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아흔 한번째 - 안동

세종해피뉴스 2023. 1. 29. 19:38

오늘의 여행지 안동 하회마을로 들어가 본다. 물도리동 이라 불리는 이곳은 물길이 마을을 감싸돌고 부용대를 통과하고는 다시 방향을 돌아  S자 모양으로 돌아 나가는 곳이다. 이곳이 내가 태어나서 자란 곳은 아니나, 선산이 있는 곳이라 어릴때 부터 집 안에 상이 있거나, 매년 묘사를 위해 찾던곳이다. 늘 고향이라 여기며 지내온 이곳도 이제는 가까운 친척분들이 모두 서울 살이들을 하고 계시어 반기는 사람도 없으나, 혼자 굳이 고향이라 마음 앓이 하는 곳이다. 마을 안의 여행은 몇몇 곳 단편 적으로 보고 지나치다 오늘은 마을 을 둘러 보아야 겠다는 생각으로 마을 안으로 들어선다. 

강을 바라보며 왼쪽으로 길을 들어 주변을 살펴본다. 소개글이 적혀 있는 지산고택을 마주한다. 

 

[지산 고택]

지산 고택은1841년 류지영 이 종가인 염행당에서 분가하여 살던 곳이다. 안내판에 안채는 북쪽을 향하고 사랑채는 화산이 보이는 동쪽으로 자리하여 하회의 가옥들이 마을 중심부에서 밖으로 향하는 집 구조를 보인다고 잘 설명 되어 있다. 사랑마루위에 종양당과 지산서루의 현판이 걸려있다. 존엄당은 맹자의 가르침에 자기의 본심을 간직하고 자기의 본성을 기르는 것이 바로 하늘을 섬기는 것이라 뜻이 존심 양성에서 온것이며, 지산 서류는 류지영의 호에서 따온 사랑채의 이름이다.

 

[마을길]

마을 안길로 접어드니 초가집에 새짚을 엮어 올려 지붕이  깔금한 풍경을 만들어 낸다. 아직 어느곳은 지붕을 잇는 작업은 계속되고 있다. 동네분들의 품앗이 공사인듯 보인다.  어린 시절에 바라보고 욕심냈던 까치밥으로 남겨진 감이 이즈음 사물을 보는 여유로움 때문일까 주변과 잘어울린다는 생각을 갖는다. 이전의 내 기억속의 잿빛의 초가집과 어둑한 담장의 이미지와는 너무도 다름을 보며 잘 정비된 벽과 지붕속에서  정갈함과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하회마을 교회]

놀라운 발견이다. 이전에 이곳에 교회가 있었는지는 모르고 지냈다. 잘 자듬어진  마을 길에서 벌판을 바라보면 교회의 모습을 한 한옥이 보인다. 장로교인 개신교가 유교의 마을로 대표되는 하회마을에 자리하려면 사연도 있으리라 생각해본다. 마을 안쪽에 자리하던 이 교회는 종소리로 인하여 이곳 으로 옯겨졌다는 이야기를 전해듣는다. 

교회에 대한 이야기는 목화 밭 뒤로 보이는 교회를 멀찍이서 바라보며, 마을 분위기와  맞추어 한옥으로 지어진 교회와 종탑의 외관만 보는 것으로 대신한다.

 

[회재고택]

길 곳곳에 고택을 알리는 표지판이 보인다. 고택에서는 민박을 겸하며  고택의 활용과 보전에 힘쓰고 있다. 나의 외가는 이곳서 멀지 않은 예안 이라는 곳이다. 지금은 안동댐으로 수몰된 곳이지만  어린시절 이곳 외갓집에서 잠자며 느꼈던 것, 풀벌레 울고, 멀리 개짓고 이따금 황소 울음 소리 들리는, 밤의  조용함과 차갑게 다가온 밤공기 가 기억난다. 그리고 아궁이 불에서 풍기는 연기 내음이 낯설던 기억나는데 이곳의 민박에서도 그러한 분위기를 맛볼 수 있을까? 

 

 

잎 떨어진 나무로 인하여 기와집의 기와와 짚으로 엮은 초가집의 지붕이 선명하게 보인다. 이들이 만들어 내는 풍경을 따라 길을 걸으며 보는 모습은 같은 것이 아니다. 걸음을 옭기면 다른 풍경이 나와 앞의 모습을 기대하며 가는 것이  산책의 묘미인 것 같다.

이곳 하회마을 들어서며 첫 보물을 대한다. 이곳에는 양진당과 충효당이 보물로 지정된 건물이다.  류성룡 선생과 그의 형님 류운룡 선생의 생가이다.

먼저 양진당을 소개하려 한다.  충효당은 서애 선생의 발자취의 많은 유품이 보물로 지정되어 따로이 소개 하여야 할 듯 하다.

 

[양진당]

보물 제 306호인 양진당의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규모이나 오른쪽면의 1칸이 안채의 대청과 연결되어 있어 마당에서 보면 정면이 4칸으로 보이고 안채보다 뒤로 물러나 있어서 별도로 독립된 건물처럼 보인다.

사랑채의 평면은 모두 10칸이다. 동편의 6칸은 우물마루로 된 대청마루이고, 서편의 4칸은 2칸 통칸의 사랑방과 각각 1칸의 방이 두 개가 있고 이곳에서 안채로 출입할 수가 있다. 

