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아흔 네번째 - 홍성

세종해피뉴스 2023. 3. 4. 21:51

홍성의  용봉산 앞에 도착 한다.  먼 발치서 늘 멋진 산이라 느끼던 곳이다. 올려다 보이는 산등성이의 암반이 여러 모양으로 나를 유혹하지만 올라갈 엄두도 준비도 안되어 눈에만 담아본다. 

오늘은 이곳의 용봉산에 자리한 마애불을 찾아나서는 길이다. 이제는 시간의 제약이 없어 산 중턱이나 정상 부분에 자리한, 조금은 시간이 들어도 걸어야 볼 수 있는 마애불을 주로 찾아 보려 작정 했기 때문이다. 그 시작을 이곳 에서 하고저 한다.  

 

[용봉산]

홍성의 용봉산은 산세가 용의 형상과 봉황의 머리를 닮은데서 유래하고,  8개의 산봉우리로  팔봉산이라고도 한다. 예산군 덕산면에도 걸친  해발 381m의 크거나 험하지 않은, 산 전체가 바위산으로 병풍바위, 장군바위 등 기암괴석이 많아 ‘제2의 금강산’으로 불린다. 용봉사와 고려시대의 불상인 보물 제355호인 홍성 신경리 마애여래입상, 용봉사마애불, 상하리미륵불 등 다양한 문화재가 있다.

 

[용봉산 휴양림 표지석]

 이전 처럼 용봉사 절 앞으로 차로 방문할 까 생각하다가 주차장에 주차하고 한 걸음 걸음 올라 사찰로 향하기로 한다. 운동 돼서 좋고 주변의 모습을 볼 수 있어 좋다는 생각으로 걸음을 옮긴다. 이제는 걸어서 하는 여행도 필요하다고 느겼기 때문이다. 휴양림을 알리는 돌비석 옆에는 매표소가 있다. 포장 된 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긴다. 나무가 있는 숲길을 가쁜 숨을 몰아 쉬며 오르는데 이내 숨이 가빠온다. 나의 숨소리가 유난히 크다고 느끼서 맞은 편 사람이 보이면 숨을 멈추는 행태도 취해 본다. 난 아직 걸을 수 있어 하면서 길을 오른다. 주변 경관에 시간은 걸리나 보답이 없는 것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용봉사 일주문]

언덕을 보며 계곡을 지나니 일주문이 맞이한다.  가쁜 숨을 잡아 가며 일주문을 바라 보곤 합장 인사를 올린다. 이제 부터는 부처님의 불국토이다.

용봉사에 거의 당도하니, 오른쪽에 마애불이 나를 반긴다. 가쁜 숨과 무거운 다리를 이끌고 마애불의 땅으로 자리를 옮겨본다.

 

[용봉산 마애불]

마애불은 큰바위의 한 귀퉁이를 다소곳이 차지한다. 불상은 신경리 용봉사(龍鳳寺) 입구의 서쪽에 서 있는 바위에 돋을 새김한 불상이다. 바위를 불상 모양보다 크게 파내고 조각하였는데 마멸이 심하다. 머리 부분은 뚜렷하게 돌출 되었으나 아래로 내려갈수록 안정되어 있다. 안내판에는 8세기의 이상적 사실주의가 엿 보이면서도 9세기 불상 양식의 특징이 상당히 묘사되고 있어 9세기 불상 양식의 시작을 알려주는 좋은 예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고 일러준다.

  

[용봉산 마애불]

 민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큼직하게 솟아 있고, 얼굴은 타원형으로 양감있게 표현하였다. 눈과 입은 얼굴에 비해 가늘지만 흐뭇한 미소가 번져 있어 8세기 신라 불상의 이상적인 얼굴 특징이 많이 남아 있다. 귀는 거의 어깨에 닿을 만큼 길게 내려와 있으며, 목에는 3줄의 삼도(三道)가 있다. 불상의 오른쪽어깨에  정원 15년이란 글이 있어 799년 (신라소성왕 원년)에 제작되었음을 알수 있다. 마애불중 드물게 제작시기와 인물의 정보가 남아있다. 신체는 양감이 부족하여 평판적인데, U자형의 옷주름은 매우 도식적이고 얕게 조각되어 더욱 평면적으로 보인다. 오른손은 내리고 왼손은 붙인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두 손이 몸에 비해 현저하게 작다. 딴 돌에 연꽃 무늬 대좌(臺座)를 새기고 거기에 두 발을 조각하였으나, 근래에 만든 공양석에 가려서 알 수 없다. (나만의 문화유산 해설사)

 

[ 용봉사 ]

