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쉰두번째 - 안동(하회마을)

세종해피뉴스 2021. 12. 6. 19:35

오늘은 안동으로 길을 나선다. 안동의 하회마을을 내려다보는 화산 자락에 선산이 있어  벌초및 묘사로 여러번의 발길을 하나,  목적한 일을 수행한다는 일로 정작 마을로 방문하는 것은  이루지 못하였는데 , 오늘은 일년에 한번 방문하기를 원하시는 모친의 뜻으로 성묘를 나섰기에 마치고 마을로 내려가 본다. 이곳 하회마을은 자주 와야 하는 곳이고,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는 마을이다. 이곳서 태어나서 자란 곳은 아니지만 왠지 어린시절부터 나의 고향으로 자리한 곳이다.

 

[마을 앞 낙동강과 부용대]

지형은 풍수학적으로 태극형(太極形)·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행주형(行舟形)이라고 한다. 낙동강이 동쪽으로 흐르다가 S자형을 이루면서 마을을 감싸고 흐른다.

하회마을은 동강가에 형성된 풍산 유씨의 씨족마을로  유운룡·유성룡 형제 대(代)부터 번창하게 된 마을이라고 한다. 예전 이곳이 물도리동 이라 불리고, 이를 한자어로 표기하면 하회인 것이다. 지금은 안동댐으로 수량이 적지만 도도히 흐르던 낙동강 물줄기가 이곳에서 S자 모양으로 동·남·서를 감싸 돌고 있고, 부용대라는 적벽과 이루어내는 독특한 지리적 형상과 강변의 소나무 숲인 반송정과 강변의 흰 모래사장이 빼어난 자연경관을 만들어 내고 있고, 마을에 자리한 기와집과의 조화를 이루어 한국의 미를 보여주고 있다. 

 

유씨가 집단 마을을 형성하기 전에는 대체로 허씨, 안씨 등이 씨족으로 살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들 성씨에서 류씨 집성촌으로 된데에 관한 <만인적선 이야기>와 <피 천석 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고유의 '하회별신굿탈놀이'로 유명한 이 마을은 입구에 탈 박물관과 마을 앞에 있는 하회탈 보존회의 정기공연을 중심으로 지속적인 보존 유지에 노력하고 있다. 별신굿에 쓰이던 탈들은 국보 제 121호 로 지정되어 있는데, 그 제작 연대를 고려 시대로 추정하고 있어 마을의 역사가 뿌리 깊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회마을은  남촌과 북촌으로 나눌 수 있으며, 유서 깊고 크기를 갖춘 많은 문화재를 잘 보존하고 있다. 이곳 하회마을의 하회의 뜻은 물이 돌아나간다는 물도리동이라는 동네 이름을 한자어로 쓴 듯하다.

 

[하회마을 고택]

하회마을엔 대표적 가옥이라 할 수 있는 양진당(보물), 충효당(보물), 화경당 고택(국가민속문화재), 염행당 고택(국가민속문화재), 옥연정사(국가민속문화재), 겸암정사(국가민속문화재) 등 많은 건축들은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생활상과 발달된 집 구조 등을 연구하는데도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양진당과 충효당은 일찌기 보물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고,  고택으로는 원지정사, 빈연정사, 작천고택. 양오당 고택, 하동고택등이 있다. 더할 수 없이 멋스러운 경치에 민속과 유교 전통을 잘 유지하고 있는 곳으로 우리나라 정신 문화의 연구·보존·발전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마을이다.

 이번 여행엔 종가집과 몇 서원을 찾아 보고 추후 동네의 내력이나 보물이 아닌 문화재 등을 소개 하기로 하고, 보물로 지정된 이곳의 겸암, 서애 두 어른의 종가와 후학을 위하여 노력한 병산 서원을 찾아본다.

 

[양진당 겸암 류운룡 종가]

1963년 보물로 지정된 안동 하회 양진당은 겸암 류운룡(1539∼1601)의 집으로 매우 오래된 풍산 류씨 종가이다. 입암 류중영(1515∼1573)의 호를 빌어 ‘입암고택(立巖古宅)’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류중영은 류운룡의 아버지이다. 양진당은 류운룡의 6대손 류영(1687∼1761)의 어릴 때 이름에서 따 온 것이다.

