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여든 아홉번째 - 청송

세종해피뉴스 2023. 1. 9. 17:52

오늘은 청송으로 길을 나서 본다. 눈구경 하며 국도로 갈 것인지 빠르게 목적지에 도착하여 청송을 살필건지 고민하며 길을 나선다. 잠시 눈 내린 풍경을 보며 서서이 가보려는 심산으로 국도로 길을 나서본다. 상주로 가는 길에 구병산을 곁에 두며 지난다. 멀리보이는  눈과 함게 한 구병산의 모습에 차를 멈추고, 차가운 공기를 느끼며 사진을 찍어본다. 검게 능선이 들어나 보여 산의 경사진 면이 잘 들어나 보이고 산비탈의 경사가 급하고 능선과 능선 사이가 깊어 보임을 알게된다.

 

[구병산의 설경]

파란 하늘과 맞닿은 바위산은  흰눈을 덮어 쓰고 있어, 그들의 색감에서 부터  써늘한 느김을 받는다. 구병산은 보은 에서 경북 상주로 가는 길 옆에 자리하고, 예로부터 이 곳에서는  속리산 천황봉은 지아비 산, 구병산은 지어미 산, 금적산은 아들 산이라 하여 이들을 `삼산(三山)'이라 일컬어 왔다고 한다.

 

 

 구병산을 보고는 상주에서 고속도로로 접어 들어 길을 재촉하여 청송의 보광사로 향한다. 이 곳의 극락전이 보물로 지정 되어 있으나 몇번의 방문에도 공사로 인하여 그 실체를 볼 수 없었는데 이번에 청송 여행을 통하여 볼 수 있지 않을 까 하는 기대로 찾아보게 된다.

보광사가 언제 처음 건립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신라 문무왕 연간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설도 있고 세종 때 왕비의 조상 묘를 수호하기 위해 건립했다는 설도 있다. 약간 다르게는 대대로 청송심씨 집안의 원찰이었던 보광사를 세종 10년인 1428년에 청송군수 하담(河澹)에게 명하여 중수하고 재실인 추모재(追慕齋)와 묘재각(墓齋閣)인 만세루(萬歲樓)를 건립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본전인 극락전(極樂殿)의 건립 연도다. 1980년경 보수공사 중 발견된 상량문에 따르면 극락전은 만력(萬曆) 43년, 즉 광해군 7년인 1615년에 건립되었다. 현재 보광사는 은해사(銀海寺)의 말사로 극락전과 만세루, 추모재 현판을 단 요사채, 그리고 근래에 지은 산신각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찰로 향하는 길을 접어 들어 보광사에 당도하니 공사로 가려놓은 가 건물이 보이지 않는다. 오늘에야 모습을 볼 수 있겠다고 반가운 마음으로 오르는데 기거하시는 보살님이 아직 내부 공사가 마무리 안돼어 법당 안은 출입이 안됀다고 한다. 

 

[이전의 보수 공사 당시의 보광사 모습]

 

 

사찰을 찾으면 극락전 앞에 자리한 만세루만 보았었는데, 이 만세루는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에 맞배지붕을 올린 누각이다. 자연석 기단 위에 가공하지 않은 자연석 주춧돌을 놓고 두리 기둥을 세웠으며 주심포계의 단청을 올렸다. 누마루에는 우물마루를 깔았고 4면에 난간을 설치하였으며, 

 

[극락전에서 본 만세루]

극락전 방향인 북쪽 오른쪽에 4단의 목조 계단을 놓았다. 만세루는 유형문화재 제509호이다. 청송심씨 시조 심홍부의 묘소가 청송읍 보광산의 정상부근에 자리하고 묘소를 바라보는 산자락 계곡 가에 보광사(普光寺)가 있다. 보광사는 18세기 중엽에 간행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처음 등장한다. 기록에 따르면 ‘보광사는 관아의 남쪽 5리에 있으며 심홍부의 무덤을 수호하는 사찰’이라 하여 청송심씨의 원찰임을 밝히고 있다. 보광사가 지금까지 보전된 것은 왕실과의 관계 때문이 아닐까 짐작된다. [문화제청 참조]

 

만세루를 지나 드디어 극락전을 보게 된다  아직은 완공이 되지 않은 모습이나 그나마 친견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며 둘러본다.

 

[오늘의 극락전]

광해군 7년인 1615년에 건립된 보광사 극락전은  조선 중기 건축양식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고, 17세기 불전 건축의 수법과 공통점이 많아 2014년 12월 보물 제1840호로 지정됐다.

