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쉰한번째 - 천안 2

세종해피뉴스 2021. 12. 1. 13:37

천흥사지를 방문시 지나는 길목에 만일사의 이정표를 본 기역이 있다. 오늘은 이곳의 관음 보살상을 보려 한다. 이는 아직 보물로 지정 된 것은 아니나, 향후 보물로 지정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불상인 것이다. 천흥사지에서 저수지로 올라 반바퀴 돌아 성거산 산길로 접어들면, 3km 정도의 이정표가 보이고, 성거산 계곡을 따라 가을 빛으로 옷을 갈아 입은 산길을 돌아 돌아 가파른 산기슭을 오르면, 중봉에 만일사가 자리한다. 오후에  짙은 안개와 미세먼지로 약간 어득어득한 주변환경속의 사찰 분위기는 여느 사찰보다 아늑하고, 다양한 큰 바위와 어울려  고찰 같은 분위기를 띈다.

 

입구의 표지석에 안내된 문화재 소개로부터 이곳이 예사롭지 않게 많은 문화재를 가지고 있다고 느낀다.  만일사는 조계종 마곡사의 말사이다.

세운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일설은 고려 태조 4년(921)에 도선이 지은 사찰로, 석가모니불과 5층 석탑을 만들어 놓았다고 하나 신빙성은 없다.  고려 혜종때 만일 스님이 머물며 불상과 석탑을 세우고 만일사라 이름 지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고려 초에 도선이 이곳에 이르렀을 때 백학 한쌍이 내려와 불상을 조성하던 중 사람의 기척으로 중단한 것이 성불사의 마애불이라 한다. 학이 다시 하늘로 날아가 성거산을 굽어보니 만일사의 자리가 좋은 곳이라 이곳에 불상을 조성하기 시작하였다 한다. 날이 어두어 지자 백학들이 조각을 중단하고 날아가 불상은 미완성으로 남았다. 그래서 사찰 이름을 '만일사(晩日寺)라 하였다는 설화가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성가산 만일사라는 기록 등으로 미루어 볼 때 고려시대(목종5년)에 세워진 사찰로 추정되며, 1799년 펴낸 [범우고]에는 사찰이 이미 폐사되어 운영되지 않는다고 기록되어 있어 조선 후기 폐사 된 것으로 추정한다.

 

[만일사 오층석탑]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원래는 법당 앞에 있던 것을 1970년에 법당을 다시 지으며 현위치로 옮겼다. 높이 2.27m 로 넓은 지대석 위에 1층의 기단을 쌓고, 5층의 탑신(塔身)을 차례로 올려놓은 모습으로, 전체적으로 둔중한 비례를 보인다. 탑신부의 1층 몸돌은 옮길 때 잘못 놓았는지 거꾸로 놓여 있다. 기단은 4면마다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새겨놓은 후, 안상(眼象)을 얕게 새겼으며, 맨 윗돌의 밑면에 연꽃무늬를 두어 장식하였다. 탑신부의 각 몸돌은 기단에서처럼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본 떠 새겼고, 특히 5층의 몸돌은 4면에 부처의 모습을 도드라지게 조각해 놓았다. 지붕돌은 밑면에 2단씩의 받침을 두었으며, 처마의 선은 느린 곡선을 그리고 있다. 상륜부는 대부분 빠져 없거나 잃어버렸으며,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던 네모난 받침돌인 복발만 남아 있다.

왠지 모르게 세워놓은 모습이 균형 잡히지 않게 세워지고, 온전한 모습은 아니지만, 새겨진 문양과 부처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여느 탑의 조각에 못지 않은 가치있는 탑으로 보인다. 전문가의 손길로 온전한 모양으로 돌려 놓았으면 하는 탑이다. 

 

(만일사 마애불)

영산전과 관음전 사이 동쪽 자연암벽에 돋을 새김한 마애여래좌상이다. 미완성의 불상이며 마멸이 심해 윤곽을 알아보기 어렵다. 불상 높이와 너비는 6m 정도 이다. 미완성 작품으로 추정 되는데 상당 부분이 풍화되었지만 전체적인 윤곽은 확인할 수 있다. 주변의 유물과 석탑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불상으로 추정된다. 바위에 새긴 불상 중 앉아 있는 불상으로는 비교적 큰 편이다.

