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마흔 아홉번째 - 서천, 군산

세종해피뉴스 2021. 11. 27. 14:16

군산 근대문화 역사 거리는 군산항을 반경으로 1km안에 밀집한 일제강점기의 건축물과 적산 가옥들이 있는 곳으로, 이곳 군산은 일제 시대에 김제 만경평야의 곡식을 수탈해간 현장으로, 군산 근대 문화 역사 거리는 일제의 건물이 많아 있다. 구 군산세관 같은 사적이나 군산 근대역사 박물관 같은 아프지만 꼭 가보고 기억해야 할 곳 들이 있다.

굳이 우리의 문화를 둘러보는 자리에 이곳을 끼우는 것이 내키지는 않아, 두시간 정도의 걸린다는 시간을 내지 못하고 ,계획에 없었던 일이라 여기며 애써 피하고 만다.

 

일제시대의 것은 동국사를 본 것으로 만족하며 발길을 군산의 발산리로 향한다. 군산의 보물은 동국사 소조석가 여래 삼존상 및 복장 유물 이 외 발산리에 석등과 오층 석탑이 있다. 군산도 많지 않은 문화유산으로 인해, 발산리의 유적은 잘 관리 되는 것 같으나, 왠지 방문시마다 이곳 발산리의 유적지 분위기가 밝아 보이지 않음을 느끼는 것은 초등학교 뒷마당에 자리해서 일까?  오늘은 그나마 단풍과 함께 하니 조금은 밝은 마음이다.

 

 

보물이 두가지 그리고 유형 문화재와 모아 놓은 석등 석물이 모두 훌륭하고 여느 지방의 박물관 앞 정원 못지않은 문화재로 가득 찾으나, 처음 이곳을 방문할때부터 번번이 드는 왠지 스산한 기분은 이곳에 자리하게된 슬픈 역사속에서 나오는 듯하다.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이곳으로 이동 하면 초등학교 뒤편에 자리잡은 석탑을 만난다 . 

 

[보물 제 276호 발산리 오층석탑]

예전 이곳에서 농장주였던 시마타니 야소야가 일제 강점기에 불법으로 획득한 석조 문화재가  함께 발산 초등학교 후원에 전시되어 있다. 석탑 앞에는 석탑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어 관람객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이탑이 원래는 완주(完州) 고산면 봉림사터에 있던 것을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 대규모 농장주였던 시마타니 야소야가 소달구지를 이용해, 당시 자신이 소유한 농장 사무실이었던 이곳 발산 초등학교로 옮겨왔다고 한다. 2단의 기단(基壇)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였으나 지금은 탑신의 한 층이 없어지고 4층까지만 남아있다. 기단은 신라 석탑 모양을 본 따서 만들어진 것으로 아래·위 기단 모두 네 모서리에 기둥인 우주를 조각하였으며 아랫 기단의 우주 사이에는 사이 기둥인 탱주도 조각하였다. 또한 기단 위의 4층 탑신에도 역시 네 모서리에 우주를 두었다. 지붕돌은 경사가 급하고 추녀 끝이 약간 들려 곡선을 이루고 있으며, 밑에는 옥석이라는 3단의 받침을 두었다. 이러한 모습들은 고려 시대 석탑의 특징이다. 탑 머리 부분에는 하나의 보개와 다섯 개의 보륜이 있으나 훗날 보충한 것으로 보인다.

원형 그대로 원래의 자리에 있지 못하고, 옮겨 온 이유도 개인의 욕심에 의해서 일까, 건물 뒤편에 자리 한 분위기가 탑의 본연의 역활을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여느 사찰의 앞마당에서  빛나는 위용을 뽑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근처의 다른 보몰인 석등을 찾아본다. 용이 석등을 감아도는 형상의 보기 드문 석등이나 이또한 많은 다른 석등과 자리하여 비교우위를 뽑내고는 있으나 그 형상에 대한 적절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는 생각이다.

 

[보물 제 234호 발산리 석등]

보물 234호 발산리 석등 은 불을 켜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이를 받쳐주는 세 단의 받침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받침돌의 맨 아랫돌인 하대석과 맨 윗돌인 상대석에는 원형으로 가늘고 긴 연꽃잎이 조각되어 있는데 모두 여덟 잎이다. 받침의 가운데 기둥인 간주석은 사각의 네 모서리를 둥글게 깍은 모습으로, 표면에 구름 속에서 요동치는 용의 모습을 새겼다. 이러한 형태는 우리나라에서는 하나밖에 없는 독특한 모습이다. 등불이 밝혀지는 화사석은 네 각의 네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 여덟 각을 이루게 하였으며, 각 면에는 네 개의 창과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번갈아 두었다. 사천왕은 불교의 법을 지키는 신으로, 화사석에 새겨 등불을 보호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지붕돌은 여덟 각으로 각 모서리선이 뚜렷하며, 곡선을 그리는 처마는 여덟 귀퉁이에서 치켜 올림이 시원하다. 꼭대기에는 연꽃 무늬가 조각된 머리 장식 받침대를 마련해 놓았으나, 머리 장식은 남아있지 않다. 화사석의 사천왕상과 지붕돌의 양식 등을 통해 볼 때 통일 신라 시대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듯하지만, 받침 부분의 기둥이 네 각으로 변하고 화사석 역시 네 각을 닮은 여덟 각으로 이루어져 있어, 네 각에서 여덟 각으로 변해가는 과도기적인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다. 석등을 만든 시기도 고려 전기인 10세기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초입에 설치되어 있는 도지정 문화재  육각부도가 자리한다. 보물 전단계의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이다. 보물은 역사적인 기록과 조형물의 독창성 , 예술성 그런것으로 지정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어느 것 하나 유형문화재들이 독창적인 것이 아니고 작가의 혼이 들어가지 않은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전문가가 아닌 나의 눈에도 문양과 구도 그리고 표현하고자 한 모든 것이 범상하지 않은 부도이다. 아쉬움은 그 크기가 그리 크지 않음과 어느 스님의 것인지 알 수 없는 것 이다.

