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아흔번째 - 청송(2)

세종해피뉴스 2023. 1. 18. 21:55

- 대전사

대전사로 향하는 길에  향토문화 유산인  영이정을 지난다. 이 정자는 평해 황씨 청송 입양조인 영이공 황덕필 선생의 흔적을 기르기 위해 영조 15년에 동네 한가운데 처음 창건하였으며, 이후 세월이 흘러 붕괴되었다가 후손들이 1945년 다시 현재의 자리에 이건 한 정면 4칸 측면 1.5 칸의 팔각지붕의 누각이다. 오늘은 물길과 어우러져 눈내린 원경을 보는 것으로 만족한다. 

 

[영이정 모습]

차를 달려 공원 입구를 통과하여 내친 김에 길을 사찰앞까지 진입해 본다. 사찰 입구까지 여러 음식점이 길 옆을 자리하고 있다. 사실 이전에는 청송을 방문하여도 예전의 모습만 기억하고 들르지 않은 사찰이다. 내게는 나름 나만의 여행 룰이 있다. 문화제 관람료를 받는 사찰은 방문을 자제한다. 그냥 한번 본 것으로 만족한다. 이러한 사찰은 많은 사람의 발길이 닿아선지, 많은 사람들이 찾아 붐비고 잘 정비 되어, 나름의 문화재를 즐기기엔  차분한 분위기를 즐길 수 없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이러한 사찰일 수록 사진의 촬영도 제한되어있는 경우가 많다. 유 홍준 전 문화재청장의 말씀 중 문화제관람엔 세스타일이 있다고 한다. 그 하나는 문화재 관람료를 받는 일부 관광지화 된 문화재 의 사찰을  찾는 분 들이고, 그 다음이 관람료 없는 보물이 있는 조용한 산사의 문화재를 찾는  것, 마지막으로 고수는 오래전 부흥하던 절터가 있는 사지를 찾아 보는 것이라고 하는 말씀에 공감하는 바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오늘 찾은 대전사는 경상북도 청송군 부동면 주왕산(周王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 관련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은해사(銀海寺)의 말사이다. 

672년(문무왕 12) 의상(義湘)이 창건하였다는 설과 919년(태조 2)에 주왕(周王)의 아들이 창건하였다는 설이 있다. 조선 중기 실화(失火)로 전소된 뒤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전사 전경]

오늘 이곳에 사찰앞에는 주차장 시설은 없다. 인근의 식당가에 차를 세운다. 이곳에서 문화재 관람료를 지불한다. 돌아온 것은 표 한장이다. 눈앞에 보이는 사찰의 경관을 보며 위로를 삼는다.

바위산을 배경으로 이곳에 현존하는 당우는 보광전, 명부전(冥府殿)·산령각(山靈閣)·요사채 등이 있다. 부속암자로는 백련암(白蓮庵)·주왕암(周王庵) 등이 있다. 유물로는 보광전 앞의 삼층석탑 2기와 사적비·부도(浮屠) 등이 있다. 
 
[보광전]

[보광전 정면]

대전사는 신라 문무왕(文武王) 12년(672)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며, 보광전은 1976년 중수 시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여 그 건축년대(1672년, 강희 11년 임자 5월초 119일, 현종 13년)가 밝혀져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조선 현종 13년(1672)에 중창하였음을 알 수 있다. 청송 대전사 보광전의 건물 구조는 화강석 기단위에 화강석 초석을 놓고 약간 흘림이 있는 원주를 세워 구성된 정면3칸, 측면3칸의 건물이다. 지붕은 전면에만 부연을 단 겹처마의 맞배지붕이고, 구조는 2고주 5량가구이며, 다포계 양식으로 외 2출목 3제공, 내 2출목 3제공을 이루는데 전면은 앙설형이고 배면은 교두형으로 되어 있어 조선 중기 이후 목조건축양식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나만의 문화유산 해설사]
특히 내부단청과 벽화는 회화성이 돋보이는 빼어난 작품으로 건축당시의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조선중기 불교미술의 중요한 자료로서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서 역사적, 예술적, 학술적 가치가 충분하다. 내부의  단청과 벽화는 독특하여 촬영 하여 두고 보고 싶었으나, 촬영 금지를 알리는 보살님으로 인하여 무산되고 만다. 은근 고가의 문화재 관람료를 지불하고 방문한 곳인데 그나마 보물인 보광전의 구석 구석을 알고 싶어하는 중생에게 조금은 실망을 안겨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역시 관람료 내는 사찰에 대한 나의 선입견이 꼭 문제 되는 것은 아닐 것이란 생각을 해본다. 

