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스물여섯번째 - 양주

세종해피뉴스 2021. 7. 9. 23:27

회암사지 당간지주

이번에 새로이 보물로 지정된 양주의 회암사지 부도탑을 찾아나선다. 잘 정비된 회암사지터는 건물이 없어도 정말 큰규모의 사찰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크기이다.

 

회암사의 창건시기는 정확히는 알수 없으나, 고려 명종 4년(1174년)에 금나라 사신을 맞이하였다는 기록을 통하여 이미 12세기 무렵에는 존재하고, 외국의 사신을 맞이 할 정도의 규모 이다.

 

고려말~ 조선초에 왕실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많은 불사가 이루어 지고, 당시 불교계를 주도하는 고승들이 머물던 최고의 사찰이었다. 충숙왕13년(1326년) 고려에 들어 온 인도의 승려 지공과 그의 제자 나옹이 우왕 2년 262칸의 규모로 중창하였다.

 

조선 초에는 태조의 스승인 무학이 회암사에 머무르며 왕실 사찰로서 자리 메김한다. 태조가 상왕으로 물러난 뒤에는 회암사에 궁실을 짓고 머무르는 동 행궁역활을 했다 . 이후 효령대군, 정희왕후, 문정왕후 등의 왕실인물들이 불사를 후원하고, 당대의 영향력 있는 승려들이 머무름에 국가적 차원의 비호를 받는 왕실사찰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회암사는 문정황후의 사후에 사세가 급격하게 기울었으며, 명종 21년(1566년)~선조 28년 (1596년)무렵 화재로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선조 38년(1605년)에 선왕의 어실을 조성하고, 인조4년(1626년)종친이 불사를 크게 벌이는 등 다시 재건되었던 것으로 보이나 병자호란때 소실되어 완전히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1997년 시굴조사를 시작으로 2015년까지 12차에 이루어진 발굴조사 결과, 회암사는 일반적인 사찰건축과 달리 궁궐건축의 건물구조나 방식이 나타난다. 또한 궁궐에서만 제한적으로 사용된 용두, 토수, 잡상, 청기와, 용자무늬 기와 , 봉황무늬 기와 등의 기와류나 왕실전용 자기를 생산하던 관요에서 제작된 백자가 다량 출토되어 조선 전기왕실과 불교문화를 알아 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곳을 다녀온 후 회암사지의 사리탑은 제 몇호 인지 조사 하다 뜻밖의 소식을 접한다. 이번부터 문화재청에서 보물 지정시 등록 번호가 사용되지 않는 가보다. 국보 1호 숭례문(남대문), 보물 1호 흥인지문(동대문)이라고  문화재마다 지정 번호가 있었다. 2021년 6월 29일 부터 문화재청이 문화재보호법 시행령 개정안을 입법예고 하면서 이 같은 지정번호 체계가 바뀌게 됐다. 앞으론 공무원이 아닌 일반 국민이 사용하는 문화재행정 관련 서식에선 ‘지정번호 및 명칭’을 쓰는 칸에 ‘명칭’만 쓰게 된다. ‘국보 1호 서울 숭례문’이 아니라 ‘국보 서울 숭례문’이다. 국보, 보물‧사적‧명승‧천연기념물 이 모든게 대상이다. 이미 국가무형문화재는 지정번호 표기 서식을 폐기했다. 이의 시행령의 실시 이유는 문화재 지정번호가 가치 서열 순위가 아닌데 그렇게 오해하는 이들이 적지 않아서다. 나름 변경하여야 할 이유는 있겠지만 지정번호가 없어지니,  아쉬운 감도 없지 않다. 공무원들은 번호를 계속 사용 하는 듯 한데 등록되는 순서는 어찌 알아야 하고, 고유 번호로 나름 구별하기 쉬웠는데 명칭으로만 구별하여야 하는 것도 쉽지 않을 듯 하다. 회암사지 사리탑이 6월 24일 이 지정일이라 어쩌면 등록번호 없이 보물로 지정된 첫번째가 아닐까 한다. 문화재청이 자료에서 고유번호는 모두 사라진 상태이다.

