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예순여섯번째 - 문경

세종해피뉴스 2022. 2. 15. 01:20

문경으로 길을 나선다. 오늘의 여행 목적지는 김룡사다. 문경을 다니면서도 이상하게 나의 맘을 사로잡지 못한 사찰이다. 우리는 길을 나서다 갈색 바탕에 흰 글씨의 안내판을 보게 된다. 이곳에는 대부분 사찰명과 가지고 있는 보물의 표기가 되어 있다. 이러한 표지판을 보면 차를 돌려 그곳을 확인하게 되는데 이상하리 만치 저녁 늦은 시간이 간 데 돌아오는 길에 통과하거나, 다음에 들러보려 하는 맘으로 통과했다. 물론 평소에는 볼 수가 없는 괘불탱이 이곳의 보물이라 괘불탱이 걸리는 행사가 있으면 찾아야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작년의 초파일은 일 년에 한 번 산문을 여는 이곳 문경의 봉암사에서 하루를 보냈다. 올해도 아마 초파일 휴무엔 봉암사를 방문할 듯하여 그동안 찾아보지 못한 이곳으로 향한다.

 

[ 우암정 전경]

문경에 접어들어 김룡사로 향하는 길목에 주암정을 찾는다. 근암서원을 지나자마자  현리로 들어선다. 초입에 금천의 흐름이 보이고, 맞은편 현리와 뒷산 금품산이 보이는 바위로 만능의 내는 우암대 위에 관리가 잘 안 된 우암정이 자리한다. 우암대는 청대 권상일 선생의 청대구곡 제1곡이면서, 근품재 체헌 선생의 석문구곡 제 3곡과 산양구곡 제 5곡이다. 이정자는 우암 채덕동 선생이 이 굽이에 은거하면서 우암대위에 우암정을 지은 것 것이다. 이곳을 500m 정도 길을 오르면 주암정이 있다.

 

[ 주암정]

주암정(舟巖亭)은 조선 시대 유학자 채익하 선조를 기리기 위해 1944년 후손에 의해 지어진 정자이다. 석문구곡 중 제2곡인 이곳 정자 앞으로 금천이 있고 강가에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들러져 있고 그 중 배 모양의 바위가 있어 그 위에 선실처럼 지었다. 예전에는 바로 밑으로 강이 흘렀으나, 홍수로 인하여 물길이 바뀌고 제방 공사를 하여 지금은 둑방 넘어 연못을 가진 모습을 갖게 된다. 예전의 밑으로 강이 흐를 때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지금은 연꽃과 능소화를 심어 운치를 더한다. 지금은 10대 증손(채훈식)이 관리 하고 있다. 방문시 툇마루에 앉아 커피 대접을 받기도 했는데, 1978년 허리디스크로 고생한다는 이야기는 알고 있지만, 오늘의 모습은 목발에 의지하여 연못을 정돈 하는 모습이 걱정을 앞서게 한다. 코로나로 인하여 닫은 문으로 정자에 오르지는 못한다. 이곳 정자에 앉아 둑 넘어 정이 보이나 관심을 가졌지만 이내 포기한다. 4월 철쭉 필 때가 절경이라 귀뜸한다. 계절마다 바뀌는 모습을 보기 위해 봄을 기약해 본다. 그때는 코로나도 잠잠하려는지...

 

[경체정]

둑방 위에 올라 건너편 정자를 바라본다. 경체정 (벽정)이 하얗게 얼은 강변 한켠을 차지하고 붉은 빛으로 자리한다. 원경을 바라보고 금천을 건너는 다리를 건너 경체정으로 향한다.

벽정은 청대구곡의 제2곡으로 부벽을 안고 도는 물굽이를 말한다. 청대 권상일 선생은 벽정이 현촌이 남쪽에 있다 하였는데 이 말은 현리 남쪽에 있다는 의미이다. 옛 문집을 살펴보면 이곳에 함취정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지금은 이 자리에 경체정이 세워져 있다. 경체정은 1935년 채성우를 비롯해 그 7형제를 기려 손자 부자가 지은 정자다. ‘경체’는 ‘형제간 우애가 깊어 집안이 번성한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정자는 원래 현리 마을 안에 있었는데 1971년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금천에 발을 담근 바위에 어울리는 정자라 느끼며 맞은 편의 주암정이 있는 바위산을 바라본다.

