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쉰번째 - 천안 1

세종해피뉴스 2021. 11. 30. 16:58

천안으로 길을 나서본다. 먼저 오래 전에 본 선이 굵은 태학산 삼태리 마애불이 떠오른다. 이곳은 태학산 자연휴양림을 통과 태학사와 법왕사를 지나 해선암 뒷산 기슭에 있다. 이날은  태학사 산상음악회가 11시부터 있다고 하여, 많은 차량의 방문으로 오르는 길이 통제되어, 산속 음악회가 있다 것을 모르고 찾았기에 입구에서 차량의 통제에 길을 뺏긴다. 아래의 주차장에 차를 대고 셔틀 버스로 오르라 하니, 여간 어려움이 따르지 않고, 붐빈다는 생각에 친견을 포기하게 된다.

그리고 예전의 방문 시의 사진으로 소개를 대신해본다.

 

[보물 제 407호 천안 삼태리 마애여래 입상]

충청남도 천안시 풍세면 태학산의 해선암 뒷산 기슭 큰 바위에 높이 7.1m나 되는 거대한 불상이 조각되어 있으며, 마애불 윗부분의 바위에는 건물이 있었던 흔적이 남아 있다. 얼굴 부분은 도드라지게 조각하고 신체는 선을 이용하여 표현하였는데, 이는 고려 후기 마애불의 일반적인 양식으로 이 작품이 만들어진 시기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민머리 위에는 둥근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큼직하게 솟아 있다. 양감있는 넓적한 얼굴은 가는 눈, 커다란 코, 작은 입으로 인해 더욱 경직된 인상을 풍긴다. 목은 짧아서 거의 없는 것 같이 보이며 이로 인하여 목에 있어야 할 3줄의 삼도(三道)는 가슴까지 내려와 있다. 어깨는 넓기만 할 뿐 양감이 없으며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묵직하게 처리하였다. 상체와 양쪽 옷자락에는 세로선의 옷주름을 표현하였고 하체에는 U자형의 옷주름을 새겼는데, 옷주름은 좌우가 대칭을 이루고 있어 도식화된 면을 엿볼 수 있다. 두 손은 가슴까지 들어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향했으며 오른손은 왼손 위에 손등이 보이도록 하였다. 이는 고려시대 유행하던 미륵불상의 손모양으로 이 불상의 성격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나만의 문화유산 해설사 참조)

 

[광덕사 ]

이곳을 돌아나오며 주변의 유명 사찰인 광덕사로 향한다 . 천안하면 연상되는 호두과자의 원료인 호두의 주산지로, 해발 699m의 광덕산은 충남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과 아산시 배방면, 송악면 사이에 있는 산세가 수려하고 숲이 우거진 명산이다. 산자락에 있는 광덕사는 신라 27대 선덕여왕때 자장율사가 창건하고 진산대사가 중건한 절로 경기, 충청지방에서는 가장 큰 절이었으나,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리고 그 이후에 대웅전과 천불전을 세웠다. 이곳에는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보이는 3층석탑이 남아 있으며, 팔각 형태의 지붕을 삽입하여 건축양식이 특이한, 새로 지은 종각이 있다. 또한 대웅전 입구에 있는 수령 400년의 호두나무도 볼만하다. 이곳은 계절에 관계없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는 곳이며, 천안의 명물 호두과자를 만드는 호두의 원산지이기도 하다.

[호두나무]

호도나무는 중국이 원산지이며 양지바른 곳에서 잘 자란다. 우리나라에서는 황해도 이남 지역에 주로 분포하며, 약 20m까지 자란다. 꽃은 4∼5월에 피고, 9월에 둥근 열매가 익는다.

