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아흔 두번째 - 안동(2)

세종해피뉴스 2023. 2. 19. 20:36

- 하회마을

하회마을을 방문하는 모든 이가 기억하는 서애 류성룡 선생이 거처 하신던 곳이 충효당이다.  양진당 맞은 편에 자리하지만 문의 방향이 옆으로 비켜서 서쪽을 향한다. 이곳의 하회마을의 가옥은  집의 방향을 정함에 있어 일반적으로 취하는 남향이 아닌 마을 중심에서 강을 바라보는 방향을 택하고 있다고 한다. 양진당은 남쪽을 향하나 이곳은 서쪽을 향한다. 형님댁을 등지지 않고 옆으로라도 바라보려는 듯 보인다. 

 

[충효당]

보물로 지정된 이 충효당은 행랑채, 사랑채, 안채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와 안채는 손자인 졸재 류원지(1598∼1674)가 짓고, 증손자인 눌재 류의하(1616∼1698)가 확장 수리한 것이다. 행랑채는 8대손 일우 류상조(1763∼1838)가 지은 건물로 대문과 방, 광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쪽을 앞면으로 긴 행랑채를 두고 안쪽으로 ㅁ자 모양의 안채와 一자형의 사랑채가 연이어 있다.  

 

[사랑채]

사랑채는 남자주인이 생활하면서 손님들을 접대하는 공간으로 왼쪽에서부터 사랑방, 대청마루, 방, 마루로 이루어져 있다. 사랑채 대청에 걸려 있는 ‘충효당(忠孝堂)’이라고 쓴 현판은 명필가였던 허목(1595∼1682)이 쓴 것이라고 한다. 비교적 지을 당시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어 조선시대 민가 건축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사랑채 옆면과 안채]

안채는 안주인이 생활하면서 집안 살림을 돌보던 공간으로 동북쪽에 부엌을 두고 ㄱ자로 꺾여서 안방, 대청, 건넌방이 있다. 또한 건넌방 앞에는 마루와 2칸의 온돌방, 부엌이 있으며 사랑채와 연결되어 있다. 

 

[영모각과 고목]

조선 중기 이름난 문신이었던 서애 류성룡(1542∼1607) 선생은 여러 벼슬을 두루 거치고 임진왜란 때에는 영의정으로 전쟁의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는데 많은 공헌을 한 분이다. 충효당에는 이때의 많은 유품을 보관 관리하는 집인 영모각을  따로 지어 선생이 쓴『징비록』과『서애집』등을 포함 많은 보물을 소장하고 있다.  이들은  임진왜란사 연구에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자료로도 평가 받고 있다.

 

[영모각 입구]

유성룡은 퇴계 이황의 문인이며, 김성일과 동문수학하였다. 명종 21년(1566)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예문관검열, 공조좌랑, 이조좌랑 등의 벼슬을 거쳐 삼정승을 모두 지냈다. 왜적이 쳐들어올 것을 알고 장군인 권율과 이순신을 중용하도록 추천하였고, 화포 등 각종 무기의 제조, 성곽을 세울 것을 건의하고 군비확충에 노력하였다. 또한 도학·문장·글씨 등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그가 죽은 후 문충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안동의 병산서원 등에 모셔졌다.

 

서애 류성룡 선생님의 많은 유물을 보관 하고 있는 이곳은 1966년 6월에 개관하였으며 1977년 6월에 한옥으로 신축하였다. 내부에 있는 유물은  국보132호-징비록(懲毖錄)을 비롯하여, 보물160호-류성룡종손가문적(柳成龍宗孫家文籍) 11종 22점과 보물160호로 임진왜란 당시 도체찰사로 임금을 호종하면서 군무를 총괄하던 서애 선생이 직접 손으로 쓴 기록과 임진왜란과 관련되는 문건과 자료들이 일괄 지정되어 있고, 보물460호로 류성룡 선생이 직접 쓴 것과 선생의 어머니에 관한 곤문기, 그리고 조정에서 선생에게 내린 여러 문서들 등 세 가지로 구분되어 보관되고 있다. 선생의 일대기에 기록과 쓰시던 많은 유품이 일괄 보물로 지정되었으니 역사적으로도 큰 업적을 남기심을 알 수 있다.

 

국보 제 132호 징비록 

이 책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서애 류성룡(1542∼1607)이 임진왜란 때의 상황을 기록한 것이다. 징비란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뜻이다. 이것을 저술한 시기는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유성룡이 조정에서 물러나 향리에서 지낼 때 전란 중의 득실을 기록한 것이다. 내용을 보면 임진왜란 이전에 일본과의 관계, 명나라의 구원병 파견 및 제해권의 장악에 대한 전황 등  임진왜란의 원인과 전쟁의 상황등을 기록한 친필 회고록이다.  필사본『징비록』은 조수익이 경상도 관찰사로 재임하고 있을 때 필자 손자의 요청으로 인조 25년(1647)에 16권 7책으로 간행하였다. 또한 이것은 숙종 21년(1695) 일본 경도 야마토야에서도 간행되었으며, 1712년에는 조정에서『징비록』의 일본유출을 금할 정도로 귀중한 사료로 평가 받았다. 이 책은 임진왜란 전후의 상황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난중일기』와 함께 높이 평가되고 있다.

