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아흔 세번째 - 서울

세종해피뉴스 2023. 2. 26. 17:13

- 국립중앙박물관

서울 방문중이다. 오늘은 시간을 쪼개서 국립 중앙박물관으로 향한다. 그리도 보기를 염원하던 반가사유상을 접견하기 위해서 이다. 이곳을 먼저 다녀간 동생의 권유와 그래도 새로이 꾸민 사유의 방을 늦었지만 찾아 보는 것은 당연한 예의로 생각하여 들러 본다. '두루 헤아리며 깊은 생각에 잠기는 시간'이라는 표지글을 보며 들어서는 사유의 방엔 몇분의 관람객이 있었으나 조용하고 엄숙한 분위기이다.

완만한 경사 저편에 자리한 두 부처님을  올려 보니 이 편으로 다가와 함께 생각에 잠기기를 내게 평하는 분위기이다. 혼자 만이 아닌 두 분이 서로 날 보러 와 함께 생각해 보자는 것 같다는 착각을 가져본다.  조금 떨어져 이 곳의 분위기와 생각에 잠긴 두 불상을 바라만 볼 뿐이다. 잠시의 적막 속에 궁금증을 가져 본다. 두분을 모셨는데 누가 더 형인가 ? 그리고 왜 생각시 오른손으로 턱을 괴고 있지? 두분은 같은 것을 생각할까? 그럼 그것은 무엇일까?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도 오른팔로 괴고 있었던 듯 한데 로뎅은 언제 반가사유상을 보고 영감을 얻은 것은 아닐까?  두분은 같은 화두를 가지고 생각하며, 로뎅이나 부처님은 모두 오른손잡이여서 일 것이라 혼자 결론 내려 본다. 

 

[국보 78호 금동미륵반가사유상 과 국보 83호 금동미륵반가사유상]

종전 국보 78호는 금동미륵반가사유상 (1962-1)으로  국보 83호는 금동미륵반가사유상 (1962-2)으로 문화재청에서 개명되었나 보다.

난 예전 의 번호로 구별하여 본다. 다소 여성스러워 보이며 화려한 의상과 보관을 쓴 국보 제 78호 반가사유상은 6세기 후반 작품이며. 그에 비해 장식이나 의상 소박해 보이는  남성스러워 보이는 국보 83호 인 오른쪽의 반가사유상은 7세기 작품으로 알려진다. 어차피 성을 구별하고저 한것은 아닌데 오른 손의 손가락의 모습은 다소 반대스럽기는 한 것 아닌가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해본다. 

국보 78호 (왼족)의 보관엔  해와 달이 표현 되어 있다. 반면 83호(오른쪽)는 삼산관을 쓰고 있다. 78호는 화려한 보관에 비단 장식의 옷을 걸친듯 한 섬세함이 보이지만, 83호는 비교적 두터운 하의에 웃통을 벗고  금목걸이를 걸고 있다. (남성미를 과시하는 듯한?) 78호는 의상이 선으로 표현되어 비단 얇은 천의 느낌이지만, 83호는 주름이 깊고 두터워 보이는 의상을 걸친듯 한 느낌이다. 

 

[반가 사유상의 앞뒤모습]

관람라인을 따라 두 불상을 둘러 볼 수 있게 되어 있어, 여느 불상과 달리 360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두 분의 사색을 깨우지 않게 조심 조심 걷다보니 사진의 셧다 소리 내는 것도 조심스럽다. 한바퀴를 돌아본다. 사진 촬영은 허가 되나 동영상 촬영은 자제 시킨다. 늘 그러 하듯 왜 일까 궁금하다. 왼쪽78호 불상이 6세기 후반에 먼저 제작 된 것이고, 시대적으로 50년 정도 후 7세기에  83호 오른쪽이 제작 된 것으로 본다. 83호는 우리나라에서 건너가 일본의 국보로 지정된 목조 미륵반가사유상과 양식이 같다고 한다.

