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아흔 여섯번째 - 예산

세종해피뉴스 2023. 3. 14. 22:39

바퀴를 예산으로 향하게 한다. 예산하면 떠오르는 수덕사가 있으나, 나의 차바퀴는 사면불상을 찾아 나선다. 이전의 방문시와 달라진 것이 없음은 관리가 잘 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해 본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멀리 사면 불상이 있는 언덕을 바라 본다. 원래 이 자리 일까? 이 곳이 절터 이었을까? 충청지방의 사찰이 비교적 낮은 지역에 자리한 것을 보면 사찰이 있었겠지? 덩그러니 큰 바위는 원래 이곳에 있던 것 일까 궁금한 적이 있다. 그 당시 내게는 왜 이곳에 불상이 존재하는지 생각이 많았다.  주변에는 암벽도 없고, 여타 바위도 존재하지 않은 데, 이 동산에 덩그러니 있는 커다란 바위에 사면에 불상을 새긴 원력은 무엇이었을까?

 

[화전리 사면 불상]

이 사면석불은 원래의 위치에 인위적 으로 넘어뜨림으로써 쓰러져 있었음을 알게 되고, 또한 불상이 서 있었을 당시의 기단유구도 남아 있음을 알게 된다. 

비바람에 더 이상의 손상을 막기위해 전각을 지어 보호 하고 있다.  1983년 화전리 미륵당이라고 불리는 이곳 야산에서 발견된다. 백제 유일의 사면불상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석조사면 불상이라고 한다.

 

[전각]

6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백제사면불로는 유일하다. 자연석 4면에 불상을 조각한 것으로, 땅속에 묻혀 있던 것을 1983년에 국립공주박물관이 발굴하여 1984년 보물로 지정․관리하고 있다. 서산과 태안의 마애불과 비교되는 우수한 문화재로 불교사와 미술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라고 한다. 이 사면석불은 쓰러져 있어서 주변을 파서 노출시키기 전에는 전체의 3분의 1가량만 보였다 한다. 이 곳은 신고인 권씨의 선영을 포함해서 마치 중앙 사면석불을 민묘들이 에워싼 모양이었다. 그리고 주변은  15∼20년생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고, 동남쪽 민가방향에서 기와편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주변에는 몇개의 괴석, 잡석 와편 등이 있으며 특이한 유물은 일부가 파손된 귀부, 방형의 탑기단석이 있다. 마을에서는 이곳을  「미륵당이」라고 구전해 오고 있다. 마을에서 풍년을 위한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보물 제 794호 예산 화전리 석조사면 불상]

 사면불은 일명 ‘사방불’이라고도 하는데, 동·서·남·북의 방위에 따라 사방 정토에 군림하는 신앙의 대상인 약사불, 아미타불, 석가불, 미륵불을 뜻한다.

남쪽면에는 여래좌상의 주존불이, 동서북 면에는 여래 입상이 약 1m 내외 크기로 조성되어 있다. 머리는 모두 파괴되어 있고, 양손도 따로 만들어 홈에 끼우게 되어 있으나 모두 없어졌다. 

남쪽면의 여래좌상은 양쪽발을 무릎에 올려놓은 결가부좌 자세로 가슴과 광배만이 원래의 모습을 유지한다. 

동쪽과 북쪽의 두 여래입상은 비슷한 형태이며 어깨를 덮은 옷자락이 "U'자형으로  발목까지 흘러내린다.  대좌와 두광에는 연꽃 무늬가 새겨져 있다.

서쪽면의 여래 입상은 마모가 심하며, 새겨진 연꽃무늬는 백제특유의 양식으로 모양은 훼손되었으나 백제특유의 조각수법이 나타난 석불로 평가된다.

 

전각의 외곽을  맴돌며 사면 불상의 원 모습을 상상해 본다. 자연석의 바위에 결에 맞추어 사면에 불상을 모시겠다는 생각이 놀랍다. 백제의 미소를 담은 백제의 불상의 두상을 가지고 있었으리라 생각해본다. 둥그스럼하고 두툼한 윤곽에 미소를 짓는 백제의 용현리 불상의 두상을 사면불 마다 올려본다. 화려한 광배에 머리없는 불상이 전각의 목책안에 들어 앉은 모습에 마음이 무겁고 주변의 공기 마저도 차갑게 느껴진다. 

발길을 돌려 돌아 오는 길 예산의 또 다른 보물을 찾아 본다.  세심천 온천탕을 끼고 수암산을 오르는 듯 가다 보면 오른편에 자리한 석불을 만난다.

 

[수암산에 자리한 삽교리 석조 보살 입상]

2개의 돌을 이어서 조각한 석불로 충청남도 예산군 수암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10여분의 산행이지만, 보물이 없다면 오르려 하지 않을 곳을 오르다가 마주한 불상을 접하고는 힘내서게 다가가 본다.

 

[보물 508호 예산 삽교리 석조보살입상]

삽교읍 목리의 냇가에  있던 것을  1971년 지금의 현재 위치로 옮겨 놓았다 한다. 삽교 목리는 바닷길에 들어가는 곳, 포구여서 이 불상은 이 지역의 해상세력에 의하여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뱃길의 안정을 위해 사찰과 불상을 모시는 일은 백제 시대부터 내려오는 전통으로, 서해안은 사찰이 포구를 드나드는 길목에 많이 자리 한다고 본다 , 지금은 예당 평야를 굽어보고 있다.

 

[보물 508호 예산 삽교리 석조보살입상]

높이는 5.49m이고 어깨너비는 1m, 둘레는 3.74m이며, 머리에는 두건같은 관(冠)을 쓰고 있고, 그 위에 6각으로 된 갓 모양의 넙적한 돌을 올려 놓았다. 어깨의 윤곽은 아래로 내려가면서 조금씩 넓어지지만 밋밋하여 마치 돌기둥 같다. 왼손은 몸에 붙인채 아래로 내리고 있고, 오른손은 가슴까지 올려 돌지팡이같은 것을 잡고 있는데 양 발 사이까지 길게 내려오고 있다. 거구이면서 불륨 없는 돌기둥 형태, 간략한 신체표현 방법 등이  충청 일대의 불상이 지니는 돌기둥 형태를 가진 불상이다. 

 

 

여행을 통해 조금씩 알게 되는 충청도의 석조 불상이라 생각된다. 학술적이 아닌 느낌적으로 그 들 만의 불상 형태라는 알 수 없는 공통점을 몸에 익혀 왔다. 두툼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몸체는 이어 붙이거나 한몸이거나 원주형이며, 머리에는 갓 형태의 관을 쓰는 것 등 유난히 둥글둥글 큼직한 이목구비를 가진다.  왜 사면 보살과 이곳 석조보살은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을까?  삼국시대의 섬세하고 세련된 백제 불상과 거석 문화같은 높이만 중시한 듯한 고려 시대의 불상의 차이인 듯은 한데, 고려시대 이곳 충청도는 왜 이러한 불상들을 모시게 되는 지  궁금증이 생긴다. 좀 더 많은 여행을 하다보면 자연히 알게 될 까. 어디에서 이러한 자료를 찾을 수 있을지, 오늘은 왜 이리 궁금한 것이 많지 하는 생각 속에 길을 돌아 내려가 집으로 향한다.

 

如一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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