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예순다섯번째 - 진안

세종해피뉴스 2022. 2. 9. 23:40

오늘은 진안으로 향한다. 진안은  용담군과 통폐합된 전라북도 동북부의 군으로, 이곳은 마이산과 용담호가 볼거리이다. 이번 여행은 이곳에 산재 되어 있는 누정을 중심으로 둘러 보려한다.

오미크론의  확산으로 사람의 접촉을 멀리하며 여행을 하고저 하다 보니, 진안의 명소인 마이산의 방문을 피하고 마이산 주변의 문화재를 둘러 보려한다. 

올해의 길 나섬에도 사람이 많은 큰 사찰이나 명소 보다는 작은 암자나 그 모습이 알려지지 않아 사람 들의 방문이 적은 곳을 우선으로 하고저 한다. 실제로 관심을 못받은 많은 문화재가 산재해 있기에 이를 찾아보는 즐거움도 적지 않다. 

 

 

진안에 도착하여 진안읍 연장리에서 이름을 알 수 없는 누정을 보게 된다. 그리 오래되지 않아선지 이름을 확인 하기가 어렵다.  가까이 다가가 보면 편액에 정자 이름이 있을텐데, 앞에는 내를 두고 뒤에는 마니산과 중간에는 고속도로가 지나가는  멋진 풍경을 멀리서 보다. 왠지 문화재로의 가치는 찾지 못할 듯 하여 동네에서 새로이 지은 누정이라 여기며 발길을 돌린다. 연장리의 마을에서 차를 목적지인 수선루로 향한다.

  

 

산에 형성된 동굴을 이용하여 지은 수선루는 커다란 돌산에 색동 저고리를 입은 형상으로 숨어 있는 듯한 모습이 언뜻 보기에 정자같이 보이지 않는다.

 

[ 보물 제 2055호 진안 수선루]

수선루는  2019년 12월 30일 몇몇 누정과 함께 보물 제 2055호로 지정된 곳이다. 안내판에 적힌 수선루 이야기는 수선루는 조선 숙종때인 1686년에 연안 송씨 4형제인 송진유, 송명유, 송철유, 송서유가 아버지와 아버지의 친구들이 이곳에서 바둑을 두고 시도 읊으며, 신선같이 늙지 않기를 기원 하면서 건립한 2층 누정이다. 수선루 (睡仙樓)라는 이름은 목사 최계옹이 '이들 4형제가 80세가 되어서도 이곳에서 풍류를 즐기는 모습이 마치 옛날 중국의 4신선의 기상과 같다'고 하여 붙였다고 한다. 

 

수선루는 조선 고종대인 1884년과 1888년 에 송석노와 송병선이 수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누정 건축물은 산 중턱 바위굴 속에 자리하고 있는데 뒤로는 산이 병풍처럼 두르고 앞에는 섬진강 상류천이 굽이돌아 흐르고 있으며 앞산과 들판이 펼쳐져 수려한 경관을 자랑한다. 「진안 수선루」는  건립된 후 1888년(고종 25년)과 1892년(고종 29년) 중수 된 정자로, 자연암반으로 형성된 동굴에 위치하여 비정형적인 틈 사이에 건물이 끼워져 있다. 또한 상부로 휜 창방(기둥머리를 좌우로 연결하는 부재)의 사용, 방 내부의 연등천장 구성, 바위 틈새를 적절하게 출입구로 활용한 점, 진입의 과정에서 경험하는 어두움과 밝음의 극적 대비 등은 정형의 건물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당시의 시대에 파격적으로 시도 되었던 건축 형식을 보여준다. 수선루의 평면 형태는 상·하층 모두 정면 2칸, 측면 1칸으로 규모도 비슷하지만 상하로 연속되는 부분은 중앙의 1칸뿐이며, 하층의 우측 출입 칸 상부공간을 상층의 마루 칸과 자연스럽게 연결시켜 외부공간을 내부공간화 시킨 것은 특출한 공간구성이라고 할 수 있음다. 또한 수선루는 누정건축으로서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하고 지형을 이용하여 암굴에 건축하였으며 지붕의 전면은 기와로 하고 후면은 돌너와로 마감하여 지역의 건축적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나만의 문화유산 해설사)