 

머리 부분은 직사각형이고 불상의 양귀는 길게 표현 되었으며 얼굴의 윤곽은 거의 알아 볼 수 없다. 양 어깨는 거의 수평으로 당당하게 보이며, 두손을 가슴 부근에 모으고 있는데 어떤 수인인지는 알 수가 없다.  양발을 무릎 위에 올리고, 발바닥이 하늘을 향한 자세로 앉아 있다. 몸에 걸친 법의도 윤곽 정도만 확인되고, 대좌는 연꽃이 장식된 연화 대좌로 보인다. 불상의 앞부분과 머리 위쪽 양편에 홈이 있는 점으로 보아 보호각을 설치했던 것 같다.

만일사 창건과 관련해서 학이 불상을 조각하다 날이 저물어 불상을 완성하지 못했다는 전설이 전하는데 이 마애불이 그 미완성 불상이라고 한다. 고려시대 만들어 진것으로 추정한다.

 

[관음전]

현재의 관음전은 1876년(조선 고종13년)에 지었던 법당을 1970년에 철거하고 다시 지은 것이다. 기단은 길게 다듬은 돌로 높게 축대를 쌓고, 사각모양이 주춧돌에 네모난 기둥이다.  전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된 초익공의 건물이다.

 

[천안 성거산 천성사명 금동보살입상]

만일사 관음전에 모셔진 관음상으로 관음상 뒷부분에 '통화20년 천성사'란 글이 새겨져 있어 고려 목종6년(1002년)에 조성된 불상임을 알 수 있다. 문화재자료 제257호 천흥사 동제관음상, 문화재자료 제258호 만일사 금동불은 동일한 불상이고, 1984년 5월 17일 오류 지정 됨에 따라 지정해제 후, 2002년 8월 유형문화재 제168호 천안 성거산 천성사명 금동보살입상으로 재 지정된다. 불상의 높이는 127cm이고 대좌의 높이는 34cm이다. 대좌에 ‘통화 20년’ 천성사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이에 근거하여 고려 시대 (1002년, 목종5)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일제강점기 사금을 채취하던 사람들에 의해 천흥사터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는데 일제 말기 철물 공출시 땅속에 묻혔던 것이 발견되어, 일본인이 매입해 보관하다가 당시 만일사 주지가 거둬 보관했다고 한다. 불상 뒷면의 ‘통화20년 천성사’명문으로 목종 5년(1002년) 만들어 졌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보살상은 머리에 보관을 썼는데 보관 가운데는 작은 불상이 조각되어 있고, 오른손에는 정병을 들고 있어 관음보살상 임을 알수 있다. 왼손에는 작고 둥근 구술인 보주를 쥐고 있다. 가슴에는 가는 목걸이가 늘어져 있고, 가슴 아래로 늘어진 옷자락은 발까지 부드럽게 흘러내린다.

 

[만일사 석불좌상]

높이 164㎝, 어깨 넓이 64cm의 불상은 관음전 뒤편에 있는 자연동굴 속 암벽에 조각한 좌상으로 정면이 서북쪽을 향하고 있는 석가여래상이다. 석가여래는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 부처님을 형상화한 것으로 석가모니(釋迦牟尼)란 '석가족의 성자'라는 뜻이다. 부처의 머리부분은 육계(肉계)가 없이 둥글게 되어 있고, 이마에는 흰 유리 구슬로 백호(白毫)를 끼웠다. 얼굴의 모습은 눈을 감은 형태에 귀가 길고 코도 그리 높지 않게 표현하였다. 목에는 삼도(三道)의 표현이 있는데, 머리를 잃어버려서 시멘트로 새로 만들었는데 신체에 비해 좀 크게 느껴진다. 몸에는 두터운 법의를 걸쳤는데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만 옷으로 감싼 우견 편단의 형식이다. 양쪽 다리를 모두 결가부좌한 상태에서 왼손을 위에 얹고 오른손은 무릎아래로 내려 땅을 가르키는 항마촉진법의 손모양을 하고 있다. 만일사의 석탑이나 마애불에 비하면 조각이나 수법이 세련되지 못하였다. 불상의 양식이나 주변의 유물로 보아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짐작된다.

