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如一同行 마흔 세번째 - 함양

세종해피뉴스 2021. 10. 19. 21:52

오늘은 함양의 법인사를 찾아 나선다. 이사찰 있는 보물 명칭 법인사 목조아미타애래좌상과 보물 함양 법인사 감로왕도를 보기 위함이다. 

 

 

 함양으로 가는 길목에는 명승 화림동 거연정 일원이 있다. 명승을 그냥 지날 수 없어 발길을 돌린다, 여러번 온 곳 같은 장소에서 매번 다른 감흥을 느끼게 하여 다시 발길을 잡는 것이 명승이라는 생각이 든다. 거연정은 조선 중기 화림재 전시서 가 이곳에 은거하여 억새로 만든 정자를 그자손이 1872년 대건 한 것 누정이다. 길 아래로 군자정 동호정 등의 정자가 화림계곡에 자리한다.

 

 

짧은 시간 머물다 법인사로 향한다. 법인사는 안의면 소재지에 자리한다. 주변에는 관청건물이 자리하고 사찰으로 입구에 2층의 종루가 없었다면 무심히 지나는 사람들에게는 눈에 띄지 않았을 것이다. 사찰은 극락보전이 본전으로 아마도 이곳에 소장하는 두보물이 2010년과 2011년에 보물로 지정된 후 점점 번창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2010년 12월 보물로 지정된 현재 극락보전에 봉안되어 있는 보물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1657년에 영규(靈圭)와 조능(祖能) 등이 조성한 불상이다. 현재 영규가 조성한 다른 불상은 조성한 예가 확인되지 않지만, 조능은 1640년 법영(法靈)이 수화승을 맡아 제작한 전북 옥구 불명사 목조불좌상의 조성에 참여하고, 1655년에는 수화승을 맡아 전북 전주 봉서사 목조관음보살좌상(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156호)을 조성하였다.

 

이 상은 타원형의 원만한 상호에 신체는 허리가 길고, 어깨는 넓고 완만한 어깨선을 갖추었으며, 결가부좌한 다리는 높이가 낮고, 폭이 넓어 전체적인 비례가 알맞고 안정감이 있다. 수인은 하품중생인을 결하였는데,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오른손은 손등을 위로 하여 중지와 엄지를 맞대었다. 나발을 표현된 머리에는 육계가 구분이 불분명하게 낮고, 육계의 경계에는 반달형의 중간계주를, 정수리에는 원통형의 정상계주를 표현하였다.

 

상호는 타원형으로 이마가 좁은 편이며, 이목구비는 반개한 눈이 길고 위로 치켜 올라가 눈매가 날카로우며, 초승달형의 눈썹과 오똑한 코, 가늘고 길게 표현된 입술은 그 끝이 살짝 올라가 미소를 머금고 있다. 미간에는 백호를 돌출되게 표현하고, 목에는 삼도의 흔적을 얕게 표현하였다.

 

법의는 이중으로 걸쳐 입은 방식이다. 오른쪽 어깨 앞쪽으로 살짝 걸쳐 내린 대의는 끝단이 약간의 곡선을 이룬다. 결가부좌한 다리를 덮은 군의는 발목 아래로 흘러내리는데 양측으로 서너 개의 주름으로 나누어 정리하였다. 이 불상은 군의 주름과 오른쪽 다리 소매 자락의 표현이 매우 특징적인데, 다리 중앙에서 수평으로 부채꼴 모양으로 주름을 이루는 것이나 무릎 좌우의 주름이 각기 다른 점 그리고 왼쪽 무릎 뒤에 놓인 좁은 소맷자락이 무릎에 밀착되어 흘러내려 승각기의 안쪽으로 들어가게 표현하였지만 소매자락이 몸에 밀착되지 않게 표현한 점 등은 이 불상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법인사 아미타여래좌상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할 당시 발원문과 복장 유물이 확인되었으나 발원문은 현재 불상에 다시 납입한 것으로 추정되며, 발원문을 제외한 묘법연화경과 보협인다라니, 복장 마개 등의 복장 유물은 현재 해인사 성보박물관에 위탁 보관중이다. 법인사 아미타여래좌상은 이 시기 불상 중에서 조각적 완성도도 비교적 높다.