 

 

보물 지정 당시 방문한 곳인데 당시에는 입구의 문을 자물쇠로 걸어, 내부의 모습을 보지 못한채 돌아갔는데, 오늘은 고리는 걸려 있으나 자물쇠가 채워져 있지 않아 내부의 진입이 가능하여, 정자의 내부를 볼수 있게 되어 긴여행을 만족스럽게 한다. 문을 열고 어두운 동굴에 들어가듯 마루밑으로 들어가면 뒷편에 정자를 오를수 있게 된다. 이곳에 신발을 벗고 갈아 신을 덧신이 준비되어 있어, 누정에 올라 밖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보물 지정후 사람들의 발길이 늘어 이루어진 일 같다.

 

 

마루로 올라서며 볼 수 있는 전경이다. 굴안 정자의 답답함이 바깥의 환하고 너른 경치로 인해 마치 숨어서 세상을 보는 기분이다.

호사를 누려 본다. 방은 다소 높게 지어지고 내부는 화려한 장식을 넣었으며 문은 전체를 열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으며, 방안에는 정면을 향해 쪽문을 달아 방안에서 밖의 상황을 알 수 있게 하였다.

여름 한철은 문을 열어 놓으면 동굴의 냉기와 바깥의 냇가에서 부는 산들바람을 맞으며, 따사로운 햇살의 너른 앞마당을 내려다 보는 것을 상상하다보니 이곳에서 신선놀음이 가능하다고 여겨진다. 

 

[ 이층 방문과 방의 모습]
[방의 내부모습]

마이산이나 이곳 암벽의 표면에는 타포니라는 벌집모양의 큰 구멍이 있다. 이는 자갈이나 모래 등이 섞여 굳어진 역암으로 이루어져있다. 오랜세월 암석속에 흐르는 지하수에 의해 역암내의 결합물질인 석회질이 녹아내려 역암의 결합이 약해지고, 겨울철 역암속의 물이 얼면서 부피가 늘어나 역암네 균열이 만들어지는 공결쇄기 작용에 의해 역이나 바위가 암석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크고 작은 구멍이 생긴다. 이렇게 생긴 대형 타포니에 정자를 만든 것이다.

 

[바위사이의 샘}

내부는 굴에 건물을 지은 모습으로 누정 뒤편의 바위 틈에서는 물이 나오고, 이 물을 활용하여 물로 인한 번거로움도 없어  지내기 좋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굴 내부를 오르면 누정의 지붕위로 적은 공간이 있어 밖을 살필 수가 있다. 무심코 지붕을 보다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된다. 이곳에 비가 들이치지 않아서 인지, 연유를 알 수는 없으나, 앞쪽으로 난 지붕은 기와를 올렸지만 뒤로 난 지붕은 돌로 너와 지붕 처럼 올린 것을 보게 된다. 이 전의 방문에 접하지 못한 것이라 신기하기만 하다. 

 

 

수선루 초입에는 순조 28년 퇴휴제 송보산을 제향하기 위해 창건되었다는 구산사가 있다.  1967년 중건된 전면 3칸 측면 2칸의 기와 맞배지붕인 구산사 (龜山祠) 가 자리한다. 지난번 방문에  남루한 모양으로, 다소 보존상태가 좋지 않은 느낌이었는데 미제는 모습이 갈끔하다.

 

 

앞에 자리한 구산 서원과 함께 지붕이 계량 기와로 올려져 있어, 이전보다 깔끔하기는 하나 왠지 마음은 한구석이 비는 느낌이다. 

