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스물일곱번째 - 양주(2)

세종해피뉴스 2021. 7. 15. 23:14

천보산 회암사 대웅전

회암사지에서 산위로 발길을 옮기면, 회암사지에서 700 m 정도 떨어진 북쪽 골짜기에 회암사가 새로 창건되었다. 뒤의 천보산과 어울리는 회암사 이다.

천보산을 바라보며 일주문을 통과하면 산길로 오르게 된다. 다행히 차로 절의 종무소 까지 올라 본다. 사찰의 규모가 크지는 않으나 정갈 하게 관리 되어 있다. 이 사찰은 1821년 지공, 나옹, 무학선사의 부도와 탑비가 고의적으로 훼손되어, 조정에서 1828년 다시 중수 하였으며, 이 옛터 옆에 작은 절을 짓고 회암사라는 사호를 계승한다. 1922년 봉선사 주지 홍월초가 새로 보전을 짓고 불상을 봉안하였으며 지공나옹무학의 진영을 모셨다

 

영성각 과 관음전

1976년 호선(昊善)이 큰 법당과 삼성각영성각 등을 중건하여, 지금은 대웅전 삼성각 관음전 영산전과 새로이 범종을 설치할 누각, 그리고 요사체 등을 갖추고 있다.

 

중요 문화재로는 보물 제387호인 회암사지선각왕사비(檜巖寺址禪覺王師碑)와 보물 제388호인 회암사지부도보물 제389호인 회암사지쌍사자석등(檜巖寺址雙獅子石燈), 경기도 유형문화재로는 제49호인 지공선사부도 및 석등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0호인 나옹선사부도 및 석등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1호인 무학대사비(無學大師碑),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2호인 회암사지부도탑이 있다.

사찰을 둘러보고 사찰의 오른쪽 산등성이로 잘 정비된 데크길을 오르면, 지공, 나옹, 무학 삼대 화상의 부도가 있다.

이곳의 가장 아래 자리한 것은 무학대사의 묘비이다바로 뒤에는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 탑이 있다.

조선 태조의 왕사(王師)로서 국정을 자문하던 자초(自超 1327~1405)의 생애와 활동을 새긴 비이다무학 대사는 1344(충혜왕 5)에 출가하여 불법을 익혔고 1353(공민왕 2) 원나라 연경(燕京)에 들어가 지공(指空)과 나옹(懶翁)의 가르침을 받고 1356년에 귀국하였다. 1380년대부터 조선 태조와 인연을 맺었으며 한양 도성의 선정 과정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전한다

1407(태종 7)에 무학 대사의 부도를 먼저 모신 후 1410(태종 10) ‘무학 대사 비를 건립하였다왕명을 받들어 비문은 변계량(卞季良)이 지었으며 글씨는 공부(孔俯)가 썼다. 1821(순조 21)에 뜻하지 않은 수난을 겪어 파손되었으나 1828(순조 28)에 다시 중건하였다사각형의 받침돌에 비신(碑身글씨를 새기는 부분)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방부개석(方趺蓋石양식을 갖추고 있다.

비문에는 대사의 일생이 적혀 있고특히 원나라에 들어가 지공선사와 나옹선사를 만나 그들의 제자가 된일한양 천도에 큰 역할을한일회암사에 두스승의 묘탑을 세운 일 등이 나타나 있다.

폐사가 된 이후로 세월은 흘렀다순조 21(1821)에 광주 사는 이응준이라는 유생이 '회암사 삼화상(三和尙)의 비석과 부도를 없애고그 자리에 선친의 묫자리를 쓰면 대길(大吉)할 것이라는 지관 조대진의 말을 듣고지공의 부도와 무학대사의 비를 헐고 그 자리에 선친을 투장(偸葬)하는 사건이 일어났다다행이 비문의 훼손은 심하지 않아, 1828(순조 28새로 만들어 세웠다처음 세워진 비는 기단과 지붕만이 남아 전해진다. 순조는 이 사건을 보고 받고 범인을 유배 보냈다 한다.

 

보물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 탑

회암사의 주지이기도 했던 무학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활약한 승려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와의 관계로 더욱 알려지게 되었다. 이성계의 꿈을 풀이하여 왕이 될 것을 예언한 이야기와 한양천도와 관련된 설화 등은 특히 유명하다.
탑의 형태는 구름무늬를 조각한 8각의 바닥돌 위에 받침부분인 기단(基壇)이 놓이고 탑신(塔身)과 머리장식부분이 포개져 있는 모습이다. 
기단의 아래·윗돌은 연꽃모양의 돌이고 가운데 돌은 배가 불룩한 8각의 북모양으로 각 면에는 모양이 서로 다른 꽃조각이 도드라져 있다. 탑신은 몸돌이 둥근 모양으로 표면에 용과 구름이 가득 새겨져 시선을 모은다. 용의 머리와 몸, 비늘 등이 사실적으로 표현 되어 생동감있게 보이고 구름무늬가 한층 운동감을 느끼게 한다. 지붕돌은 8각으로 처마 부분에는 목조 건축을 흉내낸 모양 들이 새겨져 있다. 경사는 급하며 추녀끝은 가볍게 들려있다. 지붕 꼭대기에는 둥근 돌 하나만 올려놓아 간소화된 형태를 보인다. 조선 전기의 양식을 보여주는 이 탑은 규모가 웅대하고 모양도 가지런하다. 무학대사묘비의 기록으로 미루어 1407년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보물 화암사지 무학대사 앞 쌍사자 석등

무학대사 탑비 앞에는 보물인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앞 쌍사자 석등이 있다. 이 석등은 바닥돌과 아래 받침돌은 하나로 붙여서 만들었으며, 그 위의 중간 받침돌은 쌍사자를 두어 신라 이래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쌍사자는 가슴과 배가 서로 붙어 입체감이 없고 엉덩이가 밑에 닿아 부자연스럽다. 윗받침돌에는 8개의 연꽃모양을 새겼다. 불을 밝혀두는 곳인 화사석(火舍石)은 2개의 석재를 좌 우에 놓아 그 간격으로 생긴 2개의 공간이 창의 구실을 하고 있다. 지붕돌은 두꺼우며 처마밑이 반원모양으로 들려 있고, 경사면은 네 귀퉁이가 두툼하게 도드라져 뚜렷이 표현되었다. 지붕돌 꼭대기에는 둥근 돌 위로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있다. 기본형이 4각인 형태로 삼국 시대이래 고유의 8각 석등형태에서 벗어났다는 점이 주목되며,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 앞 사자 석등(보물 제656호)과 양식이 비슷한데, 만들어진 시기도 이와 같은 것으로 보아 조선 전기의 작품으로 추측하고 있다.

 

如一 유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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