78호는 주조 과정시 시행 착오의 흔적이 있다고 한다. 금동의 두게를 4mm로 주조하여  밀남을 녹이고 난 부분이 좁아서 쇳물이 골고루 흐르지 못하여 곳곳에 금속을 붙인 흔적이 발견된다고 한다. 우리는 전시된 것으로 알 수 없으나  이는 방사선을 이용한 과학적 분석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그래서 인지 83호는 이를  바탕으로 밀랍의 두께를 10mm 로 두텁게, 그리고 점토의 성분 변형 (식물, 모래 입자)등의 여러 시도( 밀랍이 녹아나갈때 기포도 나가도록)끝에 이어 붙이지 않고 한번에 주조에 성공한 것으로 나타난다. (정명희 학예관 ) 아울러 불상이 간직한 잔잔한 미소는 마치 모나리자의 미소를 연상시키는 미소를 가지고 있다고 느끼게 된다고. 아름다움이나 예술적인 것의 추구와 표현은 동서가 유사하다는 이야기인듯하다.  

어느 매체를 통한 문화재를 보는 안목에 대한 강의 내용에 불교에서 비롯한 문화재를  불교 유물로 만 취급하지 말고 종교를 떠나 우리의 문화재로 보자는 이야기를 접했다.  유럽의 많은 문화재도 그 시대의 종교에 기인한 것이 대부분이나, 우린 특정 종교가 아닌 서양 예술이라 하는데, 우리도 이제는 불교 작품들을 불교 문화라는 취급하기 보다는 당시 시대를 반영하는 우리 한국 문화로 받아들여 져야 할 것이라는 의견에 공감 했었다. 입구에 준비된 의자에 앉아 먼 발치로 문화유산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보려 한다. 무슨 생각을 해볼까 하는 화두도 없다. 그냥 사색에 잠긴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다. 물을 멍하니 바라보는 것을 물명이라하면 나의 행동은 불멍이다. 방을 나서서 다른 방을 방문해 본다. 

 

[그리스 투구; 보물]

1987년에  보물로 지정된 그리스 투구 앞에 선다. 의외다  여러 유물이 앞으로 글로벌화 되어 가는 데 향후의 우리 후손이 바라보는 보물은 어떻게 변할지 갑자기 궁금하여 진다.

시간과 역사가 거듭 되었을때 보물의 기준은 어떻게 변할 지 지금은 어느 정도 보물이나 국보에 관한 나름의 느낌을 알아가는 데 갑자기 생각이 많아진다. 문화재청 자료를 통해 그 내막을 들여다 본다. 

1936년 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 경기대회 마라톤 경기에서 우승한 기념으로 받은 높이 21.5㎝의 그리스의 청동투구이다. 기원전 6세기경 그리스의 코린트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1875년 독일의 고고학자에 의해 올림피아에서 발굴되었다. 형태를 보면 머리에 썼을 때 두 눈과 입이 나오고 콧등에서 코끝까지 가리도록 만들어졌으며, 머리 뒷부분은 목까지 완전히 보호하도록 되어 있다. 눈과 입의 노출을 위해 도려낸 부분과 목과 접촉하는 부분에는 윤곽선을 따라 실을 꿸 수 있도록 구멍이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 투구 안쪽에 천을 대어 머리에 썼을 때 완충 효과를 생각했던 것 같다.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에게 부상으로 수여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손기정에게 전달되지 않고, 베를린 박물관에 보관되어 오던 것을 그리스 부라딘 신문사의 주선으로 우리나라에 돌아오게 되었다. (문화재청)

 

눈에 익은 보물의 모습들이 보인다, 국보나 보물 급의 도지가를 직접 대하기  쉽지 않은데  몇 점을 대한다. 어느날 갑자기 이곳 박물관에 소장 중인 보물, 국보로 지정된 모든 도자기를 특별 전시하면 어떨가? 국립 중앙 박물관에 건의 할까? 우리는 모아보며 비교하는 것을 즐기지 않을가? 한번에 다 볼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발 품 팔아 보는 것이 쉽지 않은 많은 사람이 좋아하지않을까? 오늘은 질문만 많아진다. 처음 서울온 시골 청년같이. 