이 호도나무는 나이가 약 4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는 18.2m이며, 지상 60㎝의 높이에서 두 개 줄기로 갈라져 가슴높이의 둘레가 각각 2.62m, 2.50m이다. 호도나무 3m 앞에는 이 나무의 전설과 관련된 ‘유청신 선생 호도나무 시식지’이란 비석이 세워져 있다. 전설에 의하면 약 700년 전인 고려 충렬왕 16년(1290) 9월에 영밀공 유청신 선생이 중국 원나라에 갔다가 임금의 수레를 모시고 돌아올 때 호도나무의 어린 나무와 열매를 가져와 어린 나무는 광덕사 안에 심고, 열매는 유청신 선생의 고향집 뜰 앞에 심었다고 전해지나 지금의 나무가 그 때 심은 것인지의 정확한 근거자료는 찾지 못하고 있다. 이곳 마을에서는 이것이 우리나라에 호도가 전래된 시초가 되었다 하여 이곳을 호도나무 시배지(처음 심은 곳)라 부르고 있다. 이 호도나무는 오랜 세월동안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가운데 살아온 나무로서 문화적·생물학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이 사찰의  보물로는  세조때 조선 세조 3년(1457) 8월 10일에 왕이 충청남도 천안에 있는 광덕사와 개천사에 내린 교지로 두 사찰의 잡역을 경감하라는 내용으로 국왕이 직접 내린 것으로 조선 전기 사패교지의 형식을 알려주는 자료인 광덕사 감역교지,와 불경의 내용을 정성스럽게 옮겨 적고, 화려하게 장식하여 꾸민 조선사경이 있다.

 

[보물 제 1261호 노사나불 괘불탱] 공공누리자료

이곳의 또 다른 숨은 보물은 광덕사의 이 괘불로서 노사나불을 중심으로 그린 것이다. 노사나불은 무한한 수행의 과정을 거쳐 무궁무진한 공덕을 쌓아 부처로 환생한 사람을 말한다.
전체적인 구도는 머리에 보관(寶冠)을 쓴 노사나불을 다른 형상보다 크게 그려 중앙에 배치하고 주위에 2대 보살·2대 제자·사천왕을 그려 넣은 모습이다. 본존은 타원형의 얼굴을 하고 있으며 둥근 머리광배에는 작은 부처 7구를 표현하였다. 가슴에는 만(卍)자가 새겨져 있고 양 손은 어깨 높이 정도로 올려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는 손모양을 취하고 있다. 붉은색의 옷과 매듭, 옷깃의 둥근 모양 장식 등이 어우러져 화려함이 돋보인다. 주변의 인물은 좌우대칭으로 나타나 있는데 어깨 부분의 양쪽에는 2대 제자가 묘사되어 있고 그 아래쪽으로는 2대 보살이 있으며 둘레에는 사천왕상이 배치되어 있다.
붉은색과 녹색을 주로 사용하였으며 배경에는 군데군데 구름을 그려 넣어 밝고 선명한 채색과 더불어 화려함을 더해준다.

 

[충남유형문화재 삼층석탑]

대웅전  앞에 자리한 삼층석탑은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의 석탑이다. 위층 기단과 탑신부의 각 몸돌에는 기둥모양을 조각하였고, 특히 탑신의 1층 몸돌에는 문모양 안에 자물쇠를 새겨 놓았다. 지붕돌은 밑면에 4단씩의 받침을 두었으며, 윗면에는 급한 경사가 흐르고, 네 귀퉁이는 위로 치켜 올라갔다. 꼭대기에는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과 복발(覆鉢 : 엎어놓은 그릇 모양)이 남아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통일신라의 일반적인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지만, 아래층 기단의 기둥 장식이 생략되고, 지붕돌 받침이 4단으로 줄어드는 점 등으로 보아 고려 전기에 세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대웅전 : 게단입구 양편에 석사자가 보임]
[대웅전 옆면]
[광덕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천안 광적사 삼세불도] 

대웅전 내부에는 목조석가여래 삼존불이 모셔져있고 그 후불 탱화로 삼세불도가 있다. 천안 광덕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은 1728년에 제작된 것으로, 조성시기의 발원문과 복장물이 남아 있고, 조선후기 조각 및 화원 승려의 계보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며,  광덕사 대웅전의 후불탱화로 조성된 삼세불화은, 1744년 조성되었으며 원래는 중앙에 영산회상도, 왼쪽에 아미타회상도, 오른쪽에 약사회상도가 봉안되어 있었으나 1991년 약사회상도가 분실되어 현재 영산회상도와 아미타회상도 2점만 남아 있다. 안정된 구도와 원만한 인물표현, 유려한 필선, 뛰어난 채색 등 18세기 전반 불화의 형식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개인이 이러한 불화를 무엇에 사용 하려 탐하는 것이 정말 궁금하다. 색즉시공이며 공즉시색이라는 진리를 설하는 사찰의  후불 탱화를 뜻이나 알고 가져가는 것 인지 의문이다.