수덕사의 말사로 절의 자세한 역사는 알수 없다고 하는데 주변에서 발견되는 기와편으로 보아 백제말에 창건 되었을 것으로 추정 한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평양 조씨가문에서 얫 용봉사터에 묘를 조성하기 위하여 용봉사를 폐사 시켰다고 하는데, 묘비명으로 보아 1906년 전후로 추정된다. 이에 주민들과 신도들이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여, 본래의 위치에서 약간 동쪽 아래로 옯겨진 상태이다. 가람 배치는 남동향으로 3단의 대지에 최상단에는 60cm정도의 높이로 축대를 쌓고 정 측면각 3칸의 맞배지붕, 주심포 양식의 대웅전을 마련하고, 그 아랫단은 동편으로는 요사채 서편에는 우물이 있다. 우물의 아래 앞부분에는 탑재석과 목부분을 수리한 약사 여래좌상이 그리고 최하단에는 평탄 대지와 구분하여 사지 주변에 있던 석조, 맷돌, 저구 등의 석제물이 있다.

 

[지장전]

입구에 보물인 영산회 괘불탱에 대한 설명이 있어 이곳을 찾아본다. 평소에는 볼 수 없는 괘불탱이라 궤불의 모습이 궁금했는데  지장전을 둘러보니 괘불탱을 축소한 듯한 탱화가 보인다. 

궤불의 크기가 5~6미터 정도이면 이 전각의 높이 보다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크기에 관계없이 궤불의 그려진 형상을 알게 된 것이 나름 반가웠다.

 

[지장전 내부 탱화]

지장전 내부의 궤불은 크기가 원 괘불의  반 정도 인 듯 보인다. 빛에 의해 퇴색 됨을 보며 사진출력이 아닌가 생각한다.

 

[보물 제 1262호 용봉산영산회회괘불탱 ](문화재청자료)

화면 중앙에 석가를 화면 가득 그리고, 8대보살, 10대제자 등의 무리가 석가의 주위에 에워싼 구도이다. 석가는 중앙에 앉아있다. 석가불 양 옆으로 서 있는 8명의 보살들 연꽃 등을 들고 있으며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격인 사천왕과 제석천, 범천이 보살들과 함께 석가불 주위를 에워싸고 있다. 그림의 윗부분은 10명의 제자들이다. 이 그림은 숙종대왕의 아들이 일찍 죽자 거대한 불화를 그려 아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제작된 것이다. 조선 숙종 16년(1690)에 승려화가 진간이 그렸는데, 영조 1년(1725)에 그림을 고쳐 그리면서 적어 놓은 글이 그림의 아랫부분에 있다. 이 괘불도는 본존인 석가불의 크기가 작아진 점 등에서 17∼18세기의 특징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작품으로 회화사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여겨진다.(나만의 문화유산 해설사)

이 그림은 가로 5.5m, 세로 5.93m의 크기에 보물 제 1262호 이다. 안내판에는 이 그림은 조선 숙종 16년(1690) 승려화가 혜숙, 한일, 치련, 수탁등 7명이 그렸고, 1725년 영조 1년 에 그림을 고쳐그리면서 적어논 글이 그림의 아랫부분에 있고, 1987년에 다시 보수하였다고 한다.

 

[용봉사지 석조 석구 마애]

서쪽 능선에 있던 사찰을 옯기면서 이곳으로 옮긴 석물 들이다. 눈이 덮혀 있어 안내판으로 그 모양을 짐작해 본다. 석조는 스님들이 물을 모아 사용 하던 것으로 직사각형의 모습에 모서리에 배수구를 가지고 있다. 석구는 속을 파내어 그곳에 곳식을 넣고 찌던 돌절구로 네모난 모양으로 팽이모양의 동그란 홈이 있다. 마애는 곡식을 가는 맷돌로 네모 모양이다.  제작연도는 알 수 없으나 창건 때 만들었을 것으로 생각해본다.

 

[용봉사]

절을 돌아 오른 쪽으로 두고 뒷산 위로 오른다. 오르는 길에 사찰을 폐사시킨 자리인 듯 한 장소에 있는 묘와 묘비를 본다. 절터일 것이라 생각하며 묘를 지나 산위로 오른다. 신경리의 마애불을 찾아 오르는 길은 멀지는 않으나 제법 경사가 있는데 계단과 난간의 설치로 좀 쉽게 오른다.

 

[홍성 신경리 마애여래 입상: 보물 제 355호]

고개마루를 오르니 눈앞에 잘 다듬어진 마애불이 보인다. 혼자 서 있어 방문자에게 무언가 말해 주려 하는 듯  묵묵히 급어보고 있다. 바위에 불상이 들어갈 정도의 감실을 파서 그안에 덛을 새김을 한 거대한 불상이다. 이곳의  자연석에 조각하느라 이 산중에서 머물며 작업한 사람이 누구인지, 어찌 구상해서 이렇듯 멋지게 조각했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충청남도 홍성군 용봉산에 있는 불상으로 독특한 모양의 돌출된 바위면을 파서 불상이 들어 앉을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 돋을새김으로 높이 4m의 거대한 불상이다.