 

[분청사기 연화당초문 병:보물]                                                               [청자양각갈대기러기문 정병 : 보물]

분청사기 연화당초문 병은 조선시대 만들어진 높이 31.7㎝, 아가리 지름 8㎝, 굽 지름 9.9㎝인 항아리로, 목을 지나면서 서서히 팽창되어 몸체 아랫부분에서 팽배되었다가, 다시 좁아져 굽에 이르는 안정감이 돋보인다. 아가리부분은 나팔같이 벌어지고 목부분은 좁다. 전체적으로 두 세줄의 백상감 선을 넣어 그 사이사이에 덩굴무늬, 도식화된 연꽃무늬을 그려 넣었다. 몸통 중앙에는 3곳에 연꽃무늬를 그렸으며, 연꽃은 줄기와 잎이 덩굴로 연결되어 있다. 여백은 빗방울이 떨어진 자국을 무늬로 만든 우점문을 백상감하였다. 특히 연꽃과 연잎의 윤곽선은 백상감으로, 안의 표현은 흑상감으로 처리하여 장식이 돋보인다.

 

청자 양각갈대기러리문 정병(靑磁 陽刻葦蘆文 淨甁)은 고려 중기에 만들어진 청자 정병으로 높이 34.2㎝, 아가리 지름 1.3㎝, 밑지름 9.3㎝이다. 몸통의 한 면에는 물가의 갈대와 그 밑에서 노닐고 있는 기러기 한 쌍을 새겼고, 다른 한 면에는 수양버들 아래서 쉬고 있는 원앙 한 쌍을 새겼다. 병 목의 중간에 있는 넓은 삿갓모양 마디의 윗면은 안쪽과 바깥쪽으로 나누어 안쪽에는 구름무늬를, 바깥쪽에는 덩굴무늬를 둘렀다. 병 목 중간 마디에 수직으로 물을 따르는 주구가 세워져 있는데, 6각으로 모서리를 깎아냈다. 굽다리는 밖으로 약간 퍼져서 안정된 자세를 보인다. 유약의 색깔은 맑은 담청색 계통이며, 대체로 유약의 조화가 고르다. 이 정병은 고려시대에 들어서 그 조형과 기교가 매우 세련되었던, 청동은입사포류수금문정병(국보) 양식을 청자 양각으로 재료를 바꾸어 시도한 작품이다. 따라서 청동 정병과 형태와 곡선에서 흡사하며, 장식무늬도 비슷하다. 그릇의 형태와 무늬의 비례가 적당하고 짜임새가 있으며, 무늬 장식이 단정하고 정성스러워 흐트러짐이 없다. 유약은 전면에 발랐으나 고르지 않아 표면에 굴곡이 있다. (나만의 문화유산해설사)

 

나는 아직 시대적인 특징이나 문양 모양의 가치에 관해 지식과 견문이 적지만, 왜 이들이 보물로 지정 되었는지 그 모습과 생상 무늬에서 찾아보려 애쓰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감은 사지 동 삼층석탑 사리장엄구 보물] 통일 신라시대

경상북도 월성군 감은사 터에 있는 감은사지삼층석탑(국보) 의 동쪽에 있는 석탑을 1996년도에 해체·수리하면서 발견된 일괄유물 중 사리 일괄품이다. 1959년에 발견된 감은사지서삼층석탑내유물(보물)인 청동제사리기 (국립 경주박물관 소장)와 구조가 비슷하며, 외함과 안쪽의 사리기, 그리고 사리병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외함의 네 벽면에는 사리를 수호하는 사천왕상이 표현되어 있으며, 사천왕상의 주변에는 구름무늬를 새겼고 좌우에는 귀신의 얼굴 모양을 새긴 고리가 배치되어 있다. 사리를 모셔 둔 내함은 기단부, 몸체, 천개의 3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몸체의 중앙에는 사리를 넣어둔 복발형 용기를 중심으로 사천왕과 승상을 각 네구씩 따로 만들어 배치하였으며, 외곽으로는 난간을 돌리고 네 모서리에 대나무 마디 모양의 기둥을 세워 화려한 장식의 천개를 받치고 있다.
수정으로 만든 사리병은 높이가 3.65cm이며, 정교하게 금알갱이 장식된 뚜껑과 받침, 그리고 원판 수정제받침, 금동제 투조받침 등과 세트를 이루고 있다.

 

[석조 지장 보살의 뒷편과 문자해설]

보물에 가치는 그 제작연도나 제작 동기등 그 제작 시기가 존재할 시 빛을 발한다. 이 관음 지장 보살은 뒷면에  위와 같은 내용이 적혀 있어 더욱 빛을 발한다.

