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스물여덟번째 - 양산

세종해피뉴스 2021. 7. 18. 16:30

길을 멀리 잡아본다. 장마철이긴 하나 이런 때 폭포는 많은 수량으로 볼거리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여 평소 가보고 싶었던 곳으로 향한다. 이곳은 양산을 지 날 때 변 몇 번 인가 찾아볼까 하면서도 망설이던 곳이다. 이사찰에는 보물이 없기 때문이었는데, 이번에는 폭포와 어울리는 사찰이고 수량이 많아 볼만할 것으로 생각되어서 이다. 하여 이번 여행길은 다소 멀기는 하지만, 홍룡폭포와 홍룡사의 절경을 꼭 눈에 담아보고 싶어 여행지로 선정한다. 그 후 주변의 보물이 소재된 곳을 찾는다는 목표로 양산으로 향한다.

 

양산으로 향하는 길도 그리 맑지는 않았지만, 여행 하는 곳에는 비가 오지 않았던 그 간의 행운이 오늘도 함께 하였는지 입구에 도착하여도 비 소식은 없었다. 원래는 많은 방문자로 하절기는 일정기간 차량을 통제하는 기간인데, 이날도 통제하는 날이기는 하나 운이 좋게 절 입구까지 차로 올라가는 행운을 얻어 순조로이 절 입구 주차장에 도달한다.

 

가홍정
가홍정 뒤 계곡

일주문을 통과하니 가홍정이 눈에 들어오고, 그 뒤의 계곡으로는 계곡을 달려 내려오는 물줄기가 뿜어내는 소리가 계곡을 가득 메우며 울리고 있다. 이 물흐름으로도 감동이었으나 좀 더 위 물줄기인 폭포의 형상이 기대되는 순간이다.

 

산신각과 홍룡푹포로 오르는 길

산신각을 바라보며 흐르는 계곡물을 가로질러 다리를 건너면, 오른쪽에 폭포로 오르는 길이 물 줄기를 따라 있으며 이 길을 따라 오르면 폭포를 마주하게 된다.

 

홍룡폭포와 관음전
홍룡폭포와 약사여래불

33 관음보살님 중에 폭포에서 현신하시는 낭견관음 보살님이 계신다 한다. 벼랑에 앉아 용을 바라보는 형상을 하고 계시는 보살님이 낭견보살님이고, 천년 감로수를 내려주는 폭포에 관세음보살님이 상주하시어 기도하는 중생들의 원을 이루어 주시는 곳이다. 

평소의 자태는 사진으로 만 보았으나, 이날 본 폭포는 사진에서 보던 것보다 많은 수량이 떨어져서 물보라를 일으키는 현상을 보이고, 습함속에 함께 한 시원함과 그 소리가 심장을 차갑게 두근거리게 한다. 폭포와 조화롭게 관음전이 배치되고, 폭포와 인접한 법당은 화려하지 않고 소탈한 모습이며, 법당 안에서 떨어지는 폭포를 바라보며 소리를 듣노라면 폭포가 전해주는 자연의 이치를 깨닫지는 않을까 생각해 본다. 

다리를 건너면 그곳에 석조불을 모시고 있으며 이곳이 폭포와 법당을 함께 볼 수 있는 촬영지 이다. 이곳에 다소 머물며 몇 장인가의 사진을 찍어 본다. 사진은 순간의 기록이다. 다시는 재연할 수 없는 것이기에 모두들 그토록 사진으로 추억을 기록하려 하나 보다. 관광객으로 인해 오롯한 풍경사진은 담을 수 없는 아쉬움을 가지고 함께한 사람들이 담기는 것도 인연이라 생각하고 몇 장 기록을 남겨본다. 사진으로 본 포고를 눈으로 즐기고, 물 떨어지는 소리를 귀로 즐기며, 차가운 물줄기가 뿜어내는 시원함을 몸으로 느끼는 것으로 인해 오늘이라도 와서 보게 된 것을 기쁨으로 여긴다. 이어지 오르는 신도와 관람객에 자리를 내주고 흥룡사로 내려간다.

 

대웅전 내부와 무설전의 천수천안 관음보살

천성산 홍룡사 (虹龍寺)는 원효대사와 의상대사의 관음보살 친견설화가 전해지고 있어 관세음보살님이 상주하고 있는 관음성지라고 한다. 신라 제30대 문무왕 13년 (673) 원효 스님께서 낙수 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한 사찰이다. 홍룡사는 조선 선조 때까지 영남 제일 선원으로 천성산 제일 가람이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인해 모두 소실되었다. 폭포 아래 자리한 사찰에 들어서도 이날은 물 떨어지는 소리로 조용한 사찰의 이미지를 갖기 쉽지 않았다. 대웅전과 천수천안 관음전이 모셔진 무설전을 참배하고, 사찰을 나선다.

 

흥룡사에서 길을 나서며 양산의 보물을 찾아나선다. 이전에 보지 못한 보물을 찾아간다.