규모는 앞면 4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오른쪽 3칸은 대청, 왼쪽 1칸은 온돌방으로 바깥 주위에 툇마루와 난간을 둘러 마치 누(樓)집과 같은 인상을 주며 대청에는 문을 달아 3칸 모두 열 수 있게 하였다. 건물 안쪽 천장은 지붕 재료가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으로 꾸몄고 ‘양진당(養眞堂)’이란 당호와 함께 여러 현판들이 걸려 있다. 건물 안쪽 일부 재료를 만든 수법이 뛰어나고, 일반 주택으로는 제법 규모가 큰 조선시대 별당건축물 중 하나이다.

 

[충효당 서애 류성룡 종가]

 1964년 보물로 지정된 안동 하회 충효당은 조선 중기 이름난 문신이었던 서애 류성룡(1542∼1607) 선생의 집이다. 류성룡 선생은 여러 벼슬을 두루 거치고 임진왜란 때에는 영의정으로 전쟁의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는데 많은 공헌을 한 분이다. 선생이 쓴『징비록』과『서애집』은 임진왜란사 연구에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자료로도 평가 받고 있다.

충효당은 행랑채, 사랑채, 안채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와 안채는 손자인 졸재 류원지(1598∼1674)가 짓고, 증손자인 눌재 류의하(1616∼1698)가 확장 수리한 것이다. 행랑채는 8대손 일우 류상조(1763∼1838)가 지은 건물로 대문과 방, 광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쪽을 앞면으로 긴 행랑채를 두고 안쪽으로 ㅁ자 모양의 안채와 一자형의 사랑채가 연이어 있다. 사랑채는 남자주인이 생활하면서 손님들을 접대하는 공간으로 왼쪽에서부터 사랑방, 대청마루, 방, 마루로 이루어져 있다. 안채는 안주인이 생활하면서 집안 살림을 돌보던 공간으로 동북쪽에 부엌을 두고 ㄱ자로 꺾여서 안방, 대청, 건넌방이 있다. 또한 건넌방 앞에는 마루와 2칸의 온돌방, 부엌이 있으며 사랑채와 연결되어 있다. 사랑채 대청에 걸려 있는 ‘충효당(忠孝堂)’이라고 쓴 현판은 명필가였던 허목(1595∼1682)이 쓴 것이라고 한다. 비교적 지을 당시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어 조선시대 민가 건축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병산서원에서 본 앞산]
[병산 서원 입구]
[병산 서원 존덕사]
[병산 서원]

서애 유성룡의 학문과 업적을 기리기 위한 곳으로, 안동에서 서남쪽으로 낙동강 상류가 굽이치는 곳에 화산(花山)을 등지고 자리하고 있다. 유성룡은 도학·글씨·문장·덕행으로 이름을 날렸을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때에도 성곽 수축·화기제작을 비롯하여 군비확충에 힘써 많은 공을 세운 인물이다. 원래 풍악서당으로 풍산 유씨의 교육기관 이었는데, 유성룡이 선조 5년(1572)에 이곳으로 옮겼다. 그 후 광해군 6년(1614)에 존덕사를 세워 그의 위패를 모시고, 1629년에 그의 셋째 아들 유진의 위패를 추가로 모셨다. 철종 14년(1863)에는 임금으로부터 ‘병산’이라는 이름을 받아 서원이 되었다. 서원내 건물로는 위패를 모신 존덕사와 강당인 입교당, 유물을 보관하는 장판각, 기숙사였던 동·서재, 신문, 전사청, 만대루, 고직사가 있다. 병산서원은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을 담당해 많은 학자를 배출한 곳으로,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남아 있었던 47개의 서원 중 하나이며, 한국 건축사에 있어서도 중요한 유적이다.  소수서원(영주), 남계서원(함양), 옥산서원(경주), 도산서원(안동), 필암서원(장성), 도동서원(달성), 병산서원(안동), 무성서원(정읍), 돈암서원(논산)은 2019년 세계문화유산에 한국의 서원으로 등재 된 곳이다.