 

[근암서원]

길을 돌아 나오다 근암서원을 찾아본다. 근암서원은 조선시대 우암 홍언충, 한음 이덕형, 사담 김홍민, 목재 홍여하, 활재 이구, 식산 이먼부, 청대 권상일 등 칠현을 배향하는 서원이다. 1544년 근암서당으로 설립되었다가 1669년 근암서원으로 개칭한다. 1968년 서원철페령에의해 훼철되었고, 1982년 지역 유림과 배향인물의 후손들에 의해 사당돼 강당이 중건된다. 2011년 옛모습으로 복설된다.

 

조금 떨어진 곳에 문경 장수 황씨 종택이 길가에 자리한다. 길에서 보기에도 멋드러진 한옥을 그대로 지나칠 수 없어 안으로 들어가본다.    

 

[종택의 사랑채]
[종택의 안채]
[문경 장수황씨 종택의 탱자나무]

16세기 후반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문경지역의 조선 시대 양반집으로 기록으로는 장수 황씨 15대손인 황시간이 35세에 이집에 거주한 기록이 있다. 구조는 솟을 대문과 대문에 붙은 행랑채, 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의 사랑채, 오른쪽에 안채와 중문채가 있다. 왼쪽으로는 사당과 유물각이 있는데, 유물각에는 황희의 증손인 황정의 별급문기(특별한 사유로 재산을 물려줄 때 작성하는 문서)와 황방촌 유물( 황희정승의 유물 )이 있다. 이곳의 마당에는 황시간이 심은 것으로 추정되는 천연기념물 탱자나무가 자리한다. 이 탱자나무는 두 그루가 나란히 자란 것인데 마치 한그루인 것처럼 보인다.

 

길을 나서 김룡사로 향한다. 가던 길에서 대승사와 김룡사가 갈리는 길을 지나 계곡을 따라 난 길로 오른다. 눈에 들어온 김룡사의 모습은 적지 않은 위용을 보여주고 있다.

 

[김룡사 범종각]
[김룡사 보제루]

운달산에 자리한 김룡사는 신라 진평왕 10년(588년)에 창건된 고찰이다. 김룡사는 원래 금선대에 위치하고 조선 중기까지 운봉사로 불리었으며, 이후 17세기부터 각종 기록을 통해 김룡사로 불리게 된다. 효종과 숙종이 왕위에 있던 시기에 사찰이 커지기 시작, 영조와 정조 시기를 거치며 사찰이 규모가 정해진다.

학교 설립과 교육활동도 진행하여 1907년 경북 불교계 최초의 학교인 경흥학교를 김룡사에 설립하고 중등 정도의 교육기관인 지방학림을 운영한다. 이곳에는 지정 문화재로 동종과 영산 괘불도가 보물로 지정되어 있고, 명부전 목조 지장 삼존불상 및 제상, 대웅전, 석불입상, 삼층석탑등이 지방 문화재로 있다.

산내 암자인 금선대, 양진암, 화장암, 대성암에도 다양한 문화재가 있다고 한다.

 

대웅전 안에는 궤불함이 있고 불상이 모셔진 뒷편에 적은나마 궤불탱의 모습을 알 수 있게 사진을 붙여 놓았다.

 

[궤불함]
[보물 제1640호 문경 김룡사 영산회괘불도]

1703년에 수원(守源)을 비롯한 6명의 화원이 제작한 괘불도로, 오른손을 내리고 서있는 석가모니와 그를 둘러싼 많은 권속들을 질서정연하게 배치한 모습은 당시 상주, 문경 등 경상북도 지역에서 유행하던 괘불도의 형식을 잘 보여준다. 전체적으로 많은 인물들을 배치하면서도 불격(佛格)에 따라 크기에 차이를 두어 표현함으로써 권속 간의 위계를 효과적으로 표현하였으며, 본존과 멀어질수록 크기를 작게 하여 본존을 더욱 돋보이게끔 하였다. 불, 보살을 제외한 인물은 바림질기법을 사용하여 입체감을 강조하였으며, 특히 10대 제자와 사천왕, 팔금강은 세밀하고 능숙한 필치가 돋보인다.
이 괘불도는 17세기 경상도 지역의 괘불도 양식을 계승하는 한편, 이후 봉정사 괘불도(1710년), 상주 남장사 괘불도(1788년)로 이어지는 과도기적 양식을 보여주는 작품으로서, 영남지역의 영산회괘불도의 대표적인 작품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유려하면서도 세련된 필치와 정연한 구도, 적색과 녹색의 안정감이 있는 색감이다.

사진 왼쪽은 공공누리 자료이며 오른쪽은 불상뒤편에 크기가 적지만 사본을 전시하고 있어 괘불탱의 모습을 알려주고 있다.