 

고즈녁한 사찰은 바위군을 이룬 산기슭을 활용하여 아기자기 하고 볼거리가 다양한 사찰이다. 이곳 저곳 발걸음을 옮길 때 마다 다른 풍경을 보여주는 것은, 바위와 건물 석조물이 조화롭고 다양함은 이 작은 사찰이 주는 매력이다. 가파른 산길을 내려와 저수지를 돌고, 독립기념관을 통과하여 가야하는  용화사로 향한다.

 

목천면사무소에서 병천으로 가는 길 왼쪽 산기슭에 있는 용화사는 마곡사의 말사로 사찰의 창건 내력은 알수 없으나 발굴된 유물로 신라말이나 고려초로 추정한다. 이곳에 충남 유형문화재 제 58호 용화사 석조여래 입상이 있다. 굽보나 보물은 아니지만 도 지정 문화재로써 미래에 연구가 되면 보물로 지정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사찰로 들어서는 입구에 일주문이 없고, 길을 따라 들어서면 최근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약사여래불과 사각의 연지가 보인다. 이 뒤편의 당우로 대웅전과 극락전 그리고 요사채가 존재하고, 연지 앞쪽에 너른 주차장 같은 공터가 있다.

 

[용화사 석조여래입상]

통일 신라 말이나 고려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여래 입상이다. 여래상이란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께서 깨달아 부처가 되는 모습을 형상화 한 것이다. 불상의 조각이 수려하고 크기가 4미터에 이르는 대형이다. 머리는 소발이며 정수리는 둥글고 높다. 양족 귀가 크며 코도 오뚝하고, 눈은 가늘게 표현 하였던 것을 후대에 다시 손질 한 것 같다. 입은 다물고 작은 편이나 웃음을 머금고 있다. 법의는 양쪽어깨에서 가슴을 드러내면서 무릎아래까지 U자형으로 늘어져있다. 오른손은 손바닥을 정면으로 하여 손가락이 위로 향하고, 왼손은 손바닥을 정면으로 하여 손가락이 아래로 향한 여원인(與願印) 손모양을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양식의 전통을 잘 계승하고 있는 고려시대의 작품이다. 불상의 주위에는 옛날에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주춧돌이 7점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예전에는 보호각 내지 전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불상으로 원통형의 돌을 다듬어 만들었다. 

 

[석조여래입상]

석조 여래입상 옆에 천안시 향토문화재 1호인 석불 1기와 삼층 석탑이 있다.

전법륜인을 한 석조여래 입상은 절뒤편에 와불상태로 있었던 것을 현재의 자리로 이전 세웠다 한다. 불두는 용화사 앞의 산방천에서 수습하여 합체 하였다고 한다. 이는 불두와 불신이 다른 여래상의 합체 인듯하다. 불두만 보면 나발과 육계가 있고, 이마에는 백호가 있으며, 목에는 삼도가 있다. 불신을 보면 법의가 좌측의 석조여래 입상과 다르고, 수인이 여래만이 취하는 전법륜인을 하고 있다. 전법륜인은 부처님이 성도후 다섯 비구에게 첫설법을 하며 취한 수인으로 설법인 이라고도 한다. 입상에서 드물게 보는 수인이다. 법인은 통견이며 가슴부위가 통통하고 상의의 주름에 두줄의 띠 매듭이 수직으로 흘러 내린다. 크기는 3m 80cm로 악간 작으나 연화대좌위에 있다.

 

사찰을 둘러보고 귀가 길로 접어든다. 보물이 아니어도 지키고 알아야 할 문화재가 많다는 것을 배운다. 뭔가가 아쉬워 보물로 지정 되지 못하였는 지도 어렴풋이 느낀다. 

천안을 벗어나며 독립기념관과 천안 삼거리 공원, 그리고 유관순 여사님의  발자취를 돌아 보지 않고, 일본으로 부터 독립의 의미를 깊이 느끼지 못한 죄책감이 든다. 무엇보다도 내가 이렇게 문화유산을 보며 즐기는 것도 다 독립된 국가에서 지내기 때문이라는 생각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다음의 천안 여행은 독립운동에 관계된  태마여행을 가져 보아야 겠다는 생각을 가져본다.

 

如一유광하 기자

[관련기사] 如一同行 쉰한번째 - 천안 2 > 뉴스 | 세종해피뉴스 (xn--vg1b03zi5a71m9wruj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