 

[석조지장보살]                                                                                               [금동연가7년명 여래입상 : 국보]

 석조지장 보살은 머리에 두건을 쓴 지장보살상으로 바위형태의 대좌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전체 높이가 33.4㎝ 정도의 작은 불상으로 몸체는 두껍게 도금이 되어 있고 대좌는 붉은 빛이 도는 칠을 하였다. 

조선시대 불교조각품으로는 드문 소형 석조상이다. 특이한 바위형태의 대좌 뒷면에는 이 불상 조성 배경 및 시주자와 제작자, 제작연대를 밝혀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조선 중종 10년(1515)에 만들어진 이 석조지장보살좌상은 각 부분의 표현이 간략하나 시대적인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으며, 그 형태가 잘 보존되어 있고 조성 배경이나 연대가 확실하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가치가 있다.

 

금동 연가7년명 여래입상 국보

고구려와 관련된 글이 새겨져 있는 불상으로, 옛 신라 지역인 경상남도 의령지방에서 발견되었다. 광배(光背) 뒷면의 글에 평양 동사(東寺)의 승려들이 천불(千佛)을 만들어 세상에 널리 퍼뜨리고자 만든 불상 가운데 29번째 것으로, 전체 높이는 16.2㎝이다. 광배의 일부분이 손상되었으나 도금까지도 완전히 남아 있는 희귀한 불상으로, 광배 뒷면에 남아있는 글과 강렬한 느낌을 주는 표현 방법 등으로 볼 때 6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고구려 불상으로 보인다.

 

[부여 군수리 석조여래좌상: 보물]                             [서울 삼양동 금동관음 보살입상: 국보]                             [금동 보살입상 (1963-2) 보물]

 

 

부여 군수리 석조여래좌상(扶餘 軍守里 石造如來坐像)은 1936년에  부여 군수리의 백제 절터를 조사시 발견된 곱돌로 만들어진 불상이다. 대좌가 있는 백제 특유의 불상으로 미소가 온화하게 느껴진다. 상투 모양의 작은 머리(육계)가 있으며, U자형의 옷주름을 표현하였고, 묵직해 보인다. 이 불상은 형식과 자세로 보아 4, 5세기 중국 불상의 영향을받은 6세기 중엽 백제불상의 특징을 갖고 있다.

 

서울 삼양동 금동관음 보살입상은 국보로 1967년 서울시 도봉구 삼양동에서 발견된 높이 20.7㎝의 보살상이다. 발목 윗부분에 금이 가고 왼쪽 옷자락이 약간 떨어져 나간 상태이다.  옆에서 보면 활처럼 휘어진 모습이다.  오른손은 허리 근처에서 정병(淨甁)을 들고 있으며, 왼손은 위로 올려 엄지와 검지를 V자형으로 곧게 펴고 있는 특이한 모습이다. 보살이 서 있는 대좌(臺座)에는 연꽃무늬를 새기고, 시기는 7세기 전반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삼국시대 후기에 크게 유행했던 관음신앙의 단면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금동 보살입상 (1963-2)] 삼국시대 높이 15.1cm 두 발 아래 역삼각형 모양의 둥근 대좌(臺座)가 있는데, 여기에 긴 촉이 붙어 있어 아래 대좌에 꽂을 수 있도록 되어있지만 아래 대좌는 없어졌다. 

대좌와 광배가 없어졌지만 거의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불상으로, 손모양, X자로 교차된 옷자락 등이 삼국시대 보살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양평 신하리 금동여래 입상  국보][금동 비륵보살반가사유상 (1963)보물 [금동약사여래 입상: 보물]

양평 신하리 금동여래 입상은 국보로 1976년  양평군 신화리에서 발견된 높이 30㎝의 불상,  기와조각 등 유물이 많이 주변에서 나온 것으로 발견된 곳이 절터인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불상은 대좌(臺座)와 광배(光背)를 잃었으나, 보존 상태가 매우 좋고 도금이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다.

 

금동 비륵보살반가사유상은 4각형의 대좌에는 마름모꼴 문양이 1면에 2개씩 뚫려 있어 보기 드문 것이다.  출토지가 분명하지 않지만 2중의 구슬장식과 가운데가 솟아오른 연꽃의 형식 등으로 보아서 삼국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추정된다. 