극락전은 근래에 수리 공사에서 발견된 상량문에 따르면 만력(萬曆)43年(1615)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단청이 완전하지 않아도 그 외향만을 보게 된것을 행운이라 여기며 눈에 담는다. 보광사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식 맞배지붕 건물이다. 경사진 땅의 형세를 따라 전면이 높은 기단을 쌓고 둥근 화강석 주춧돌을 놓았다. 기둥은 배흘림이 있는 두리기둥이다. 공포는 건물의 규모에 비해 매우 화려하다. 지붕의 전면은 겹처마, 배면은 홑처마로 구성했고 맞배지붕의 측면에는 풍판(風板)을 내렸는데 약간 짧게 수평으로 끊어 가벼운 느낌을 준다. 특이한 것은 측면의 박공부에 설치된 현어(懸魚)다. 현어는 맞배지붕의 측면 박공판의 합각부분에 달아놓는 장식물을 말한다. 조선 중, 후기 앞뒤 박공이 만나는 부분은 지네철이나 꺽쇠로 연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보광사 극락전에는 나무로 만든 당초문양의 현어가 달려 있다. 이는 매우 보기 드문 예에 속한다. 법당이 갖추어지고 단청이 입혀진 모습을 상상하며 둘러본다.

 

[극락전 정면]

내부공사가 아직 끝나지 않아 후일을 기약한다. 내부는 후면에 고주(高柱)를 세우고 대들보를 올렸다한다. 바닥은 우물마루, 천장은 우물천장으로 꾸미고 고주에 기대어 불단을 설치했고. 전면의 좌우에는 띠살 무늬의 양여닫이문을 달았고 가운데에는 띠살무늬 가운데 팔각형의 교살창을 혼합한 사분합문(四分閤門)을 달아 주택의 창살을 연상케 한다. 전체적으로 볼 때 규모는 작으나 전형적인 조선 중기 건축 양식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기존에 보물로 지정·보존하고 있던 17세기 불전 건축의 수법과 공통점이 많아 보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았다고 한다.

 

[극락전의 측면]

지금은 따로 모셔져 있는 불상을 뵈러 따로 임시로 마련된 법당을 찾아본다.

 

[공사간 임시 불당(오른쪽)과 요사체]

임시로 마련된 불단인 법당은 오른쪽에 난 문을 통하여 들어간다. 법당에 자리한 부처님의 형상이 지그시 감은 눈부위가 도드러진 독특한 형상의 삼존불을 접한다. 

  

 

이 불상은 보광사 극락전에 봉안되어 있는 불석(佛石)제의 석조아미타삼존불상이다. 중앙의 아미타불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세음보살상과 대세지보살상이 자리하고 있다. 복장(腹藏)에서 발견된 조성발원문에 의하면, 1735년에 조각승 여철(吕哲)이 중심이 되어 법기(法機), 영초(穎草)와 함께 제작하여 보광사 법당의 주존으로 봉안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철은 17세기 대표적 조각승인 승호(勝湖)의 계보를 잇는 조각승으로, 그가 독립하여 만든 작품은 지금까지 알려진 것이 없었는데 이 불상을 통해 처음으로 알려진 예라는 점에서 조선시대 불교조각사 연구에 중요한 학술적 의미를 지닌다.
독특한 상호(相好)에서 여철만의 특징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조성발원문을 통해 조각가, 제작연대, 원 봉안처를 분명히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작품 상태 또한 양호하므로 복장유물(6매)과 함께 일괄하여 유형문화재로 지정 되었다.

 

 

요사체의 툇마루에는 극락전에 사용된 기와를 볼 수 있게 종류 별로 임시로 전시해 놓은 듯하다. 여러 모양의 기와에는 보광사라는 글귀에외  다양한  문구와 문양이 새겨져 있다. 기와 한장 한장에도 기록과 미를 추구한 모습을 보며 요즘의 기와봉양에 흰색 페인트로 소원의 글귀를 적는 것은 얼마나 오래 갈까 하는 허튼 생각을 해본다. 소원을 비는 문구를 기와에 적어 봉양하는 것은 오랜 전통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청송 보광사는 근래 유교와 불교의 상생공간이라 알려지고 있다. 조선 중기 이후 사림으로 정계 진출로  불교시설과 국가적 불교 행사까지 폐지되었지만, 그래도 왕실 원당만은 조선에 존속하였다. 원당은 유교의 "효"의 심성을 담은 공간이다. 보광사 극락전과 만세루는 모두 청송심씨 시조묘를 향해 서 있다고 한다. 

효를 위한 공간에 서있다 생각하니, 잠시 이 즘의 나의 처지와 삶을 되돌아 보게 된다.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이 곳의 공사가 완전히 마무리 되고 삼존불이 자리할 때 다시금 둘러보고, 발언 하여 보려 한다. 조용한 산사를 뒤로 하고 대전사로 향한다.

 

如一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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