수선루의 보물 지정으로 입구에 자리한 구산사와 구산 서원의 남루한 모습을 계량 지붕으로 조치한 느낌이 든다. 주변의 체육공원은 잘 정비 되고 시설도 많은데 이 곳의 계량 지붕을 보니, 다소 마음 한켠이 답답해 온다. 문화재 보수도 군민이 함께 노력하여  원형에 가깝게 하였으면 하는 생각으로 마을을 나선다.

 

[형남정}

수선루를 뒤로 하고, 고려시대의 탑이 있는 보흥사를 찾아 나서다. 가던길에 정자를 발견하고 큰길에서 둑방길을 따라 걸으니, 은천이라 불리는 냇가에 드리워진 큰 암반위에 자리한 형남정이 점점 가까와 진다.  오랜 연륜을 가지고 있지  않은듯 하고, 주변 암반의 끝자락에 자리한 당당하고 운치있는 정자이다.

진안 전씨 전준권이 건립하고, 편액은 석전 황욱의 글씨라 한다. 세월이 흐르면 이 곳도 명소로 알려지기에 모자람이 없어 보이고, 둑방길 입구를 흙을 메우는 것으로 보아 이곳과 원강정 마을의 주차장으로 활용되는 공간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보흥사 입구의 원강정 마을에는 여러 건축물과 마을의 당산나무 등 볼거리가 많다. 이곳의 마을 회관에 주차 후 마을 안과 보흥사를 걸어보는 코스가 있다. 차로 마을 안의 소로로 둘러보고 보흥사로 향한다.

 

[보흥사 전경]
[ 강정리 오층석탑] 

 초행길의 설레임에 중간 중간 녹지 않은 눈으로 인한 묘한 긴장감으로 길을 오른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보흥사는 창건시기는 신라문무왕 8년이고, 500여년전 절의 건물은 다 소각되고,  탑과 종만 남은 빈터로 존재하였었다고 한다. 지금은 대웅전 건물과 요사체가 한동이고 한편에 졸의로 여겨지는 것이 온전한 종루를 기다리고 있고 한편으로는 북이 메달려 있다. 앞으로 많은 불사를 통해 더욱 발전할 것 같은 사찰이다. 이곳의 탑은 전북 유형 문화재로 지정된 정식명칭은 강정리 오층석탑이다.

 

1층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석탑이으로, 기단과 탑신의 1층 몸돌에는 기둥모양을 조각하였다. 두툼한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을 두었고, 네 귀퉁이는 살짝 들려있다. 꼭대기에는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과 복발(覆鉢 : 엎어놓은 그릇모양장식)이 남아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탑신의 1층 몸돌이 높고, 2층 몸돌부터는 줄어드는 정도가 작다. 기단이 1층으로 줄어들고 지붕돌이 두꺼우며 지붕돌 밑면받침이 4단으로 줄어든 점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눈에 들어오는 문양이나 장식없이 단순하지만 다소 길어 보이는 형태이지만 오랜기간 무너진 절터에 남겨져 있다가 이제는 사찰의 석탑의 역활을 하게 된것을 기쁘게 생각하며 사찰을 나선다. 
보흥사의 번창을 기대하며 전라북도 문화재 자료 15호 영모정으로 향한다. 

 

[영모정]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신의연은 무민공 황진, 건재 김천일과 함께 출병하기로 하였으나 부친의 임종이 가까워져 출병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때 왜병 대장이 조선은 충효 정신이 강하다는데 신의연이 정말 효자인지 검증하기 위해 '효자(孝子)'라고 종이에 써서 불을 붙였더니 종이가 타지 않고 하늘로 올라갔다. 이로써 왜병이 신의연이 효자인 것을 알고 해치지 않고 살려 주었다. 그 후에 선조가 이 사실을 전해 듣고 효자 정려를 내려 주었고 후손들은 그의 효행을 기려 영모정(永慕亭)을 세웠다. <출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영모정]