 

[광덕사 석사자]

대웅전의 정면 계단 앞 좌우에 1구씩 서 있다. 조선시대에 만든 것으로 짐작된다. 하늘을 보는 형태가 사람의 얼굴과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다. 입은 약간 벌리고 있고, 이빨을 조각했으나 형식적인 표현으로 사실감이 없다. 사자의 머리털도 도식화 되어 구름 모양으로 표현되어 있다. 머리부분에만 조각이 되어 있고, 몸통 부분은 조각이 생략되었다. 앞다리는 직립하였고 꼬리는 짧게 선으로 표현되었으며, 뒷발은 돋을 새김으로 되어 있다. 받침돌과 사자의 뒷다리는 하나의 돌로 되어 있는데 돌 밑부분에서 조금 올라온 부분에 사자의 뒷다리를 표현하였다.  돌의 풍화가 심하여 사자의 모습을 찾아 보기 어렵다. 온전히 세월의 흐름 만으로 모습이 저리 되었는데도 넉넉한 웃음을 띄는 모습과  계단 난간에 기댄듯  쪼그려 앉아 햋볕을 즐기는 듯한 자세가 인상적이다.

몇번인가 뒤를 돌아보게 하는 광덕사를 나서니 몇 몇 등산객이 보인다.

 

 

호젓한 사찰을 뒤로 하고 탑과 옛 사찰의 웅대함을 상징하는 당간지주가 남아있는 천흥사지로 향한다. 이전 주변의 정리작업으로 다소 산만했던 기억이 떠오르는데, 절의 입구라 생각되는 당간 지주에서 이곳 탑까지의 거리가 약 300미터로 멀다고 생각되었는데 그 사이로는 천흥천이 흐른다. 지금은 인가와 밭으로 사찰의 규모를 알수 없으나 커다란 사찰이었지 않을까 생각한다. 천흥사지오층석탑 위로는 새로운 천흥사가 자리하고 옆으로는 천흥저수지가 자리한다. 사지의 규모와 모습을 알수 없으나 천흥사는 고려 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천흥사 창건연대는 정확하지 않다. 이르면 통일신라 말 적어도 10세기 창건된 절로 추측된다. ‘하늘이 흥한다’는 천흥이란 이름은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936년 직후 만들어지지 않을까 생각된다. ‘하늘이 편하다’는 천안 이름은 930년 왕건이 지었다. 하늘이 편안하며 그 다음은 흥해야 한다고 생각한 걸까.  천안의 국보는 3가지 이나 이중 봉선 홍경사 적갈비(국본 제 7호) 이외 성거산 천흥사 동종( 국보 280호) 과 보협인 석탑 (국보 제 290호)는 국립중앙박물관과 동국대 박물관에 각각 소장 되어 있다. 

절터에서 출토된 국보 280호로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중인 천년이 넘는 천흥사 동종에 새겨진 명문에 의하면 고려 현종 원년으로 되어 있어 당간지주와 5층석탑도 이와 시대를 같이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국보 성거산 천흥사명 동종]

동종은 높이 167.7cm, 종구 지금 95.5cm로 고려전기 범종 가운데 가장 큰 종이다. 전체적으로 검은 색조를 띠고 있는 이 종은 문양 장식이 섬세하고 화려하다. 천사가 하늘을 나는 무늬(비천상),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뉴(꼭대기 장식으로 종을 매다는 장치) , 종을 치는 부분(당좌) 등 처리 방식이 통일신라종 특징을 이어받고 있다. 균형잡힌 종 몸체와 세부적인 예술성으로 상원사종(725년),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 771년)과 함께 수작으로 꼽힌다.

