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스물아홉번째 - 영천

세종해피뉴스 2021. 7. 21. 00:39

오늘은 누정 여행을 위해 길을 나선다. 누정은 루와 정을 일컫는 말이다. 쉽게 풀이하면 정자와 누각들을합쳐 부르는 용어이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누정들 중 보물로 지정된 것도 여럿 존재한다. 오늘은 이전에 가보지 못한 정자를 찾아 보려 영천으로 길을 나선다. 옛 선조들이 자연과 어울리는 건물을 짓고, 그곳에서 학문도 익히고, 선비로서 고향에 귀향하여 뜻을 펼치거나 후학을 가르치기도 하고, 또는 일신의 안위와 여흥을 위하기도 하며 지은 것이 정자이어서, 나름 철학과 미에 대한 높은 식견으로 지어진 것이라 저마다 특색과 우아함, 자연과의 조화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한광사
화남리 삼층석탑과 석조여래 좌상

영천의 정자인 귀애당을 가는 길목에서 한광사 사찰을 찾아 본다.이곳에는 명칭이 영천 화남리 삼층석탑이라는 보물제 675호 보물과  이석탑의 기단부에서 발견된 불상인 영천 화남리 석조 여래 좌상 보물 제 676호가 있다. 인근의 보불이라 지나칠수 없어 길을 벗어나 한광사에 이른다.

 

화남리 삼층석탑

 

불탑은 부처의 유골을 모신 조형물로 실제 유골이 없는 경우라 하더라도 상징적으로 부처를 모신 신성한 곳이다. 이 화남리 삼층석탑은 1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던 받침돌만 남아있다. 기단은 네 모서리와 가운데에, 탑신의 몸돌에는 네 모서리에 각각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겼다. 지붕돌은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으며, 낙수면은 약한 곡선을 그리며 경쾌하게 표현되었다.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각 층의 지붕돌과 몸돌은 하나의 돌로 조각한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다.

 

 

이 석탑이 세워질 당시에 사찰의 금당앞에 동탑과 서탑을 함께 배치하는 쌍탑식 가람배치가 유행했는데 앞의 것은 불전앞에 세워진 쌍탑중의 서탑에 해당한다 1980년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 탑의 기단석 한 면을 열자 그 안에서 석불좌상(보물 제676호)이 발견되었다. 사진 뒤쪽의 동탑은 12매의 부재만 남아있던 것을 2010년 이후에 다시 세워졌다.

 

화남리 석조여래좌상

 

불상의 오른손이 왼손 검지를 감싸 쥐고 있는  지권인(智拳印)으로 이(理)와 지(智), 중생과 부처, 미혹함과 깨달음이 원래는 하나라는 뜻의 수인이다. 보리인(菩提印), 각승인(覺勝印)이라고도 한다. 금강정경(金剛頂經)에 기초를 둔 것으로 양손을 가슴 앞에 올리고 집게손가락만 똑바로 세운 왼손을 오른손으로 감싸서 오른손 엄지가 왼손 집게손가락 끝에 서로 맞닿도록 한 모양이다. 이 수인은 주로 밀교계의 대일여래가 취하는 것이나 우리나라에서는 화엄종의 주존불인 비로자나불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불교의 진리 그 자체를 상징하는 부처인 비로자나불 불상이다. 

  

보물로 지정될 당시에 삼층석탑을 해체·복원하는 중 발견되었으며, 석탑의 기단석 한 면을 열자 그 안에 불상이 모셔져 있던 것을 원래 있던 대좌(臺座)에 모시고 있다.
작은 소라 모양의 촘촘한 머리칼, 작고 둥근 얼굴, 좁은 어깨, 빈약한 체구 등에서 단정하게 참선하고 있는 스님의 모습을 느낄 수 있다.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은 양 팔에 이르러 길게 늘어져 평행한 옷주름을 형성하고 있다. 배 부분에서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흘러내린 옷주름이 무릎과 다리까지 덮고 있는 모습이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臺座)는 8각의 중대와 연꽃이 새겨진 상대·하대로 이루어져 있다.이석조여래좌사의 낮고 넓은 육계, 작은 체구 , 둥근 얼굴, 균일한 옷 주름, 상중하대를 갖춘 삼단팔각 연화 대좌등은 9세게 후반 고려시대인 10세기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보인다.

탑안에서 작은 불상이 발견되는 사례는 있으나, 이처럼 등신대에 가까운 온전한 불상이 발견된 사례는 흔치 않다고 한다. 

 

사찰을 벗어나 오늘의 여행지로 향한다. 

 

귀애고택, 안채, 사랑채

 

귀애고택은 조 선생의 8대조인 묵헌공 조명직이 1767년 이곳으로 이주해 기반을 마련하고. 1988년 화재로 사랑채, 아랫사랑채 등 15칸이 소실됐다. 1991년 아랫사랑채 자리에 사랑채를 복원했으며 안채도 대규모 보수 과정을 거쳤다. 

귀애정은 귀애고택의 오른쪽 뒤에  화남면 귀호길에 있다. 

 

귀애정

 

영천 귀애정은  조선조 순조시대에 문인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사간, 사원부 집의, 돈령부 도정을 역임하고, 공조참의를 제수 받았으며 심학에 심취하고 대학강론의 저서를 남긴 귀애 조극승(1803∼1877)을 추모하여 그의 동생 성재 조규승이 지은 정자이다.

귀애정의 평면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一자형 주건물에 정면 1칸, 측면 3칸의 |자형 누마루 건물이 합해져 전체적으로 정면 4칸, 측면 3칸의 ㄱ자형 건물이다.

두 사람 모두 많은 관직을 지냈으나, 말년에는 고향에서 지내며 선비들을 가르치는데 힘을 썼고, 학문 연구에 정열을 쏟아 『귀애집』, 『성재집』 등을 남겼다한다.

지금까지도 조씨 문중과 지역 민이 두 형제의 학덕과 사상을 높이 여기고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귀애정과 연못

 

귀애정 앞에는 방형 연못이 있고 그 가운데에는 둥근섬을 만들어 음양의 조화를 이루었다. 또한 육각정자를 섬내에 두어 나무다리를 통하여 통행하도록 하였으나, 약 30년전에 도괴된것을 2009년에 복원하였다.

인공 정원에 연꽃이 피어 있는 모습을 6각의  누각에 앉아  보고 있노라니 , 생활속에서 일어나는 온갖 번뇌를 잊을 수 있을 것 같고, 한폭의 동양화 소재로 충분하게 잘 보전되고 있는 누정을 보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사랑받을 수있도록 잘 보전되길 바라며, 눈나리는 겨울에 이곳은 어떤 모습일까 생각해 본다. 일어나기 싫어 망설이다가 영천의 또다른 연못이 있는 연정 고택으로 향한다.

 

如一 유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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