 

통도사의 말사로 성종 2년(1471년) 승려 성옥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나 이후 연혁이 남아있지 않다. 사찰 뒤의 산은 오봉산이다. 보물이 존재하는 용화사로 가는 길은 첩첩산중이 아닌 강가의 가람이지만, 마치 자신을 꼭꼭 숨기고 있는 듯한 곳에 자리한다. 낙동강 강변에 자리한 이 사찰은 사찰의 마당 끝에 경부선 철길의 방음벽인 듯한 높은 담이 쳐져 있어, 물금 물 문화전시관에서 경부선 철길 아래 지하도를 건너갈 수도 있지만, 이곳에 가기 위해서는 큰길에서 가파른 길을 따라 사찰까지 강을 보며 내려가야만 한다. 좁고 가파른 길이고 길에서 떨어져 관심이 있지 않으면 찾기가 힘들 것이다. 앞으로 기차가 다녀서 담으로 막혀 강도 볼 수가 없다. 산 중턱에 가람과 주변 환경을 볼 수 있는 전망대 같은 누정이 하나 지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이곳까지 찾은 자신을 대견하게 생각하며 대웅전에 석불을 접견한다.

 

용화사 석조여래좌상

보물 제 491호 명칭은 용화사 석조여래좌상으로 대좌(臺座)와 광배(光背)를 갖춘 완전한 불상이다. 불상 자체의 높이는 125cm 정도이다. 원래는 김해군 상동면 감로리 절터에 있던 것을 조선시대 말에 부근의 강변으로 옮겼으며, 1947년 2월에 용화사 대웅전을 중창하면서 현재의 장소로 옮겼다 한다.

 

당당한 어깨, 양감있는 가슴, 양감 있는 팔다리의 표현에는 입체감이 어느 정도 나타나고 있으나 손이나 목 등 세부 표현에는 형식화된 면이 엿보인다. 얼굴은 네모 지고 튀어나온 이마로 인해 힘이 있으나 가늘게 뜬 눈, 작은 코와 입 등에서 통일신라 후기의 시대적인 특징을 볼 수 있다. 왼쪽 어깨만을 감싸고 있는 옷은 신체에 밀착되어 있고, 옷 주름의 표현 역시 간략하게 되었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에는 불꽃무늬, 연꽃무늬, 구름무늬 등이 조각되어 있으며, 광배윗부분에는 작은 부처 1구와 비천상(飛天像)이 새겨져 있다. 특히 광배에 비천상이 새겨진 경우는 매우 드문 예로 해남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국보 제308호)의 광배와 동일한 형식이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에는 연꽃무늬와 비천 보살상 등이 새겨져 있으며 8각으로 되어 있다.

 

통일신라 중기의 불상양식을 지니고 있으면서 세부에서는 이상적인 면이 사라지고 형식화되어 가는 통일신라 후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임경대

왔던 길을 치고 올라가 임경대로 향한다. 임경대는 양산 물금에서 지방도 1022호선으로 밀양 방면 가는 길의 물금과 원동의 경계지역에 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숲의 쉼터에서 이곳 임경대의 절경을 읊은 조선 시대의 문인이 정사룡, 권만, 이효원 등의 시비가 보이며, 강 쪽으로 소나무 숲길을 걸으면 임경대가 나타난다. 이곳으로 가는 길은 두 갈래이다. 임경대는 통일신라 시대의 정자이다. 신라 최대의 문장가 최치원의 임경대를 바라보며 지은 한시로 인해 명소가 된 곳이다. 그래서 임경대를 '고운대' '최공대'라고도 한다.

 

낙동강

이곳서 보는 절경은 붉은 해가 지는 낙조라고 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바라보는 낙동강의 흐르는 모습이 한반도 지형을 닮은것 또한 이곳의 매력이다. 임경대에 올라 본 나의 눈에는 강을 배경으로 겹겹이 쌓인 산세이다. 병풍처럼 강 뒤에 자리한 산과 마을의 모습은 광활함의 툭 터진 시야에 잔잔히 흐르는 낙동강을 바쳐주는 강의 흐름 뒤에 자리한 아기자기한 저 멀리가 궁금한 첩첩산중의 절경이 함께 한 것이다.

 

임경대 안내도

오늘은 계곡, 폭포 그리고 강가의 전경 등 다양한 자연을 접하고 새로운 보물을 접한 기쁨을 함께 한 하루였다. 오늘은 양산 8경인 임경대와 용화사를 새로운 여행지로 정하려는 분들께 도움을 드리기 위해 주변의 관광 안내도를 올려 본다. 우리에게는 이름난 관광지 말고도 볼만한 곳과 보물이 곳곳에 산재해 있는데, 잘 알려지지 않은 관광지, 사적지와 문화재 등을 스토리 텔링도 만들고, 주변을 진입이 쉽게 정비하면, 보다 많은 사랍들이 편하게 이용할 수 있으며 보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그의 보전과 보존을 잘 지속할 수 있지 않은가 생각해 보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如一 유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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