 

[도지정 문화재 자료 발산리 육각부도]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부도는 높이 175㎝로, 육각의 2단 받침돌 위에 탑신과 옥개석을 올린 형태이다. 육각의 탑신 2면에는 문(門) 형태를 새겼고, 4면에는 사천왕상이 희미하게 새겨진 것으로 보인다.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 185호 일반적인 탑형 부도양식을 따르면서 그 평면이 6각이라는 희소성과 함께 비교적 높은 조각수법으로 예술적 가치 또한 지니고 있다.

 

이곳에는 다양한 형태의 석등과 부도가 있다. 모두 그나름대로의 사연과 쓰임새가 있을 텐데 알수 없는 외국인 손에 의해 이렇게 한곳에 모여 있는 모습이 마음을 눌렀나 보다.

 

(석물들)

이곳에는 이외의 많은 다양한 석등과 석물들이 존재한다. 근처에는 일본인 대지주가 불법 수집한 수많은 한국의 서화와 도자기 등 골동품을 보관하던 건물인, 일본인이 자행한 수탈의 역사를 잘 간직한 일본인 농장창고라는 등록문화재도 있다. 왠지 모를 침울한 분위기가 그냥 오는 게 아닌 것 같다. 발산 초등학교는 과거 일본인 농장주 시마타니 야소야가 운영했던 농장 사무실이었다 한다.

군산에서 수탈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문화재를 수집한 일본인들이 귀중품을 보관하기 위해 지은 건축물로 대규모 농장을 중심으로 농업에서의 수탈이 가장 심했던 전라북도 및 군산 지역 근대사를 잘 보여주고 있는 곳이다.

 

서둘러 길을 나선다. 서천군 비인면 성북리에 자리한 성북리 오층석탑으로 향한다. 도로 인근에 자리하여 접근이 쉽고 1963년에 보물로 지정되어, 봉서사의 목조 아미타 여래 삼존좌상이 지정된 2012년 이전까지는 서천의 유일한 보물이었다.

 

[보물 제224호 서천 성북리 오층석탑]

지방적인 특색이 강했던 고려시대의 탑으로, 옛 백제 영토에 지어진 다른 탑들처럼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의 양식을 모방하였는데, 특히 가장 충실히 따르고 있다. 

바닥돌 위에 올려진 기단(基壇)은 목조건축의 기둥과 벽과 같이 모서리에 기둥을 세우고, 그 기둥 사이를 판판한 돌을 세워 막았다. 탑신(塔身)은 몸돌을 기단에서처럼 기둥과 벽을 따로 마련하여 세워 놓았는데, 각 면의 모습이 위는 좁고 아래는 넓어 사다리꼴을 하고 있다. 몸돌 위로는 지붕돌을 얹기 전에 지붕받침을 2단 올려놓았는데 그 모습이 정림사지5층석탑을 떠올리게 한다. 1층 몸돌의 각 기둥들이 아래로는 기단을 누르고, 위로는 지붕받침을 이고 있어, 마치 신을 신고 관을 쓰고 있는 모양이다.

지붕돌은 얇고 넓으며 느린 경사를 이룬다. 경사면의 아래는 수평을 이루다가 양 끝에서 위를 받치듯 살짝 들려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 형태의 크고 작은 돌이 겹쳐 얹혀져 있고, 그 위로 네모난 돌이 놓여있다. 전체적인 세부양식이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따르려 힘을 기울인 흔적은 보이나, 몸돌에 비해 지나치게 큰 지붕돌, 1층에 비해 갑자기 줄어든 2층 이상의 몸돌 등에 의해 균형이 깨지고 있다. 하지만, 백제계 석탑양식의 지방분포에 따라 그 전파 경로를 알아내는 데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서천의 여행길에 군산까지 넘나드는 여행을 마친다.

서천과 군산에서 느낀 점이 나름 달라, 동시에 가슴에 품고  귀가하는 느낌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개인의 욕심에 의해 이동한 석물들을 대하며, 제자리와 본연의 쓰임새에 대한 것들을 생각해 본다. 아울러 각 지방마다 많은 보물을 소장하지는 못하고 있다. 지역을 정하고 여행을 다니는 내게 있어  지정되어 있는 보물 뿐 아니라, 보물로 지정 될 수도 있는 지방 문화재도 찾아보고 있지만, 보다 많은 다양한 지방 문화제를 소개 해야 겠다는  마음가짐을 가지게 하는 여행이다. 오래된 사찰이나 박물관에는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여 여러 곳을 방문하지 않아도 볼거리가 많지만, 어떤 시군은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를 많이 보유하지 못하여 먼 거리의 이동에도 불구하고  보면서 알아가는 즐거움을 만족하지 못하는 일이 있다. 여행 시 숨어 있는 지방 문화재도 찾아 알리는 역할도 하여 보고 싶다는 생각에, 이후로는 보물이 아니라도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가를 찾아보고 기록을 남기고저 한다.

아쉬움과 허전함 속에 무언가 새로운 여행의 목표도 세운, 나름 어수선한 여행을 마치고 빠르게 어두워지는 길을 달린다.

 

如一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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