 

 

2011년 12월 보물로 지장된 이 감로왕도는 화기에 의하면 원래 안국암에 봉안하기 위하여 함양군 금대암에서 제작되었다. 화면의 구성은 상부에 칠여래, 인로왕보살, 관음·지장보살을, 중심부에는 재단(齋壇), 아귀, 법회를 주관하는 작법승, 참여하는 후손들이, 그리고 하단에는 산불, 호랑이, 홍수 등 사람들이 죽는 다양한 모습이 표현되어 있는 등, 18세기의 일반적인 감로왕도 도상의 범주에 속하고 있다.

 

얼굴을 비롯한 몸체의 윤곽선과 의복 등의 묘선이 매우 섬세하며, 적색과 녹색을 중심으로 한 비교적 엷은 부채법과 잘 어울려 화면전체에서 부드러운 화취가 느껴진다. 더구나 칠여래 아래의 소극적인 나무 표현, 표정이 없는 듯한 아귀의 묘사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주제에 걸맞은 강한 인상은 주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먹으로 표현한 영혼의 형상이 매우 사실적이고 생동감이 있다.

 

이 그림은 화면 아래의 화기에 의하면 1726년에 채인(彩仁), (일민)日敏, 태현(太玄) 등 세 화사에 의하여 제작되었으며, 이들은 18세기 전반 지리산을 중심으로 전라도와 경상도 일대에서 활동하던 의겸(義謙)의 화업에도 참여하였다. 수화승인 채인은 운흥사 감로왕도(1730,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56호) 제작에도 참여하였기 때문인지 양자는 도상적으로 매우 유사하다. 현존 감로왕도 가운데 제작시기가 비교적 이르고, 당시의 화풍을 잘 전해주고 있는 작품이다.

 

두작품 모두 극락 보전에 소장 되어 있는데 유리 액자에 담긴 감로왕도를 보며 느낀 점은 ,문화재나 전시회의 그림, 그리고 유리 상자에 담긴 문화재를 보면 늘 빛이 그려내는 명암이나 반사되는 빛으로 인하여 그 내용물이 인공조명이나 창틀을 타고 드는 햇빛의 반사로 이하여 원형을 제대로 볼 수 없음이 안타까웄다. 안을 잘 볼수 있는 빛에 영향을 받지 않는 유리가 왜 개발이 안돼는지 궁금하다. 

 

 

짧등 시간 새로이지정된 보물을 보았다는 생각을 가지고  2021년 새로이 보물로 지정된 명칭이 ‘미륵원’명 청동북을 보러 길을 나선다. 같은 함양이지만 이 청동북을 보러 지리산 자락으로 이동하여야한다.  이를보관하는 사팔은  등구사라 한다. 오도재를 넘어 산등성이에 자리한  비탈길을 올라 찾아온 등구사는 법당 건물 등의 공사가 한창이다. 이사찰은 통일신라 하대에 조성된 삼층석탑이 일부 결실 된채로 존재한다. 규모가 크고 조각수법이 뒤어나 석탑이다

 

등구사는 함양 마천면 구양리 촉동마을 뒤쪽에 있는 사찰로 가락국이 멸망하기 전 경남 산청의 돌무덤과 덕양전에 위패가 모셔진 구형왕(양왕)때 터를 닦아 서기656년 (신라태종 무영왕릉 2년)창간한 사찰이다. 가락국 왕실의 기원 사찰로 동찰과 서찰이 창건되었으나 가락국의 멸망과 더불어 별궁은 무너지고 사찰마저 화재로 손실 된다. 1709년 편찬된 등구사 중창기에는 무너지 ㄴ사지를 지키던 초학 대사, 탄기, 자상, 초익등 고승들이 3년여 권선으로 중창 하였으나 억불 숭유 정책으로 더 이상 원형을 복원하지 못하였다. 등구사라는 지명은 일대가 거북이 형국으로 절이 있는 연화봉에서 삼종산을 바라보면 마치 거대한 거북이가 산을 오르는 풍수를 갖추고 있다.