1963년 보물로 지정된 양진당은 서애 류성룡의 형인 겸암 류운룡(1539∼1601)의 집으로 매우 오래된 풍산 류씨 대종가이다. 류운룡의 부친인  입암 류중영(1515∼1573)의 호를 빌어 ‘입암고택(立巖古宅)’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양진당은 류운룡의 6대손 류영(1687∼1761)의 어릴 때 이름 (아호)에서 따 온 것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오른쪽 3칸은 대청, 왼쪽 1칸은 온돌방으로 바깥 주위에 툇마루와 난간을 둘러 마치 누(樓)집과 같은 인상을 주며 대청에는 문을 달아 3칸 모두 열 수 있게 하였다. 건물 안쪽 천장은 지붕 재료가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으로 꾸몄고 ‘양진당(養眞堂)’이란 당호와 함께 여러 현판들이 걸려 있다.

건물 안쪽 일부 재료를 만든 수법이 뛰어나고, 일반 주택으로는 제법 규모가 큰 조선시대 별당건축물 중 하나이다. (나만의 문화유산 해설사)

 

[사랑채에서 보는 안채와 연결되는 문된곳]

이곳 사랑채는 풍산 유씨의 대소가가 모여 종친의 모임을 갖는 대종가 이다. 

 

[사랑채에 바라본 솟을 대문]

사랑채에서 바라보는 문간방은 누군가 기거하고 소먹이통이 있는 것을 보니 소도 길렀으리라. 외양간 위에는 다락방인지 아님 건초 쌓아 주던 곳인지 지금 글을 쓰다보니 갑자기 궁금 해진다. 이곳을 다시한번 찾아야할 명분이 생긴것 같다. 그리고 다음은 사랑채 마루도 올라보고 안채도 한번 방문해 보려한다. 

 

[담너머로 보이는 사랑채와 안채]

유운룡 에 관하여 좀 더 알아본다. 자는 응현(應見)이고 초자는 이득(而得)이며, 호는 겸암으로 하회에서 출생하여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한다. 29세 때 강건너 겸암정사를 지었는데, 그 편액은 퇴계 이황이 써 주었다. 현감 시절 어머니의 신병을 이유로 사퇴하였다가 다시 현감으로 나아가기도 하고 길재(吉再) 묘역의 정화와  오산서원(吳山書院)의 건립을 통해, 유학의 진흥을 도모한 공으로 송덕비가 세워진다. 1592년 임진왜란에 동생인 영의정 유성룡이 선조에 해직시켜 어머니를 구출할 것을 읍소하여, 어머니 및 온 가족을 무사하게 구출하여 효심으로 칭송받았다. 그 뒤 원주목사로 승진되었으나 어버이의 노쇠함을 이유로 사퇴하였다. 학문에서는 이기설이나 사칠논변(四七論辨)은 이황의 이기이원론에 근거를 두고 변증을 시도하려 하였다. 저서로는 『겸암집』이 있고. 풍기의 우곡서원(愚谷書院)과 안동의 화천서원(花川書院)에 배향되었다.  이분의 삶에 장남으로서의 역활인 부모공경의 짐이 컷으리라 생각해본다.

 

 

마을 안길의 중앙 지점으로 향하면 좁은 골목길을 미로 처럼 가다 꺽기는 길을 조금 더 들어서면, 범상하지 않은 나무를 만나게 된다. 

큰 덩치의  나무 밑둥에서 갈라 나온 곁가지들이 낮게 자리한 것이 여느 고목에서 느끼는 웅장함 보다 나즈막히 앉은 자세처럼 보인다.

 

 

삼신당은 하히마을에서 가장 중앙에 위치한다. 류종혜가 입향할 때 심은 것으로 전해지며 수령이 600년이 넘는 나무로 마을 사람들이 성스럽게 여기고 있다.

이곳은 하당이라 불리며 화산 중턱의 상당(서낭당), 중당(국신당)과 함께 삼당을 이룬다. 정월 대보름 밤에 마을의 안녕을 비는 동제를 상당과 중당에서 지내고, 그 다음 아침에 이곳서 제를 올린다고 한다.

제를 올리고 이곳에서 하회별신굿 탈놀이가 시작되는 것인데, 지금은 상설 공연장에서 정기공연을 갖고 있다. 

 

 

많은 방문객들이 저마다의 안녕과 소원을 비는 글을 걸어놓을 모습이 이곳의 전경을 예사롭지 않게 만들고 있다. 소원을 빌지는 못하엿으나 나무의 기운을 받고 길을 재촉한다.

이번에는 명품 소나무를 찾아 길을 옯긴다. 화경당 고택을 찾아 나서는 길이다. 

 

[화경당 고택]

한적한 분위기의  하경당고택은 내부의 출입이 자유롭지 못하였다.

 

[화경당 고택]

조선 정조 21 1797년 류사춘이 사랑채, 날개채, 대문채를 짓고 철종13 1862년에 증손자 석호 류조성 (1823-1906이 안채 , 큰사랑채, 사당을 지었다. 집의 규모가 웅장하고 대가집의 격식을 완벽하게 갖추어 전형적이 사대부 가옥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큰 사랑채의 누마루에 앉으면 아름다운 풍광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300년의 세월을 품고 서잇는 큰사랑채 뒤편의 소나무는 하회마을을 굽어 돌고 잇는 강물의 형상을 하고 있어 또 다른 볼거리 이다. 화경당은 화()로 어버이를 섬기고 경()으로 임금을 섬긴다는 뜻이다.

 

[건물 외벽에서 본 소나무]

굽이 도는 나무 수형이 이곳 하회마을을 돌아나가는 물 길의 형태를 가진 휘어짐이 멋진 모습이다. 먼발치서 담넘어 보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많은 보물을 접할 수 있는 충효당으로 향한다.

명재상이신 류성룡 선생의 발자취를 돌아보기 위함이다. 몇번의 방문으로 눈에 익으나  기억을 잘 하지 못하는 많은 문화재를  이번 방문을 통하여 정리하여 보고저 한다.  

 

如一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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