 

[보광전 뒷면]
[보광전 옆면 ]
[보광전]
[보광전 석조여래 삼존상] 문화재청 자료

이 불상의 복장조상기문(康熙 24년, 1685년)과 양식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보여 제작연대가 확실한 조선후기 불상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다. 다만 개금이 두텁게 되어 있어 원래의 재질이 석조인지 여부를 확실하게 알 수 없으나 제작연대가 어느 정도 밝혀졌고 보존상태가 양호한 완형이다.

내부의 벽화는 그자체 만으로도 볼거리와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높은 것이다. 다만 촬영의 자제로 나만의 눈에 담으며, 이전에 방문시 촬영한 것을 찾아보려 한다.

 

[대전사 주변 경관]
[사리탑]
[명부전]

이곳에 있는 문화재를 찾아본다. 경북 무형 문화제인 이 불상은 대전사 명부전에 봉안되어 있는 불석(佛石)제의 지장삼존상과 시왕상 일괄로, 지장삼존상(3軀), 시왕상(10軀), 판관(2軀), 사자(1軀), 금강역사상(2軀) 등 모두 18구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지장삼존상과 시왕상은 이미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있으며 나머지 5구는 미지정 상태이다.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에서 발견된 조성발원문에 의하면, 1703년에 수연(守衍)이 수화승으로 조성하여 대전사 명부전에 봉안하였음을 알 수 있다. 수연은 17세기 대표적 조각승인 승호(勝湖)의 제자인데, 이 불상들은 수연이 제작한 작품 가운데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예로서 조선시대 불교조각사 연구에 중요한 학술적 의미를 지닌다. 조성발원문을 통해 조각가, 제작연대, 원 봉안처를 분명히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작품 상태 또한 양호하므로 불상(18구)과 조성발원문(2매)을 일괄하여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명부전 지장 탱화 이 불화는 19세기로 넘어가는 새로운 특징이 잘 나타나 있는 작품이다. 특히 지장보살의 머리에 원형의 두광, 신체에 키모양에 가까운 신광이 둘러져 있고, 채색이 짙어지고 물감이 두껍게 칠해지는 경향이 현저하다. 따라서 조선시대 후기의 불화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나만의 문화유산 해설사]

 

[관음전]

 

흰 눈 속에 대전사 뒤편에 자리한 바위 들과 만들어 내는 독특한 풍경을 이곳 저곳 걸으며 본다. 오늘의 대전사 방문은 그리 만족한 것은 느낌이 아니다. 문화재관람료를 내고 관람하기엔 여느 사찰보다 그리 다양하고 많은 문화재를 보유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문화재를 알리려는 큰 노력도 없어 보인다. 관람료를 징수 하고도 법당내부에 자리한 보살님이 촬영을 못하게 하는 것이나,  촬영을 뭇하게 한 문화재를 알려주는 안내 책자 하나 준비하여 배포하지 않는 사찰의 모습에서, 이번 방문을 통해 받은 느낌은 왠지 자유로움 보다 어딘가 나의 권리가 침해 받은 느낌이다. 적어도 사진 촬영이 금지된 문화제를  사진에 담고, 사찰의 역사적인 내용이나, 문화재의 설명이 담겨, 문화재를  알리는 역활을 하는 팜프렛이라도 근사하게 만들어 배포 하였으면 좋았을텐데라고 생각해 본다. 이 글이 전해져 대전사 사찰에서  보물인 보광전의 내 외부 자랑 거리를 멋지게 팜프렛에 담기를 바라고, 많은 관람객이 보고 돌아가는 길에 팜프렛을 보며 보광전의 모습이나 뜻을 되새길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사찰을 나선다. 유홍준교수님도 국립박물관의 입장시 입장료를 받자는 주장을 펼친다. 단순히 문화재 관련 예산확보 차원이 아닌 문화재 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심을 갖자는 의도라는 큰 듯이라고도 한다. 문화재로 등재 된다는 것은  나의 생각으로는 국가적인 세금으로 관리되는 우리 모두의 소유물이 되는 것이라 생각해 본다. 그리고 문화재관람료를 받으면 좀 더 잘 문화재를 소개 하였으면 한다. 이런 저런 생각 끝에 나는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의, 잘 알려지지 않은  보물을 찾아보는게 나름의 취미인데, 눈에 담은 것이 추후 생각 날 때 다시 볼 수 있는 사진은 예전에 소풍에서 보는 엽서 같은 사진으로라도 배포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귀가한다.

 

如一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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