 

금동약사여래입상은  (金銅藥師如來立像)은 보물이다. 높이 29㎝의 자그마한 금동불로, 광배(光背)와 대좌(臺座)는 없어졌지만,  오른손은 허리 아래로 내려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를 맞대고 있고, 왼손에는 약항아리를 들고 있다. 대좌는 없지만 불상을 대좌에 꽂았던 뾰족한 촉이 두 발 밑에 하나씩 남아 있으며, 불상 뒷면에는 주조할 때 뚫은 구멍 자국이 남아 있다. 높다란 머리묶음과 얼굴 표정 등이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국보)과 비슷하여 8세기 전후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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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입상 : 국보][경주 구황동 금제 여래좌상]

경주 구황동 금제 여래좌상은 1942년 착수된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국보) 해체수리 공사시 나온 사리함에서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입상(국보)과 함께 발견되었다. 사리함에 새겨진 글에 의하면 통일신라 성덕왕 5년(706)에 사리함 속에 순금으로 된 아미타상을 넣었다고 하는데 이 불상이 아닌가 추측된다. 그러나 크기가 6치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불상은 12.2㎝로 4치도 되지 않아 의문이 간다. 

8세기 초 불상의 양식으로 머리광배에는 연꽃무늬를 중심으로 인동초·당초무늬·덩쿨무늬와 그 가장자리에 불꽃 무늬가 뚫을새김되어 있고, 몸광배에는 인동초·당초무늬와 덩쿨무늬를 이중으로 뚫을새김하였다. 대좌는 원형이며 엎어 놓은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경주구황리금제여래입상은 좌상(국보)과 함께 사리함 속에서 발견된 불상이다. 전체 높이 14㎝의 순금으로 만든 불상이며 대좌(臺座)와 광배(光背)를 모두 갖추고 있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는 머리 뒤에 원형으로 표현하였는데, 불꽃무늬에 둘러싸여 전체적으로 보주형(寶珠形)을 띤다.  대좌는 따로 만들어 끼운 것으로 12각의 받침 위에 엎어 놓은 연꽃무늬를 큼직하게 새겼다.  삼국시대 후기의 불상에서 좀 더 발전한 통일신라 초기 새로운 양식의 불상으로 보인다. 사리함에 새겨진 글을 통해 692년에 탑을 건립할 때 넣은 것으로 추정되는 이 불상은 만든 연대가 거의 확실하여 통일신라시대 불상 연구에 있어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다.

 

반가사유상을 보며 생각한 점은 문화재를 찾아 다니는 우리 같은 중생도 잘 구별 할 수 있게 국보, 보물에 번호가 다시 주어지면 안돼는지 생각해 본다. 나름 지명과 재질 형태로 이름을 지어 구별이 가는 듯은 한데, 그래도 학교 가면 몇 학년 몇 반 뿐아니라 몇 번 의 이름 누구라 한 적이 생각난다.  번호 만으로도 1번은 작았던 학생등, 보물도 나름 지명 된 순서를 알 수 있어 지정이 오래 전인지 아닌지 알 수도 있었는데, 문화재에 대해 아는 것도 아무 보탬도 된 일도 없지만, 그래도 관심을 갖고 찾아보는 자로써 감히 이야기 하면, 다시 번호를 사용하였으면  한다.  

눈호강을 했다고 하나 피곤한 관람이다 . 이것 저것 보물이나 국보가 아닌 작품도 보려니 몸도 피곤하고 발도 아프다. 하루 찾아서 익히기에는 힘이 벅차다 . 운동도 배움도 많이 하면 지치는 것인가 보다. 같이 즐기는 아내와 함께 하니 나름 즐겁기는 하지만, 많은 정보를 다 소화나 시킬 수 있을지 걱정이다. 관심이 많은 옥외 전시실은 다음으로 미루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아직 차가운 바깥 날씨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의 머리와 눈 모든 오감이 수용 능력을 넘어간다. 나머지는 집에서 좀 더 공부하여 보려 한다.  빨리 돌아가서 한번 복기해 보고저 하는 마음은 바둑 두는 사람의 복기와  같은 가 생각하며 집으로 향한다.

 

如一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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