징비의 뜻은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뜻으로  『<시경>의 ‘주송(周頌)’편에 실려 있는 <소비(小毖)>라는 시에서 첫구절 "내 지난 일을 징계하여 후환을 삼가리라(予其懲而毖後患)" 라는 뜻의  징전비후(懲前毖後)  '지난날을 징계하여 뒷날을 삼간다.' 로 이전의 잘못을 교훈으로 삼아 앞으로 되풀이하지 않도록 조심하다.라는 글에서 따온 것이다.

 

[징비록]

보물 제 160호 류성룡룔 종가 문적 

[보물 제 160호  근폭집]

 조선 중기의 문신인 서애 유성룡(1542∼1607)의 종손가에 소장되어온 문헌과 각종 자료들이다.

임진왜란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역사적 자료들로, 당초 ‘안동류씨문서’로 지정되었다가 1991년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또한 『징비록』초본이 포함되었으나, 국보로 승급되어 16종 19권이 지정되었다.

柳成龍宗孫家文籍 (보물 160호)은 여러 종손가문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목록은 아래와 같다.

1진사록(辰巳錄) 3책         보물 160-1호

2난후잡록(亂後雜錄) 2책   보물 160-2호

3근폭집(芹曝集) 2책         보물 160-3호

4중흥헌근(中興獻芹) 1책   보물 160-4호

5군문등록(軍門謄錄) 1책   보물 160-5호

6정원전교(政院傳敎) 2책   보물 160-6호

7조어제당장서화첩제문(正祖御製唐將書畵帖題文)부채제공발 (附蔡濟恭跋) 2책  보물 160-7호

8당장시화첩(唐將詩畵帖) 1책  보물 160-8호

9당장서첩 (唐將書帖) 2책      보물 160-9호

10서애구주대통력(西厓具注大統曆) 갑진년 1책  보물 160-10호

11서애구주대통력(西厓具注大統曆) 병오년 1책  보물 160-10호

12서애구주대통력(西厓具注大統曆) 갑자년 1책  보물 160-10호

13서애구주대통력(西厓具注大統曆) 병신년 1책  보물 160-10호

14서애구주대통력(西厓具注大統曆) 정유년 1책  보물 160-10호

15호성공신교서(扈聖功臣敎書) 두루마리          보물 160-11호

이중 대표적으로 근폭집이 전시되어 있다

 

[광국경신 교서, 보물 제160호]

1590년 (선조 23년0 종계변무의 공을 높이 치하하기 위하여 서애 선생에게 내린 광국공신 3등 풍원 부원군의 상훈교서 이다

명칠 한석봉의 글이다.

 

[당장제시선, 보물 제 160호 ]

 

임진년 12월명나라 제독 이여송이 안주에서 서애 선생과 평양 탈환을 협의 한후 그가 가졌던 부채에 시를 서서 서애선생에게 선물 한 것이라 설명되어 있다.

 

 [진영군 편성도] 보물 제 160호 서애선생은 군제를 개혁하고 각 영군을 재편성 하였는데 1 榮(영)은 5司 , 1사는 5硝, 1초는 3旗, 1기는 3隊, 1대는 火兵을 합하여 11명으로 하였다는 편성도 이다

 

보물 제 460호유성룡 종가 유물(柳成龍 宗家 遺物)

조선 중기의 문신인 서애 유성룡(1542∼1607) 선생의 종손가에 전해오는 유물들로 첫째, 유성룡 선생이 직접 쓰던 것, 둘째, 선생의 어머니에 관한 곤문기, 그리고 선생에게 조정에서 내린 여러 문서들 등 세 가지로 구분된다. 

유물 가운데 선생이 쓰던 것으로는 갑주와 가죽으로 만든 신발인 혁화, 상아로 만든 홀(笏:신하가 임금을 뵐 때나 종묘사직에 제사지낼 때 예를 갖추기 위해 두 손에 모아쥐던 패), 갓끈, 관자, 그가 늘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보던 「동국지도」 등 총 7종이며, 「서애선생모부인곤문기」는 자식들에게 재산과 노비를 분배한 기록인 분재기로 매우 희귀한 예이다. 조정에서 내린 고문서는 녹권과 교지 및 교서, 제문 등 총 14종이다. 이 유물들은 유성룡 선생의 개인사 연구 및 당시의 사회상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갑주, 혁화, 상아홀 갓끈, 관자 유서통갓, 고무신 가운데 일부가 전시되어 있다. 당시의 생활상을 알아볼 수 있는 유품들로 지금껏 잘 보전되어 온 것이 놀랍다 

 

