. " 이곳을 찾은 시기가 이른 내 마음도 이와 같것만, 이내 4월에 기회가 닿으면 동백꽃 구경을 와야 겠다고  마음 먹는다.

 

[범종각]

새로이 만들어진 범종각 왼쪽에 보이는 종이 천왕문 누각에 자리하던 종이다. 이 종은 신라와 고려 종에서 보이는 유곽과 유두를 가지고 있지만, 용통이 없고 2마리 용으로 만든 용뉴, 몸체 가운데와 종 입구 위에 두른 횡선이 있는 조선 종의 모습을 하고 있다. 발길을 옮겨 창담암으로 오르다 미치지 못하고 멈춘다. 늦은 오후의 산길에, 해도 빨리 떨어질 듯 하고, 지금 찾는 것보다 창담암과 도솔암을 동백이 피는 4월 중순에 다시 찾아오리라 생각하고 발길을 돌린다.

  

[백파율사 비]

백파율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조성한 이 비석은 선운사 입구로 들어서서 오른쪽 숲 속의 부도 밭에 세워져 있다. 조선 철종 9년(1858)에 건립한 것으로 비명(碑銘)은 조선시대의 대명필가인 추사 김정희의 필적이다.

 

[천연기념물 제 367호 고창 삼인리 송악]

사찰을 지나 주차장으로 가며 천연기념물을 대한다. 송악이라하여 소나무의 일종인가 생각하는데 두릎나무과의 늘푸른 덩굴식물이라고 한다. 이 계절에 푸른 색을 띄어 있어  송악이라 불러온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바위를 덮고 푸르름을 보이는 모습이 신기하다.

 선운사에는 지장보살이 4분으로 관음전, 명부전, 창담암과 도솔암에 자리 하신다고 한다. 오늘은 먼길의 방문으로  암자에 자리하신 분들을 뵙지 못하였으나, 동백이 필무렵 다시 한번 방문한다면, 좋은 여행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집으로 향한다. 

 

如一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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