영모정의 안내판의 이야기는 조선 고종때 1869년 효자 신의련의 효행을 기리고 본받기 위해 세운 누정이다.  임진왜란때 병든 아버지를 간호 하던 중 왜적이 쳐들어오자 그의 아버지 만은 살려 달라고 청하였다. 그의 효성에 감동한 왜장이 신의련의 이름을 종이에 써서 태우니, 타지 않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한다. 이에 놀란 왜장이 마을 밖에 '효자가 있는 곳' 이라는 방을 세우고 왜적이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이로 인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때 이 곳으로 피난하여 살아 남은 사람이 5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영모정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2층 누정이다. 정자 아랫부분 네기둥의 받침돌은 거북머리 모양을 한 둥근 받침돌을 사용했다. 정자 뒤편에는 정려각이 있으며, 가파른 계곡에 긴기둥을 세워 건물을 앞으로 내어 지어 계곡의 경치를 가까이서 즐기며 정자를 향하여 오는 물줄기로 높은 배위에서 보는 듯한 느낌을 갇는다. 한여름의 녹색의 숲에 계곡 아래 자리한 정자가 보고 싶어진다.

 

 

오늘은 돌너와를 기와대신 얹은 누정을 두군데나 보게되는 경험을 한다. 이 정자는 오롯이 돌로만 얹은 정자이다. 녹지 않은 눈을 머리에 얹은 모습이 여느 정자와 다르게 정형화되지 않은 것에 이러한 소재를 활용한 연유나 동기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효자각]

영모정 뒷 길에는 미계 신의련 유적비와 효자각이 있다.

조금떨어진 곳에 또다른 정자인 미룡정이 있슴을 안내판을 통하여 알게된다. 걸어서 올라도 되고 차로도 갈 수가 있다 . 다만 이곳 영모정 앞이나 미룡정 앞이나 주차 공간이  나오지 않는다. 이곳 계곡이 여름에 각광받는 쉼터이기에 더욱 주차장에 대한 연구가 필요한 곳이다. 

 

[ 미룡정]

영모정 에서 미재천을 따라 조금만 오르면 미룡정이 나타난다. 미룡정은 다리를 통하여 계곡을 건너간다.

신의련의 후손들이 선생을 기리며 세운 정자 이다. 이곳에는 선생을 기리는 선돌이 여럿 있고 저마다  뜻있는  글귀를 세겨져 있어 다소 신성시 된 곳이라는 느낌도 갖는다.

논발이 녹지않아 겨울의 삭막한 풍경이 아닌 갈색과 흰색의 대비가 만들어내는 추운 겨울 계곡의 풍경을 잘 만들어내고 있다.

  

 

미룡정(美龍亭) 현판은 경오년(庚午年, 1990년) 여름에 남민(南民) 선생이 썼다고 하며, 정자는 앞면 3칸 옆면 2칸 팔작지붕을 한 시원한 느낌의 정자이다.  영모정과 같이 계곡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위에서 내려다 보는 정자로, 신의렴을 추모하려 많은 사람들이 모임을 갖기 좋은 자리라는 생각이 든다.

 

 

길을 돌아 나오는데 눈발이 날린다. 저마다의 효심에서 우러나온 건립 동기와 좋은 장소에 지어진 누정을 4개나 볼 수 있는 행운을 가지고 돌아오는 길을  눈으로 서두르게 된다.

내리는 눈발 사이로 보이는 마이산을 옆으로 스치며, 고속도로를 통하여 귀가 한다. 눈이 앞유리를 향하여 수평으로 날아드는 모습에 신나서 가슴이 뛴다. 속도감도 즐긴다. 오늘은 작은 것에서 다름을 발견 할 때의 환희와 이것을 연장시켜 주는 눈의 공연으로, 겨울의 다소 적막함에서 느끼는 가라앉은 감정을 해소해 본다.

 

如一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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