 

회암사지 북쪽에 위치하며 정제된 조각수법이나 전체적인 조형감으로 볼 때 조선전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승려의 부도인지 혹은 불탑인지, 승려의 부도이면 누구의 것인지 등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양주 회암사지 사리탑은 조선전기 왕실에서 발원하여 건립한 진신사리탑으로 규모가 장대할 뿐만 아니라 보존상태도 양호하며, 사리탑의 형식과 불교미술의 도상 및 장식 문양 등 왕실 불교 미술의 여러 요소를 알 수 있는 귀중한 탑이다.

 

사적「양주 회암사지」내에 위치한 사리탑은 발굴조사와 탑의 입지, 기록 등에 대한 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석가모니의 진신사리가 봉안되었던 불탑(佛塔)임을 알 수 있다. 또한, 탑에 새겨진 다양한 조각은 조선 시대 왕실발원 석조물과 양식적인 부분이 비슷하며, 회암사 구역에 위치한 세분 화상 탑과의 영향관계도 짐작해 볼 수 있다.

 

회암사지 사리탑

사리탑은 팔각을 기본으로 구축된 다층의 기단부와 원구형 탑신, 상륜부로 구성되어 있다. 팔각을 평면으로 지대석 윗면에 2층으로 조성된 기단을 구축하고 다른 승탑에 비해 기단 면석은 높게, 갑석은 두텁게 치석하여 현존하는 사리탑 중 가장 높은 기단을 구비하고 있다. 또한, 기단의 각 면에 다양한 장엄이 새겨져 있는데 용과 기린, 초화문(草花紋), 당초문(唐草紋), 팔부신중이 하층기단 대석으로부터 상층기단 갑석에 이르기까지 순차적으로 조식되어 있다.

 

탑신부는 원구형의 탑신을 지닌 또 하나의 승탑을 올려놓은 형상이다. 이와 같이 지대석을 포함해 전체 4단으로 구축된 기단 상면에 다시 낮은 팔각형의 기단을 놓고 위에 원구형의 탑신과 옥개석, 보륜으로 이루어진 상륜부를 구비한 승탑을 구축한 형상이다.

 

전체적인 양식과 조영기법, 세부 문양들이 조선 전기의 왕릉을 비롯한 왕실 관련 석조물과 비슷하며, 사리탑의 규모, 치석 상태, 결구 수법 등을 고려할 때 당대 최고의 석공이 설계․시공했을 것으로 보인다. 해당 문화재는 조선 전기 석조미술의 정수이자 대표작으로 역사, 학술, 조형적 가치가 크다고 판단된다.

 

높이가 3.36m로 우리나라 전통적 부도 형식인 팔각원단형과는 달리 기단부가 높은 2층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 위의 탑신부도 매우 높고 구형을 이루고 기단부는 널찍한 판자들을 서로 잇대어 짠 팔각의 지대석위에 다시 팔각의 하대석을 올리고 각면에 용과 천마를 새겼다.

 

사리탑 팔부신중상

하층 기단부위 팔각의 받침돌 측면은 당초무늬를 그위 펄각의 면석에는 팔부신중상을 새겨놓았는데 깊이가 얕은 부조임에도 불구하고 조각수법이 정교하다.

 

사리탑 상륜부

상륜부에는 아래로 향한 연꽃무늬 위에 위로 향하는 형태의 연꽃무늬를 새겼고 그위로 두 개의 두툼한 테 장식과 팔각의 덮개 장식 그리고 구슬 장식을 순서대로 표현 하였다.

이전에도 눈에 들었던 사리탑 이었다. 부두인지 탑인지, 어느분의 것인지 알길이 없어 보물로 지정 되지 못하였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조각의 정교함이나 형태나 보존 등으로 보면 능히 보물로 지정되어야 할 탑이었다. 보다 많은 노력이나 우연에 의해서라도 곡 역사적으로 존재의 이유와 가치가 밝혀지기를 바란다. 

 

이제는 이 회암사와 관계가 깊은 세분의 부도탑을 찾아 이곳 회암사지의 역사를 더듬어보려  회암사로 향한다. 

 

如一 유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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