 

[보물 제 2104호 병산 서원 만대루]

만대루는 서원 누각이 가져야 하는 기능을 잘 유지하면서, 경관을 이용하는 전통적인 조경 기법을 잘 살렸고, 인공적 조작과 장식을 억제하고 건축의 기본에 충실한 성리학적 건축관을 잘 보여주는, 우리나라 서원 누각의 대표작으로 평가된다.  정면 7칸, 측면 2칸의  규모에 팔작지붕으로 전체가 개방돼 있어 독특한 외관을 가지고 있다. 경사지에 자리한 병산서원의 강학공간과 제향공간을 외부로부터 막아주는 방어막의 역할과 동시에 서원 맞은편에 있는 강과 절벽이 이루는 승경을 서원 내부로 끌어들이는 시각적 틀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자연의 경치를  건축물의 조정으로 그 아름다움을 최대한 살려내는, 전통적인 조경수법인 ‘차경(借景)’의 예를 잘 살린 누각이다.

병산 서원 가는 길은 이전에는 비포장의 적은 폭의 도로이었으나 지금은 많은 부분이 포장이 되어 먼지도 덜나고,  이전 보다는 방문이 쉬어진 듯하다. 앞으로는 완벽하게  포장 될 것이지만,  주차장에서 서원 까지는 도보로 이동하여야 하는 데, 이전의 서원 앞까지 진입하는 것보다는 불편하지만, 서원으로 부터 조금 멀리 자리하여 서원을 보호 하려 한 듯 하다 . 길을 돌아나와 겸암 정사로 향한다.

 

[겸암정사]

위치는 하회마을 강건너 부용대에 서쪽에 자리한다. 이전에는 배를 타고 오갔으나, 지금은 마을을 나와 길을 돌아 들어 가게 되어 있어 사람들의  발길이 적은 곳에 위치한다. 이곳을 지나 부용대의 정상으로 향할 수는 있으나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이 집은 서애 유성룡(1542∼1607) 선생의 맏형인 겸암 유운룡(1539∼1601) 선생이 학문 연구와 제자를 가르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조선 명종 22년(1567)에 지었다고 하며, 부용대 서쪽 높은 절벽 위에 자리잡고 있다. 정사(사랑채)는 하회마을이 바라다 보이는 남쪽 절벽 위편에 안채는 정사 뒤쪽에 배치하였다. 정사는 2층 누각 형식으로 앞면 4칸·옆면 2칸 크기이다. 가운데에 대청 4칸을 두고 좌우로는 방을 두었다. 방 앞쪽으로 좁은 퇴를 마련하였으며 ‘겸암정’이라고 쓴 현판은 스승인 이황 선생의 글씨라고 한다. 안채는 'ㄱ'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고,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에 부엌 2칸과 안방 2칸, 오른쪽에 건넌방 2칸을 두었다. 안방과 건넌방 앞쪽으로는 툇마루를 마련해 놓았다. 짚을 이어 올린 헛간채는 안채 왼쪽에 자리잡고 있다. 높은 절벽 아래 굽이도는 강줄기, 자연이 어울려진 진풍경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정사(精舍)다운 지형 요건과 전통이 배어 있어 귀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곳 하회마을을 중심으로한 문화재를 하루에 다 볼 수는 있으나,  깊이 있게 소개하기 위한 여행으로는 짧은 시간이었다. 애초의 방문 목적이 다르니 바삐 두 선생님의 종택과 후배를 양성하던 서원, 정사를 둘러 본다. 보물이 아니지만 문화재로의 가치가 있는 많은 고택과 마을에 전하는 많은 이야기, 하회탈춤과 부용대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서애 선생님의 박물관 등  다시금 이곳을 방문시 취재를 하여 올릴 예정이며, 아직 못가 본 안동 풍산류시 금계 재사나. 겸암 서원 가는 길에 있는 상봉정도 취재하여 다음에 올릴 예정이다.  겸암할배의 손이어선지 겸암정사의 방문은 남 다른 감정을 느끼며 안동을 벗어난다.  이곳 안동에는 유림문화와 양반문화가 만들어 낸 많은 보물과 훌륭한 문화유산이 많아 기회가 닿는데로 여행하여 글을 남기기로 하며 S字의 지방도 914호로 고개를 넘으며 집으로 향한다.

 

如一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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