 

[사인구비 제작동종 문경김룡사 동종] 문화재청자료

이곳의 보물인 김룡사 동종은 지금은 직지사 성보 박물관에 있다. 1670년 2월 상주목 (현문경시) 운달산 운봉사에서 사용하기 위해 사인을 비롯하여 태형, 도경, 담연. 기생, 김임 등 모두 6명의 주종장이 참여 하여 만든 것으로 종신에 양각되어 있다. 조선 숙종 때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장인 사인비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조선시대 종이다.

사인비구는 18세기 뛰어난 승려이자 범종 장인으로 전통적인 한국 종의 제조기법에 독창성을 지닌 요소를 결합한 종을 만들었다. 현재 그의 작품 8구가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며 전해지고 있다.

이 종은 조선 후기의 종 형태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같은 해 만들어진 홍천 수타사 동종(보물)과 함께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 주위를 화려한 구름 형태의 문양을 첨가한 독특한 당좌 형태로 표현하였다.

명문에 의하면 이 종은 1670년 수타사 동종보다 3개월 먼저 만들어진 것이다.

 

[김룡사 대웅전]
[모습이 다른 노주들]
[문경 김룡사 대웅전]

대웅전은 17세기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데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대웅전 건축 양식상 특이한 것은 건물의 기단 위를 평평하게 다듬지 않고 기둥을 세워 높이가 일정하지 않다. 그러나 기둥 모두 대웅전의 중심 쪽으로 약간씩 기울어져 건물 전체가 안정감을 주는 기법을 사용하였다.

 

[후불 탱화 김룡사 영산회상도]

1803년 김룡사에서는 대웅전, 극락전, 영산전 등 각 전각의 후불도가 세월이 흘러 색이 어두워지고 낡아 이를 새로이 조성하는 불사가 일어났다. 현재 전하는 불화는 대웅전의 영산회상도와 현왕도(현 직지성보박물관 소장)뿐이며,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18년 12월 20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각각 지정되었다.

 

이 불화는 비단 바탕에 채색으로 그려진 작품으로, 크기는 높이 5.2m, 너비 4.3m이다. 화면은 주존을 중심으로 보살, 제자, 호법신 등이 외호(外護) 하는 후불도의 일반적인 형식을 따르고 있다. 즉 중앙에는 주존인 석가모니불이 크게 그려져 있고 주존을 중심으로 앞에는 4위의 보살이 일렬로 서있으며, 좌우로는 8위의 보살이 서 있다. 화면 상단에는 가섭존자와 아난존자를 비롯해 10대 제자, 그리고 범천과 제석천을 포함한 사자관을 쓴 건달파, 사자관을 쓴 야차와 4명의 금강이 있으며, 하단에는 비파, 검, 용과 여의주, 탑 등을 든 사천왕이 배치되어 있다. 이처럼 김룡사 대웅전의 영산회상도는 조선후기 후불도 양식을 고수하는 한편 화면구성, 존상 구성 및 상호표현, 채색법 등에서 사불산화파반의 특징적인 도상과 화풍이 잘 반영된 불화로서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김룡사 명부전 목조지장삼존상 및 제상]

김룡사 명부전에 있는 지장보살과 시왕상은 조성연대와 미술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지난 2006년 6월 29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85호로 지정되었다.

김룡사 명부전 내의 불단은 'ㄷ'자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지장보살삼존상을 비롯하여 시왕상, 판관, 사자, 인왕상 등 총 21구의 목조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존인 지장보살이 대좌 위에 앉아 있고 그 양옆에는 지옥을 출입한 승려 도명존자와 전생부터 지장보살과 인연을 맺었다는 무독귀왕의 협시가 서 있으며 이 지장삼존상의 좌우에 시왕상이 배열되어 있다. 무독귀왕의 복장에서 발견된 발원문에 의하면 이 상(像)들은 1714년(숙종 40)에 조성된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이들 목조상에 입혀진 채색은 18세기 당시의 것으로 물감 흔적이 선명하게 잘 남아있다.

 

[김룡사 응진전 석조 십육나한좌상 일괄]

김룡사 응진전에는 목조인 석가여래삼존불좌상(3구)을 중심으로 좌우에 석조인 나한상(羅漢像 16구)과 제석천(帝釋天 2구), 사자(使者 2구), 동자(童子 1구)를 포함한 24구의 존상이 봉안되어 있다. 이 가운데 제작시기와 조각승이 밝혀지지 않은 석가여래삼존불좌상과 동자상을 제외한 20구가 ‘문경 김룡사 응진전 석조십육나한좌상 일괄’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512호로 지정되었다. 응진전 나한상들은 모두 가부좌를 튼 모습을 하고 있으며, 대부분은 양손을 무릎 위에 올린 자세를 취하지만, 염주나 죽비를 쥐고 있어 수행자의 모습이 부각된 나한상들도 있다. 그리고 해태를 가사 속에 두거나, 봉황 목을 움켜잡아 마치 서수(瑞獸)들을 애완동물처럼 다루는 모습이 형상화되기도 한다. 나한상들 아래에는 보관을 쓰고 홀(笏)을 쥔 제석천 2구와 두건을 쓰고 두루마리를 한손에 들고 있는 사자2구가 있다.