 

 

보물 제2109호 ‘미륵원명 청동북’은 측면에 음각으로 새겨진 명문(明昌 二年 庚戌年)을 통해 1190년(고려 명종 20) 미륵원(彌勒院)에 걸기 위해 제작한 금고(金鼓)임을 알 수 있다. ‘미륵원’은 충남 공주에 있었던 인제원(仁濟院)의 후신(後身)으로, 고려시대 잠시 운영되는 동안 사용되었던 사찰 명칭으로 보이며, 1530년『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 편찬될 당시에는 다시 원래의 명칭인 인제원으로 불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청동북은 사찰의 일상적 불교 의례에서 사용하는 불교의식구(佛敎儀式具)이자 범음구(梵音具)인 청동제 금고(金鼓)로서, 금구(禁口), 반자(盤子), 쇠북 등으로 불리며, 공양(供養) 시간을 알리거나 사람을 모을 때 주로 사용한다. 현존하는 청동북은 공명구의 위치와 형태에 따라 세 가지 형식 정도로 나누어지는데, 이중에서 미륵원명 청동북은 뒷면이 뚫려 있는 형식으로, 이를 반자(盤子, 飯子, 半子, 判子, 般子)라고도 한다. 3개의 뉴(鈕)를 가진 전형적인 고려시대 청동북으로, 내구(內口)에는 16개의 꽃잎을 가진 연꽃이 당좌(撞座)를 중심으로 배치되었다. 당좌 안에는 14개의 연과(蓮顆)가 양각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표면이 다소 마모되어 원래 금속 색이 드러나 보이기도 하지만, 얕게 도드라진 양각으로 표현된 연꽃잎들의 배치가 균형감 있게 잘 구성되어 있다. 보물 제2109호 ‘미륵원명 청동북’은 12세기의 청동북 중에서 비교적 큰 크기의 대형 청동북이자 문양의 조각 솜씨가 좋고 형지 및 주조 후 수리 흔적 등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고려시대 청동북의 제작 기법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확실한 제작 연대와 명칭, 발원자와 사찰명 등이 확인되는 귀중한 작품으로서, 보물로 지정하기에 충분하다.

 

이보물은 보물 지정 이후 사람들의 잦은 발길과 공사로 인하여 이의 보전을 걱정한 주지 스님이 해인사에 맞김으로써, 그 모습을 보지 못하였다. 두어사람이 들어야 할 정도의 크기라는 설명과 고려시대 의 보물이라 앞으로는 이를 보호할 보호각을 지은 이 후에나 이절에서 볼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공사를 시작하고 그 모습을 보려면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하다.

아쉽지만 사찰이 번창하기를 바라며 많은 가락의 역사가 담긴 이곳에서 먼발치의 지리산 산흐름을 바라본다.

 

돌아가는 길에  새로이 보물의 지졍을 통한 문화재에 대한 지원으로 보물을 잘보호하기위한 공사 현장을 본 것 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한다.

더많은 지방 문화재 들이 보물로 지정되어 관심 받고 후대에 잘 물려주기를 바라며 하산한다.

최근에는 여행을 새로이 지정된 문화재, 보지 못한 것 위주로 여행 길을 택하지만, 오래전 본것의 변화와 보전을 다시 한번 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본다. 지나는 길에는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산재해 있는 많은 문화재와 볼 거리가 있다. 오늘의 여행 목적은 이루었지만 귀가 길에 인근의 몇 몇 문화재를 더 둘러 보며 가려한다.

 

如一 유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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