천흥사 동종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기까지 여러 군데를 거쳤다. 동종의 기구한 운명은 천흥사가 폐허로 변하면서 시작됐다. 조선초기 이미 천흥사는 사라진듯하다. 동종은 그후 여러 곳으로 옮겨다니다가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 종루에 설치됐고 광주군청에도 잠시 있었다. 일제강점기인 1910년대 창경원박물관(이왕가박물원)이 생기면서 그 곳을 옮겼다가 해방후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다.

 

[보물 제 354호 천흥사지 5층석탑]

 천안시와 고운문화재연구원은  2019년부터 2021년 까지 진행한 '천안 천흥사지' 발굴조사 결과, 탑 주변에서 고려시대 중요사찰로서의 격을 가늠할 수 있는 중심 건물인 금당지(추정)와 2호 건물지, '천흥'(天興) 이라고 적힌 명문 기와 등을 발굴, 고려시대 초기 최대급 규모로 창건된 왕실 사찰로 추정한다.  

 

 천흥사터에 서 있는 고려시대의 탑이다. 2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린 거대한 모습으로, 고려왕조 시작 직후 석탑의 규모가 다시 커지던 당시의 흐름을 잘 보여주고 있다.

 탑신을 받치고 있는 기단은 아래층이 너무 얕아 마치 1층으로 된 듯 하다. 아래층 기단의 4면에는 각 면마다 7개씩의 안상(眼象)이 촘촘히 조각되어 있다. 위층 기단의 4면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겨 두었다. 탑신은 각 층의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새겼다. 몸돌은 4면의 모서리에만 기둥 모양을 뚜렷하게 새겨놓았고, 위층으로 올라가면서 줄어드는 비율이 비교적 완만하다. 지붕돌은 얇고 너비가 좁으며, 밑받침이 3단으로 매우 얕게 조각되었다. 경사면은 가파르다가 이내 수평을 이루고 있어 그 반전감이 크고, 네 귀퉁이에서의 들림은 날아갈 듯 가뿐하다. 전체적으로 웅장하고 아름다우며 돌의 구성에도 규율성이 있다. 특히 탑신에서 보이는 완만한 체감율은 온화하고 장중한 느낌을 더해준다.

 

절터에는 탑 외에도 천안 천흥사지 당간지주가 남아 있으며, 동종(銅鍾)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져 있다. 동종은 남겨진 기록에 의해 고려 현종 원년(1010)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는데, 이 탑 역시 이와 시대를 같이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보물 제 99호 천흥사지 당간지주]

탑과 당간지주 만이 관람객을 맞이하고 ,당간지주는 마을 안에 자리하고 있어 찾기가 쉽지 않다. 근처의 저수지 주변 카페와 테크길로 관광객의 발길이 있으나, 이곳이 예전의 카다란 사찰이고 많은 보물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찾아 주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보존은 우리 옆에서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고 관심을 유도 할 그무언가도 갖추고 잇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천년전의 문화재를 지척에 두고 지내는 마을 주민들의 관심과 돌 봄이 그리고 그를 통해 그것을 잘 알리고 돌보는 환경이 조성 되었으면 한다. 마을에 자리한 석조물이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알려 주고 있다. 

 

[충남 유형문화재 만일사 관음 보살상]

또 하나의 천흥사 유물로 이곳에서 3~4km 떨어진 성거산 중턱의 만일사(晩日寺) 관음보살상이 있다. 일제강점기 사금을 채취하던 사람들에 의해 천흥사터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는데 일제 말기 철물 공출시 일본인이 매입해 보관하다가 당시 만일사 주지가 거둬 보관했다고 한다. 불상 뒷면의 ‘통화20년 천흥사’명문으로 목종 5년(1002년) 만들어 졌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이렇듯 천안의 천흥사지 터에서는 국보급의 동종과 5층석탑, 그리고 위용을 자랑하는 당간 지주와 최근 발견된 만일사 관음 보살상이 있던 큰 사찰이다. 

 

 저수지를 끼고 돌며 산속의 작은 암자인 만일사로 향한다. 

 

如一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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