[보물460호-류성룡종손가유물(柳成龍宗孫家遺物) ]
[서애선생모부인 곤문기와 어사화] (보물 제 460-2호)

 서애선생모부인곤문기(西厓先生母夫人昆文記) 1축(軸) (보물  제460-2호)서애 선생이 32세 때에 선친이 별세하여 유산이 선생의 모부인(母夫人) 정경부인 김씨에게 상속되었으나, 그로부터 20년 후에 정경부인 김씨는 시댁과 친정의 제위토(祭位土)와 접빈용토지(接賓用土地)를 우선 분재(分財)하고 나머지 유산을 자녀에게 공평하게 분재한다는 뜻을 밝힌 분재기(分財記:재산과 노비를 자식에게 나누어주면서 이를 기록한 문서)로서, 매우 희귀한 종류의 문서이며, 크기는 가로 362㎝, 세로 67.2㎝로 한지에 행서체로 쓰였으며, 여러 곳이 벌레로 인해 훼손되었다.

 

고문서 (보물 제460-3호)

광국 공신교서, 광국공신 과록패, 노비하사 교지, 도체찰사교서, 문충공 시호 교지, 판중추부사교지, 호성공신교지, 풍원부원군교지, 영의정 교지, 증정경부인 교지 , 불윤비답 선조제문, 왕세자 제문 , 정조제문등의 고문서중 , 전시장 내에는 이중 몇몇 교지를 올려 본다. 중정경부인 교지는  선생의 부인 이씨는 1589년(선조 22년) 선생이 예조판서로 계실 때 별세하였는데 그 후 선생이 영의정이 되자 1596년(선조 29년)에 정경부인 교지가 내려진 것이고, 광국 공신 교서 는  광국공삼등(光國功三等) 풍원부원군(?原府院君)으로 서훈될 때의 교지이다.

 

[광군 원종공신녹원 보물 제 460호]

서애선생이 풍원 부원군에 서훈 된 이 후  그의 장자 또한 광국원종 공신에 서훈 될때 하사받은 녹권 이다.

 

[ 운암 잡록,  선조재문, 고종 제문]

서애 선생은 서애라는 호 이외에 운암이라는 호를 쓰기고 하였다. 1598년  영의정에서 물러난뒤 다사 다난 했던 생애를 돌아보면서 수필형식으로 기록하였는데 이것이 운암잡록이다.

주로 동서로 나뉜 붕당에 대한 내용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붕당간의 갈등이 커지는 것은 말세에 일어나는 일이라 하며, 나라가 위태로워지는 것을 걱정한 그의 우국충정이 엿보인다고 소개한다.

영모각을 통하여 임진왜란 당시의 벼슬 살이의 험난함을 다 이해 하기는 어려웠다. 당시 시대별로 어떤 일이 벌어지고 그때의 류성룡선생의 활동 및 벼슬이후의 저서나 삶이 년도 별로 정리되고, 징비록이 국보로서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는 것은 무엇인지 알려주는 것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본다.

 

[부용대]

길위에서 바라본 부용대가 잔잔한 낙동강에 투영되는 것을 바라보며 적적함을 달래기 위해서는 책 읽는 물멍 하는 것 이외는 할 일이 없었을 곳이라 생각해 본다. 늘 머리속에 남아있는 고향이지만 뉘집 자식인지 알아보아 주시던 분들도 이제는 모두 다른 세상으로 가시고, 이제는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나면서 발길 들여야 하는 이곳 하회마을이다.  어릴적 멀어 보이던 강폭은 안동댐 이후는 좁아진 것이라 생각 할 수 있겠지만, 그 태산 같았던 부용대는 왜 점점 작아지는지 모르겠다. 

 

[만송정 과 둑방길 보수 전의 하회마을. 문화재청 자료]

만송정 숲의 오래전 사진을 찾다가 문화재청 자료를 건진다. 개발이 덜 된 사진을 통하여 왜 만송정정 필요한지 느껴본다. 만송정 숲은 낙동강이 하회마을을 휘돌아 흐르며 만들어진 넓은 모래 퇴적층에 위치하며, 조선 선조 때 문경공 류운용이 마을 맞은편 부용대의 기를 완화하기 위하여 1만그루의 소나무를 심어 조성한 숲이다.

[마을 외곽 진입로]

원래는 둑방이었던 강에 오면   예전 아드님을 데리고 강둑에 서서 직접 만드신 연을 날려 주시던 이곳의 터줏대감으로 지내시는 집안 형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지금은 연세가 많으시지만  내 기억속에는 예전의 그 정 많은 아버지 모습과 그때의 전경이 그대로 남아 있다.  가는 세월 속에 이곳도 많은 추억이 있는 곳이라 생각하고 지금은 마을 외곽 순환로가 된 길을 따라  잎 떨어진 수묵 사이로 난 길을 통하여 하회마을을 나선다. 다음엔 이곳에서 어떤 느낌을  받게 될지 궁금해 하며 집으로 향한다.

 

如一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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