 

 

앞면은 감실을 조성하고 바위면이 경사진 채로 서 있다. 기울어 져 있는 모습은 마치 세상을 굽어 보려 하는 듯 하다. 이러한 기울기 때문인지 마애불의 보전 상태가 나쁘지 않다. 얼굴이 몸에 비해 다소 크게 보이고 볼이 도툼하다. 갸름한 눈고리에서 인자 함이 풍긴다. 코와 입은 작은 편이고 귀는 길다. 심체가 얼굴에 비해 다소 왜소한 듯 보이고 옷 주름은 U자형으로 통정의 이며, 아래로 가면서 가느다란 음각선으로 표현, 앞서 입구에서 보던 마애불과 같은 형식이라 생각된다. 수인은 시무외연인을 하고 있지만 다른 점은 오른손은 내려 다리에 붙이고 왼손은 들어 가슴위에 올리고 있다. 광배는 거신광으로 파낸 바위면을 이용해 3조의 음각선으로 두광과 신광을 나타낸다. 사각형의 개석은 후대에 올려 놓은 듯 하다고 한다. 발 부분은 따로이 조각하여 밑에 받쳐 놓은 형상이다. 조각양식으로 보아서는 고려 초기의 것으로 추정하는데 불상 아래서 기와 조각 들이 출토 된 것으로 추정 한다고 하는 데, 마애불 앞의 공터와 주변 환경으로 보아 사찰이 존재했을 것을 느끼게 된다. 

 

[마애불 뒷면]

 불상의 뒷면에서 보이는 모습이 궁금하여 올라 보았다. 중생을 이렇듯 오랜 세월동안 지켜보며, 많은 중생의 일상을 불심으로 지키기 위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같은 자리에서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마애불 뒷편에서 마애불의 시선을 따라 산아래 인간의 생활을 지켜본다.  아마도 세월 지나면 만사의 욕망이 다 부질없는 일인 것을 왜 들 그리 바삐들 지내는가 하는 생각을 전하려는 듯하다.

 

[용봉사 전경]

마애불을 친견하고 돌아 내려 오는길 용봉사의 전경을 담아본다. 사진 찍는 자리가 원 절터 인 듯한데 용봉사를 나와 홍성의 또 다른 보물인 당간 지주를 찾아본다.

 

[보물 제 538호 홍성 오관리 당간지주]

 당간이란 깃발을 거는 깃대이고 이를 받치는 것이 당간 지주라고 알고 있다. 이 보물로 지정된 당간 지주는 개천을 낀 둑아래에 읍내에 존재한다. 이 주변은 옛 고려시대의 "미륵사"가 있었던 유래가 있는 곳이라 안내판에 적혀 있다. 밑둥에  동그랗게 파진 석조물을 보며, 밑둥이 저 정도의 큰 나무를 깃대로 사용하였나 보다고 생각한다. 저 정도에 맞는 목재로 기둥을 만들었구나, 깃대의 높이도 높았을 것이고, 주변 어디에서도 보이겠구나를 느끼게 된다. 위용이 대단했을 것이다. 이따금 쇠당간 들을 보았지만 아직 걸어 놓은 깃발을 본 일이 없다. 어디엔가 지주에 거는 당 이라는 깃발이 존재 하여 그 실체를 알 수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당간비구의 문양은 안쪽에는 무늬가 없고 바깥쪽으로 두줄을 돋을 새김으로 새겼다. 위쪽에 당간을 고정할 네모의 홈이 있다. 왜 당간 지주들은  보물로 지정 된 것이 많은 지 궁금증을 가지게 된다. 

사실 이 일대는 고려시대의 광경사(廣慶寺)터로 알려져 있고, 이 광경사지에 당간지주와 석탑 및 석불좌상 등이 함께 있었다고 한다. 명칭에 왜 광경사 당간지주라고 정해지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아마도 이곳이 미륵불을 모시던 절이라 미륵사라 불리어서 안내판에 적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홍성의 광경사는 고려시대에 창건되어, 이후 언제 폐사되었는지 모른 다고 전한다. 『홍성군지』에는 5백년 전에 폐사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광경사터에 이 당간지주와 함께 했던 석불과 석탑을 찾아 나선다. 보물이 아닌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탑과 석불이지만 연계하여 그 모습을 보려  찾아 나선다.

 

如一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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