이상의 16나한상 및 권속들은 주존을 비롯한 석가삼존불과 모든 부분에서 현격한 형태적 차이점이 있다. 나한상 등에는 조각승 수연(守衍)의 스승인 승호파(勝湖派) 양식에 기반한 17세기 말 ~ 18세기 초 경상북도일대의 조각 양식이 잘 드러나 있다. 즉 둥글 넓적한 얼굴에 두툼하게 늘어진 귓불 형태,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린 자세 그리고 염주나 봉황을 안고 있는 점 등이다. 이는 김룡사 대웅전 석가모니불좌상의 복장에서 출토된 발원문에 의해서도 확인되는데, 응진전 불상의 조성시기는 1709년이며 조각승 수연 등에 의해 조성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김룡사 석불입상]

이 불상은 돌기둥 모양의 입상으로, 입체감이 결여된 민불(民佛) 형태의 석불이다. 수인(手印), 옷 주름 등 전신이 매우 낮고 투박한 부조(浮彫)로 조각되었고 얼굴만 비교적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1725년에 출간된『운봉사사적(雲峰寺事蹟)』에 의하면, 서쪽의 계곡 건너에 위치한 석탑과 함께 풍수사상에 입각하여 1709년에 조성된 것으로 확인된다. 조선시대 대부분의 민불처럼 투박한 조형성을 특징으로 보이고 있지만, 1709년이라는 제작연대를 알 수 있고 김룡사의 풍수적 약점을 비보(裨補)하려는 목적 등이 사적기에 기록되어 있어 학술적인 가치가 있다.

 

[김룡사 삼층석탑]

김룡사 삼층석탑은 김룡사 경재 응진전의 북동쪽 상부의 자연석으로 이루어진 석축 위에 위치하고 있다. 1709년에 지덕(地德)비보를 위해 석불입상(경상북도 문화재자료)과 함께 조성된 비보사탑(裨補寺塔)이다. 비보사탑은 대개 통일신라 시대와 고려시대에 집중적으로 조성되었다. 조선 후기에 풍수적 지덕 비보를 위해 김룡사처럼 탑과 불상을 동 시기에 함께 조성한 예는 그리 많지 않다.

이 탑의 전체 높이는 2.85m로, 단층 기단부와 3층 탑신부 그리고 상륜부로 구성되어 있다. 1층 탑신석 남면에는 삼층석탑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방형의 틀을 파서 불상을 새겼다. 2층 탑신부 이상은 탑신석 체감이 적으나, 옥개석 체감은 매우 큰 편으로 일정한 체감률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전체적으로 기단부에 비해 탑신부의 너비가 좁은 편이어서 가늘고 긴 느낌이 든다.

김룡사와 관련된 자료 중 <김룡사사적>에 의하면 1709년 삼층석탑과 석불 등을 조성하였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김룡사 삼층석탑은 양식적으로는 그 가치가 미미하지만, 조선 후기 석탑의 연구가 거의 전무한 상황에서 절대적 편년의 기준을 제시한 점에서 비보사찰의 연구에 좋은 자료이다. 

{문화재 설명은 나만의 문화유산 해설사 참조]   

 

김룡사를 나와 오던 길을 되돌아간다. 길이 가깝지 않다는 생각에 재촉하여 돌아온다. 오늘의 석양은 해가 유난히 크고 붉다. 이럴 줄 알았으면 금천에 떨어지는 석양을 주암정과 경체정에서 맞이하면 볼만 했을거라 생각해본다. 문경이 예전에는 그리 내왕이 쉽지 않은 곳 이었다. 예전엔 탐사, 탐험, 답사 등의 장기간 계획과 장기간 이동 그리고 숙박과 같은 거창한 명목으로 다니던 곳을, 지금은 대한민국 어느 구석도 마음만 먹으면 하루 안에 갔다 올 수 있다. 이렇듯 자유로이 가서 볼 수 있는 환경에 감사하며 집으로 향한다.

 

如一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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